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평소보다 늦잠을 잔 알트페리아는 시스템을 이용해 가게 현황을 살펴봤다.
‘반응이 좋네.’
후원 파티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새로 선보인 달걀초콜릿은 상자째로 잔뜩 팔았다. 주문량을 보아하니 저택에 돌아간 귀족들이 너도나도 주문한 모양이었다.
순조롭게 불어나는 보유 재산을 확인한 알트페리아는 시스템창을 모두 껐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루크는 마탑으로 돌아갔나?’
오랜만에 제도로 돌아온 루크는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밤늦게 침실에 돌아왔었다. 한창 자고 있던 알트페리아는 인기척에 부스스 일어나 그의 얼굴만 확인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한 침대에 누운 기억은 있는데, 일어나니까 루크가 없어졌다.
마탑 쪽도 크레치만 때문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 돌아간 모양이었다.
‘말은 해주고 가지.’
바쁜 건 알지만 말없이 훌쩍 떠난 루크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기껏 달걀초콜릿을 잔뜩 팔아 좋아진 기분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똑똑.
누군가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시간을 보아하니 시녀들이 간단한 아침 식사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들어와.”
그런데 열린 문 앞에는 시녀가 아니라 루크가 서 있었다.
아직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은 거였다.
반가운 한편 조금 전까지 토라져서 그런가. 뾰로통해진 알트페리아는 자신의 귀에 있는 아티팩트를 톡톡 쳤다.
“……아티팩트로 한마디 하려던 참이었어요. 떠난다는 말도 없이 마탑에 가버린 줄 알았거든요.”
가까이 다가온 그가 들고 있던 은쟁반을 근처에 놓고선 답했다.
“혹시 일어나자마자 저를 찾으신 겁니까?”
알트페리아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났잖아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대화는 아티팩트로도 충분히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읽은 루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제도에 온 김에 며칠 더 머무를까 합니다.”
그가 좀 더 남아 있겠다고 하니까 기쁘긴 한데.
“마탑에 당장 돌아가지 않아도 되나요?”
원작대로라면 크레치만의 봉인은 벌써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알트페리아의 개입으로 미래가 바뀌어 마탑주가 직접 봉인을 맡았고, 크레치만의 등장이 원작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탑주가 봉인을 살펴보고 있다 해도 임시방편일 뿐이라 루크도 근처에서 대기해야 할 것이다.
“봉인 수식을 살펴봤는데 일주일 정도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저택에 머물다 돌아갈까 싶습니다.”
루크와 며칠 더 있을 수 있다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잘되었네요. 요즘 저 혼자 거리를 다녔거든요. 남편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냐는 말을 들을까 봐 걱정이었어요.”
본디 그들의 계약은 사이좋은 부부임을 과시하여, 황제가 루크에게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
각자 일이 바쁘다 보니 데이트를 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루크가 입을 열었다.
“함께 외출하시겠습니까?”
알트페리아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로저필드 백작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그의 죄는 소공작 납치 및 암살 미수.
대영주 중 하나인 발트레의 후계자를 공격한 죄는 상당히 무겁다.
증인이 많아 신병을 황실에 바로 인도했으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 결과가 나올 것이다.
‘황제 폐하, 잘 알고 있죠?’
우리는 한패라는 거.
알트페리아의 계승식은 황제가 직접 맡기로 했다.
황실이 굳건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용당해 주는 만큼, 황제도 알트페리아에게 협력해야 할 것이다.
황제가 판결을 내릴 때까지는 얌전히 저택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다만 걸리는 점은, 로저필드 백작이 그랑힐데 공작 부인인 힐다의 혈육이라는 것이다.
‘하긴, 빠져나갈 구멍은 없지.’
힐다가 나서서 항변해 봤자, 백작의 처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알트페리아는 크리스털 크라운의 위생 상태를 일부러 폭로했다.
로저필드 백작을 공격할 아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난밤, 황실 기사들이 골든 페어리와 크리스털 크라운의 위생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크리스털 크라운의 주방 곳곳에는 쥐들이 잔뜩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곰팡이가 핀 과일이 무더기로 발견되었습니다.”
“제국민의 건강을 염려하신 폐하께선 이 사실을 바로 공표하라 명하셨습니다.”
