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리안 라프란체.
따뜻한 다갈색 눈동자와 다갈색 머리 색을 가진 다정한 성품의 아가씨는 다정하지만은 못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또래 영애 영식들에게 많이 무시당했지.’
집안이 궁핍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작중에 서술된 라프란체 자작 부부는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현실 감각도 제법 있어서, 사용인들을 대거 감축했다.
다만 단 한 가지. 수도의 저택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만 제외하고.
‘과시욕 때문은 아니었어.’
정략혼이 팽배한 귀족 사회에서 자작 부부는 드물게도 연애결혼을 했다.
그들의 추억이 서린 저택이었다. 저택을 팔고 더 작은 주택으로 이사할 생각을 하다 끝내 눈물 흘리며 포기했다고 한다. 황성의 사무관인 자작의 월급을 더 아끼며 살아 보자고.
‘그런데 저택 유지비가 워낙 막대해서.’
라프란체 자작가는 거대한 영지나 상업적인 감각이 없는 가주들로 이어진 귀족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서서히 몰락한 가문이었다.
때문에 수도 저택은 컸다. 아무리 아끼고 아껴도 저택 유지비로 빠져나가는 돈이 상당하니 어쩔 도리가 없는 거였다.
원작 시작 직전 혹은 직후일 지금은 자작가의 사정이 상당히 나쁠 것이다.
대공과의 계약 약혼을 이리안이 받아들인 건 그들 사이 오간 거래금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원작대로라면 한 달쯤 후에 받을 거래금을 지금의 이리안은 저 때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내가 문제다…….’
나 때문이니 내가 수습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이리안의 재능을 후원하자!
이유 없는 금전적인 지원은 이리안이 동정으로 여겨 거절할 수도 있지만 후원은 다른 영역이다.
그러니 이리안에게 이른 시일 내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방식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
원래 나는 익명으로 후원할 생각이었다.
‘이리안 라프란체가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 자체는 떠돌아다니고 있거든.’
이리안의 배경이 한미한 탓에 소소한 가십이기는 해도 분명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이리안이 또래들에게 조롱당할 때 주로 듣는 레퍼토리인 탓이다.
‘우연히 소문을 듣고 흥미가 생겨 그림을 찾아봤더니 마음에 들었다며 익명으로 후원 의사를 밝힐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는 하나, 익명을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 주인공인 칼릭스와 엮이게 될 이리안에게 내가 먼저 접근했다가는 여전히 질척거린다는 소리 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읽어 본 책 속에서 환생해 미래를 안다는 사실은 나만 알고 있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저 주장이 공녀가 예언자라는 거나 다름없는 개소리일 테지만, 내 평판은 저것마저 그럴듯하게 들리는 불세출의 바닥이다…….
‘나, 어떻게 살았던 거냐.’
숙연해진 것도 잠깐.
‘근데 이리안 생각보다 무시 엄청 당했네.’
뒷배 없는 어린 영애라서 더 그랬나 보다.
그럼 후원자가 생겨도 익명이면 이런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방금 전 수모는 안 당해도 됐는데.’
계약금 받는 게 한 달 이후일 뿐이지, 이리안은 본래 지금 대공저에서 몸만큼은 안락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할 예정이었다.
여러 번 당한 무시이니 거기에 한 번 더 더해졌다고 해도 그게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다.
원작을 망친 내가 힘들면 힘들어야지 이리안은 대체 무슨 잘못이라고.
“저어, 아가씨? 은행을 가지 않으십니까?”
“……으응.”
나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흐느적흐느적 걸어가 도착했을 때에도 이리안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였다.
그림이든 그녀의 심경이든 무언가를 추스르고 있을 것이었다.
눈치 없는 엑스트라1이 된 기분이지만 그렇다고 기다렸다가 말을 붙이면 그게 더 이상했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알아챘는지 이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훌륭한 솜씨 같은데, 당신이 그린 거야?”
……이건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내 뒤에는 공작가의 기사가 있고,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공대를 한다면 기겁하고 말 거다.
그럼 공작에게 당연히 보고할 테고, 보고를 들은 공작은 놀라 기겁해 나를 찾아오겠지.
저 일련의 상황을 이리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겪어 봤기 때문이다.
[샤르을―!]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작의 울먹울먹한 눈은 또 보고 싶지 않았다.
“네.”
그때, 짤막하게 대꾸한 이리안이 다시 그림을 정돈하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나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뒤에서 “아가씨!” 하고 실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흘려 넘겼다.
“흠, 더 자세히 봐도 될까?”
눈을 한번 데구루루 굴린 이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요모조모 유심히 봤다.
지금도 돈이 많은 공작은 내가 어렸을 때도 돈이 많았다. 덕택에 어린 시절부터 미감을 배워 나름대로 조예가 몸에 콕 박혀 있었다.
매끄럽지 않고 투박한 면면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매력적인 화풍이었다.
“잘 그렸네.”
여주에게 잘 보이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당신 화가인가 보군.”
“…….”
“이 그림 나한테 팔 생각 없어?”
이리안이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봤다. 하긴, 이런 말을 길바닥에서 하면 이상해 보이기는 하겠다.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마침 저기 커피 하우스가 있는데 조금 더 길게 대화해 보는 건 어때.”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어째서?”
“동정 아닌가요?”
