제84화
초연한 표정의 그녀가 입을 뗐다.
“발트레 소공작으로서 인사드립니다. 오늘 파티는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위해 개최되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시면 기쁠 듯합니다.”
이끌어줄 선대가 없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 하나 없이 당당했다.
많은 사람이 알트페리아에게 시선을 빼앗기며, 개회사에 집중했다.
* * *
알트페리아의 개회사가 끝났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박수로 그녀를 환대했다.
공식 행사의 첫 등장은 성공적이었다.
‘후, 나 좀 잘한 걸지도.’
많은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힐 땐 조금 겁을 먹었지만, 요란스러운 박수 소리를 들으면 무사히 잘 해낸 것 같았다.
‘이제 일해야지!’
후원 파티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에드나의 땅과 골든 페어리로 성공한 자신이 사회에 큰 기부를 했다는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골든 페어리의 신 메뉴를 홍보하는 것.
모인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회장 안을 둘러보던 알트페리아는 멈칫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길 와?’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사람은 로저필드 백작 부인이었다.
‘그랑힐데 공작 부인에게는 편지를 보냈지만!’
백작 가문까지 챙길 필요는 없어서 로저필드에는 초대장을 보낸 적 없었다.
아마도 힐다와 가까운 사이인 점을 이용하여 대신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교계가 자신의 이야기로 넘쳐나는데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참석하는 저 신경이 참 대단했다.
그녀의 목적은 알 것 같았다.
‘골든 페어리의 신 메뉴가 궁금한 모양이야.’
신 메뉴를 가장 궁금해 할 사람은 크리스털 크라운의 오너인 로저필드 백작일 것이다.
비겁하게도 재판 이후로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기도 힘든 부인을 대신 보내다니.
그녀를 무시한 알트페리아는 싱긋 웃으며 참석한 귀족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에드먼드 후작을 발견했다.
“에드먼드 후작, 어서 와!”
“소공작께서 개최하는 파티인데 빠질 수가 있습니까. 여기, 제 아내와 함께 왔습니다.”
“후작 부인! 파티에 참석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후작의 곁에 서 있던 부인이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좋은 일을 하신다길래 찾아왔습니다. 조카들도 함께 데려왔는데 너무 시끄럽게 굴어 죄송하네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남매 둘이 뱅글뱅글 돌며 서로를 쫓고 있었다.
“꼬마 손님들도 환영이에요!”
어린아이를 파티에 데려와도 좋다고 한 건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 선보일 신 메뉴는 아이들을 겨냥한 메뉴였다.
많이들 와서 좋아해주면 나야 좋지.
훈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참에 알트페리아의 곁으로 귀족들이 하나둘 모였다.
“골든 페어리의 오너가 소공작이셨다면서요. 저는 요즘 프라푸치노에 푹 빠졌어요. 쿠폰도 벌써 두 번이나 모았을 정도로 자주 갔어요!”
“어머, 감사해요.”
여기에 호갱, 아니, 고객님이 많이 계셨다.
“저는 망고빙수를 가장 좋아해요. 자주 포장해서 먹는답니다.”
“선물로 받은 마카롱이 골든 페어리의 뚱카롱이었어요! 모양이 너무 예뻐서 먹기가 아까울 정도였어요.”
모여든 사람들도 빙수나 마카롱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아메리카노가 입맛에 맞더라고요. 요즘 아침은 홍차 대신 커피로 시작해요. 잠이 확 깨거든요.”
커피에 관심을 보이는 귀족도 소수지만 몇 있긴 했다.
제국 전역에 커피를 전파하겠다는 야망은 천천히 실행되는 중이었다.
한껏 골든 페어리 이야기로 물이 올랐다. 신 메뉴를 소개하기엔 안성맞춤인 상황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알트페리아가 외쳤다.
“이 자리를 빌려 골든 페어리에서 새로 선보일 디저트를 소개하고 싶어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체 어떤 메뉴가 나올까요? 너무 설레요!”
반응 좋고.
짝짝―
알트페리아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발트레의 시녀들이 디저트를 조심스레 서빙하기 시작했다.
테이블마다 섬세하게 조각된 그릇이 놓였다.
삶은 달걀을 올릴 때 사용하는 작은 그릇 위에는 갈색의 동그란 물건이 올라가 있었다.
“삶은 달걀인가요?”
“색을 보아하니 초콜릿 같은데요.”
오, 정답!
이번에 준비한 디저트는 달걀 모양을 한 초콜릿이었다.
디저트는 우선 겉보기가 화려해야 한다.
하지만 골든 페어리의 신 메뉴의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골든 페어리의 이름이 없었더라면 실망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이미 골든 페어리의 음식을 맛본 사람들이라 여전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알트페리아가 크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번에 준비한 음식들은 함께 온 어린 손님들을 위한 디저트예요.”
그 말에 부모의 손에 잡혀 있던 아이들이 반응했다.
“저희요?”
“네, 직접 참여해 주셔야 해요! 우선 놓인 숟가락을 들어야 해요. 준비되었나요?”
파티의 주력은 어른들이다.
아이는 그저 조용히 서 있으라는 지시만 받았는데 무언갈 해도 된다니.
“준비됐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파티의 주인공이 된 느낌에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곧 초콜릿의 비밀을 밝혔다.