“반면 골든 페어리는 주방은 물론 식자재 창고까지 흠잡을 곳 없이 깨끗했습니다. 앞으로 골든 페어리를 자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황실 기사에게 전달받은 바로 크리스털 크라운은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다.
아마 지금쯤이면 제도에도 소문이 돌아 로저필드 백작 가문으로 피해 보상을 해달란 서류가 잔뜩 도착했을 것이다.
수많은 가문과 합의하다 보면 로저필드 백작 가문은 파산할 것이다.
로저필드 백작 가문의 권력은 돈에서 나왔다.
힐다 또한 밑천이 드러난 가문을 끝까지 지지할 순 없을 것이다.
“괜찮은 제안이지만 외출은 다음에 하고, 한동안은 저택에서 지내요. 로저필드 백작의 형이 정해질 때까지만요.”
“그렇다면 점심도 준비해야겠군요.”
“점심도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알트페리아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루크가 챙겨 온 은쟁반을 근처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주무시고 계실 동안 식사를 만들었습니다.”
“루크가 직접요?”
“예.”
알트페리아는 그가 요리를 잘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소공작의 남편이 주방에 들어갔으니 퍽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시녀들이 많이 놀랐겠네요.”
그가 픽 웃었다.
“놀란 것보다는 경계를 심하게 했습니다. 제 행동 하나하나를 다 주시하더군요.”
직접 보지 않았지만,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자신이 먹을 음식에 혹여 루크가 허튼짓이라도 할까 봐 눈을 부라리며 감시한 모양이었다.
잔뜩 경계하는 시녀들의 사이에 멀뚱히 서서 요리를 만들었을 루크를 떠올리니 입 안이 썼다.
“이해해 주세요. 아직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루크를 경계하는 거예요.”
“저는 오히려 좋았습니다. 확실하게 리아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더군요.”
루크는 시녀들의 눈초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본인이 괜찮다면 다행이긴 한데.
“하지만 점심은 시녀에게 맡겨요.”
그의 시선이 알트페리아를 향했다. 그녀가 빙긋 웃었다.
“아까 말했잖아요. 할 이야기가 많았다고요.”
“리아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보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함께 있고 싶다는 말뜻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알트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만든 음식을 살펴봤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이잖아!’
루크가 만든 요리는 고기를 곱게 다져 뭉친 후 납작하게 구운 것이었다.
숯불향이 그윽하게 풍기는 것이 식욕이 절로 당겼다.
‘르블레아에서는 이렇게 조리한 걸 처음 봐.’
귀족의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들은 멀쩡한 고기를 잘게 다져 양념을 한 다음 다시 뭉친다는 발상을 하지 못한다.
질 좋은 고기를 통째로 구워내는 스테이크야말로 완벽한 조리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알트페리아는 다진 고기 요리를 나이프로 잘게 썰어 한 입에 쏙 넣었다.
‘음, 이 맛은?’
그냥 평범한 고기 패티가 아니었다.
‘떡갈비잖아!’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웠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소고기 본연의 진한 향과 짭짤한 소스가 적절하게 잘 어우러진 떡갈비는 베어 물 때마다 육즙이 퍼져 나왔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 기분이 좋아진 알트페리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풍부한 감정이 느껴지는 그녀를 바라보는 루크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알트페리아는 오물오물하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맞은편에 앉은 루크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리아는 간밤에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먹고 힘내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대접은 루크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마탑주의 도움으로 이동했다지만, 동부에서 제도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저는 이미 충분히 대접받고 있습니다.”
따로 뭔갈 챙겨준 기억은 없는데.
생각에 빠진 알트페리아는 눈동자를 굴렸고, 루크가 답했다.
“제가 요리한 음식을 맛있게 드셔주니, 기분이 절로 좋아집니다.”
그렇게 말한 그가 웃었다.
자신의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듯 아주 밝고 환하게.
행복해 하는 그의 웃음을 바라보던 알트페리아는 문득 원작을 떠올렸다.
원작 속 루크는 행복해지고 싶다며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의 미래는 고난과 역경뿐이었으니까.
‘나와 함께하면 루크가 행복해질까?’
적어도 지금 그의 표정을 보면 그런 것 같았다.
알트페리아는 가슴 안쪽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루크에게 받기만 한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서로를 보듬어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계속 그가 행복해 하면 알트페리아 또한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