이 순간, 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래서 사샤의 사랑스러움이 필요했던 건가?
작가가 만든 캐릭터이니 선후 관계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안은 그녀를 졸졸 따르는 사샤가 없었더라면 대공의 계약 약혼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았다.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심이 대단했다.
‘사샤 생각하니 보고 싶네. 잘 지내려나?’
대공가에서 무도회를 열면 뭐 하나. 나는 거기 갈 수 없는데.
‘내가 가면 난리 나겠지. 입장 못 하는 건 예삿일이고 분위기만 망칠 수도.’
조금 아쉬웠지만, 대공을 찾아가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사샤가 처음으로 귀족들에게 소개되는 자리를 망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동정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동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내 추천으로 이리안의 작품을 보고 감명받은 익명의 후원자가 후원을 희망한다는 1안은 아무래도 실패할 것 같았다.
지금처럼 경계 가득한 눈을 한 이리안이 거절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어쩔 수 없다.’
“샤를리즈 리엔타, 들어 봤어? 들어 봤나 보네. 그거 나야.”
이리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보아하니 이름만 아니라 소문도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금세 수긍했다. 한 세트니 하나만 듣는 것도 신기할 일이다.
“내가 동정으로 누굴 도울 사람 같아?”
“…….”
“…….”
이리안이 침묵했다.
저런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기는 했지만, 정말 침묵이 돌아오니 어쩐지 숙연해진 나도 침묵했다.
어색한 적막이 잠시 흘렀다.
“……그래, 그럼 이제 커피 하우스 갈 생각이 드나?”
그림을 꾹 쥔 이리안이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창문은 약간의 바깥바람도 허용하지 않을 기세로 꼭꼭 걸어 잠근 채였다.
그 주변에 놓인 짙은 고동색의 원목 흔들 목마는 작은 주인이 혼자서도 가뿐히 올라탈 수 있는 높이였다.
거기서 성인의 걸음으로 열 걸음쯤 옮기면 침대가 있다.
저택의 화려함과는 달리 아늑하게 꾸며져 금세라도 단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푹신한 침대에 누운 아이는 침구를 목까지 폭 덮어 자그마한 얼굴만 쏙 드러내고 있었다.
홀쭉 패인 뺨이 희게 빛났지만, 아직도 그 나이대 아이의 통통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침대 근처 의자에 앉은 남자는 누가 봐도 귀족이 아닌 순간이 없었을 것 같은 고결한 외양이었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괴고 있는 자세도 그저 여유롭게만 느껴졌다.
미성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정말로 괜찮아요.”
사샤가 고개를 열렬히 저었다.
“동화책을 읽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잘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건?”
“그, 그건…….”
“그것도 안 되니?”
잘생긴 얼굴에 처연한 빛이 덧그려졌다. 사샤는 서둘러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는 좋아요! 그저, 숙…….”
칼릭스의 눈치를 슬쩍 살핀 사샤가 입술을 말아 먹었다.
“숙부님께서 피곤하실까 봐…….”
“피곤하지 않아.”
“네에, 감사합니다.”
작게 대답한 사샤가 눈을 꾹 감았다. 그러다가 슬며시 한쪽 눈을 빼꼼 열었다.
창문가를 흘깃 바라보는 칼릭스의 옆얼굴이 달빛에 감싸여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예쁘다…….’
유려한 곡선과 직선의 적절한 분배로 이루어진 얼굴은 사샤가 여태까지 본 그 어떤 남자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얼굴에, 푸른 시선이 아래로 푹 떨어졌다.
[잘 지내야 해. 행복하게. 밥도 냠냠 맛있게 많이 먹고. 알았지?]
‘네, 샤를 님.’
생생하게 들려오는 말소리에 사샤는 속으로 대답했다.
[사샤. 네 이름이다.]
처음으로 알게 된 제 이름은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샤를과 한 글자 겹치는 이름. 너무 마음에 들어 순간 저도 모르게 발을 굴렀을 정도였다.
‘잘 지내실까?’
보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저를 위한 장난감들이 가득한 방이 침실 양옆에 있어요. 제 부모님의 초상화를 봤어요. 이 저택의 사람들은 제게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그런 말을 하면 샤를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행이다.” 하고 가볍게 웃을 것 같았다.
놀라지 않도록 느리게 손을 뻗어 슥슥 머리를 만져 줄지도 몰랐다.
헤어지기 전날 샤를이 정원에서 보여 준 다정한 미소를 사샤는 하루에 딱 한 번, 자기 전에만 조심히 떠올려 보고는 했다.
소리 없이 가만히 웃은 사샤가 눈을 다시 감았다. 벌써 시간이 깊어 어린 몸은 금세 수마에 잠겼다.
곤한 숨소리가 들리자, 칼릭스는 시선을 내려 제 어린 조카를 바라봤다.
[밥도 잘 드시고, 잘 웃으시는데 어딘가 울적해 보이십니다.]
리반이 저가 더 울적한 얼굴로 보고한 내용이었다.
“잘 먹고, 잘 웃고, 잘 자는데.”
칼릭스가 사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또 우네.”
감긴 눈꼬리 끝에서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걸 손끝으로 닦아 주는데, 아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를…….”
칼릭스가 상체를 천천히 숙였다. 아이가 다시 중얼거렸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분명한 발음이었다.
“샤를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