“숟가락으로 톡톡 치면 반으로 쪼개질 거예요!”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숟가락으로 톡톡 쳤고, 몇몇 달걀이 금이 가며 쪼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이 약한 어린이들은 생각처럼 되지 않아 고개만 갸웃거렸다.
“우움, 잘 안 돼요. 손으로 하고 싶어요!”
수저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손으로 잡고 휘두르고 싶어 하는 아이도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만든 투명컵 아티팩트로 포장을 한 초콜릿이라 손에 묻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허락이 떨어지자 몇몇은 손으로 집중해서 초콜릿을 개봉했다.
저 달걀은 절반은 초콜릿, 남은 절반은 투명컵 마법으로 초콜릿처럼 보이게 한 뚜껑이었다.
그리고 그 뚜껑 안에는.
“와아―! 장난감이 들어 있어요!”
다양한 미니어처가 들어 있었다.
미니어처들은 르블레아 전역에 퍼져 있는 동화 속 영웅이나 요정들이었다.
한창 이야기를 접하는 시기의 아이들은 자신이 뽑은 장난감 주인공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읽어주신 동화 속 요정이에요!”
“어머, 그러네.”
“착한 일을 하면 밤에 몰래 찾아와 선물을 놓고 간다던 그 요정이죠?”
“맞아. 앞으로도 좋은 일을 하라고 하나 보다.”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던 알트페리아도 덩달아 흐뭇해졌다.
그리고 조금 조바심이 났다. 그녀가 준비한 장치는 알 속에 숨겨진 장난감 하나뿐이 아니기에.
머지않아 다른 것을 발견한 아이가 그것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여기 뭐가 더 들어 있어!”
아이가 발견한 건 장난감과 함께 들어간 작은 종이였다.
종이에는 초코알 속에 숨겨진 장난감의 종류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전부 다 모으려면 여러 개를 사야 한다는 것.
의도를 알아챈 아이들의 눈이 보물찾기에 나서는 사냥꾼처럼 번득였다.
‘후후, 과금 가챠의 맛을 봐라.’
제아무리 귀족가의 자제들이라 해도 다 모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버지, 저 이걸 다 가지고 싶어요!”
“우리 딸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상자째로 사고 싶은데.”
벌써 몇몇은 아예 상자째로 구매하겠다고 나섰다.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곧바로 주문표 작성을 도왔다.
알트페리아가 불타는 반응을 즐기고 있을 무렵 웅성거리며 장내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응? 누군가 더 올 사람이 있는 건가?’
이미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참석한 참이었다.
추가로 더 올 사람이 없기에 의아해 하며 입구 쪽을 바라보던 알트페리아는 멈칫했다.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저벅저벅.
절도 있는 걸음으로 흐트러짐 없이 알트페리아에게 다가온 사람은 마탑에 있어야 할 루크였다.
알트페리아는 눈을 깜빡깜빡했다.
그는 크레치만의 봉인이 풀릴 것을 대비하여 마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복장도 발트레의 기사들이 입는 전투복 차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트페리아의 드레스에 맞춘 정복을 입고 있었다.
멀끔한 정복 차림의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늦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부인.”
알트페리아는 루크를 빤히 바라봤다.
‘새 옷을 입은 모습, 보고 싶긴 했는데.’
잘록한 허리가 잘 드러나는 검은색의 정장에 짙은 푸른색 크라바트 차림의 그는 상상 이상으로 근사했다.
루크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알트페리아가 답했다.
“오늘은 에스코트가 필요 없어요. 발트레 소공작으로서 파티에 참석했거든요.”
“그렇다면 저를 이끌어주시겠습니까? 부인.”
“기꺼이.”
알트페리아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가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목소리로 속삭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홀로 두고 싶진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는 이때껏 약속 시간보다 훨씬 더 일찍 나타났었다.
“늦지 않았어요. 이번엔 만나기로 약속하지 않았으니까요.”
애초에 시간을 정하지 않았잖아.
뜻을 알아챈 그가 웃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다니 다행입니다.”
눈웃음을 짓던 그가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알트페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이제 연기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주변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입을 가렸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사이가 좋으시다던데, 소문 이상이네요.”
알트페리아는 루크를 이끌어 제 곁에 앉혔다. 왠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만큼 기쁨도 컸다. 그녀가 속삭였다.
“제 드레스 색상은 어떻게 아신 거예요?”
그녀가 입기로 한 드레스는 보라색이었다.
그러다가 아침에 푸른색으로 바꾸었는데.
“리아가 좋아하는 색이니까요. 푸른색은.”
언제 한번 그와 함께 옷가게에 갔었다.
그때 이야기했었다. 자신은 푸른 원색을 좋아한다고.
스쳐 지나갈 정도의 가벼운 대화였지만 루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알트페리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휘었다.
‘기뻐.’
사소한 이야기를 기억해 줘서.
작은 것까지 기억할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다른 궁금한 점도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오신 거예요? 거리가 멀잖아요.”
동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제도와 가깝긴 하다지만, 그래도 하루 만에 올 거리는 아니었다.
“마탑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도 근처까지 워프시켜 주더군요.”
“사이몬 공작님이 도와주신 거군요! 루크에게 미안해졌나 봐요.”
크레치만은 동부에서 온전히 처리하기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루크가 크레치만을 처리해도, 동부의 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루크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도움을 준 모양이었다.
루크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흐음, 글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