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샤를.”
“그 이름은 갑자기 왜 부르십니까?”
못마땅함이 서려 있는 음성은 주군을 향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칼릭스가 입술로만 웃었다.
제법 오랜 세월 곁을 지켜 주군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는 리반은 조금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어 말했다.
“샤를리즈 리엔타. 리엔타 공작가의 그 망나니가 또 무슨 일을 했습니까?”
“음.”
“……공녀가 아닙니까?”
톡톡. 가볍게 책상을 두드린 손끝이 그만큼이나 가볍게 거둬졌다.
“사샤가 자면서 ‘샤를 님’이라고 부르던데.”
“사샤 님께서요?”
“울더군.”
“……당장 잡아내겠습니다.”
“리반, 진정해.”
웃음기 어린 어조로 칼릭스가 제 수하를 무성의하게 달랬다.
“그런 울음이 아니었어. 오히려…….”
살며시 눈매까지 구겨 가며 감정을 되짚어 보던 수려한 낯이 슬쩍 기울어졌다.
“그리워하는 것 같았거든.”
“그리워하신다고요…….”
곰곰이 무언가를 곱씹던 리반은 곧 입을 뗐다. 처음부터 갖고 있던 의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사샤 님께서 길에서 생활하셨다고 하기에는 저택을 찾아오셨을 때 깨끗하셨지요.”
삐죽빼죽 엉망으로 잘린 머리카락이 다소 길게 자라 있기는 했지만 청결했다.
사샤 자체도 그랬다. 해져 있는 낡은 옷과 마른 몸, 무릎에 희미한 멍 자국은 고단한 생활을 알렸지만 말이다.
“사샤 님께 여쭤볼까요?”
여전히 턱을 괸 채로 목을 울린 칼릭스가 긴 눈매를 접어 웃었다.
“사샤가 여태까지 먼저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섬세하게 알아봐.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아이야.”
“알겠습니다.”
뒷조사도 불사할 기세로, 리반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원래 이야기를 해 볼까.”
미려한 얼굴에 지루함이 선연히 드리웠다.
제 주군을 흘겨본 불경함도 잠깐. 보고를 시작한 리반은 대공의 수석 보좌관다운 진지한 얼굴로 순식간에 변모했다.
“황후도 이번에는 진짜라는 생각을 한 눈치입니다.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없으니 마도구를 내주기는 했지만, 뭔 일을 벌일 기세였다고 하더군요.”
리반이 덧붙였다.
“제이가 봤습니다.”
“제이의 눈썰미라면 맞겠네.”
“어떡할까요? 공표를 늦출까요?”
눈을 내리뜬 칼릭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후의 획책과 실행을 염려하여 공표 시기를 조정할 필요성은 애초에 느끼지도 못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긴 속눈썹이 눈자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일주일. 그 안에 샤를이라는 사람을 찾으면 이튿날 바로 공표하고, 못 찾으면 일주일이 되는 날에 하는 게 좋겠어.”
대공 직속의 기사단 검은밤은 소수 정예로 그 실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색에는 평범한 모양이다. 뼈아픈 실책 직후이니 눈에 불을 켜고 ‘샤를’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 직후이니 이번에도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단서라고는 고작해야 샤를이라는 이름 하나뿐.
사샤 때보다 어려우면 어렵지, 수월하지는 않을 터였다.
리반도 그 뜻을 짐작하고 수긍했다.
* * *
“그러니까, 그게 정말이라고?”
훈련과 훈련 사이에 있는 짧은 휴식 시간.
한 기사를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집단적인 괴롭힘을 의심할 법한 모양새였지만, 그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
“진짜라니까? 샤를리즈 아가씨가 정말로 그러셨다고!”
어제 샤를리즈를 호위한 기사를 빙 둘러싼 기사들은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에이, 말도 안 돼.”
“지금 정말이라는 말을 몇 번을 하고 있냐, 내가!”
“그래, 말도 안 돼! 아가씨께서 그러셨다고? 무명 화가의 그림 구매하신 것까지는 믿을 수 있다. 아가씨께서 변덕 부리시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제는 분홍색 장미가 좋다고 해서 모종을 가져와 열심히 심었는데, 그 당일 늦은 오후 붉은 장미로 싹 바꾸라는 말에 정원사가 눈물을 머금고 초과 노동을 한 건 예삿일이었다.
“아가씨께서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건 대공……. 헙.”
주위를 급하게 살핀 붉은 머리 기사가 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래, 더 때려, 더!”
주변에서도 붉은 머리 기사의 손을 응원했다. 제 입임에도 가차 없는 손길에 입술이 퉁퉁 부을 무렵, 다른 기사가 본래 대화로 궤도를 틀었다.
“에반스, 다시 말해 봐. 정말이라고?”
“아, 정말이라고! 거리의 아이들을 앵벌이 시키는 놈도 손보셨다니까?”
“아가씨께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지?”
“그냥 지나가다가 거슬려서 그러신 거 아니야?”
“아, 그게 맞네, 그게 맞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에반스가 억울한 어조로 꿍얼거렸지만, 주변 기사들은 이미 그렇게 생각이 굳은 후였다.
“아가씨께서 정말로 달라지셨다니까? 내가 마차에서 내리는 거 도와 드리니까 고맙다고도 하셨다.”
그 순간, 시끌벅적하던 주변이 싸하게 식었다.
“……야, 가자. 에반스 쟤 말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네.”
“그러게, 쟤 꿈꿨나 봐. 해가 중천이야,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어깨를 툭툭 치며 기사들이 다시 연병장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에반스는 애꿎은 가슴을 쾅쾅 쳤다.
[아가씨, 일단 처리는 했습니다만…….]
어제 늦은 오후, 에반스는 ‘그래 봤자 다른 날건달들이 같은 짓을 할 겁니다.’라는 말을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뒷말을 흐린 의도는 꽤나 명백했지만 샤를리즈는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윽고 샤를리즈가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드레스 밑단이 해지는 것쯤은 원래도 신경 쓰지 않으셨다지만, 깨끗하지 못한 길을 가는 건 처음이셨다.
기사단에서 제일 멀끔하다는 이유로 샤를리즈의 호위를 억지로 많이 떠맡은 에반스는 내심 의아했다.
[야.]
건달을 발로 툭 친 샤를리즈가 상대방이 “으으.” 하면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이런 짓 또 하면 또 이렇게 될 줄 알아라? 이번처럼 아이 때리려고 하고 있으면 너 또 맞는다? 다른 애들이 괴롭혀도 네가 맞는다. 알아들었어?]
말투 자체는 평이했으나, 내용은 협박을 많이 해 본 사람의 것이었다.
하지만 에반스는 전혀 의아하지 않았다. 샤를리즈 아가씨니까. 다른 데서 많이 해 보셨겠지!
“야, 에반스! 땡땡이치지 말고 어서 대련하러 와!”
“아, 알았어.”
강제로 상념에서 건져진 에반스가 크게 대꾸했다.
아니, 진짜 맞는데. 진짜 맞다고. 억울한 에반스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날씨 좋다.”
매일매일 외출을 하기엔 샤를리즈가 원체 허약한 아가씨라는 사실은 지난 경험으로 익히 깨달은 바다.
어차피 저택 외부를 갈 일이 없어 딱히 체력을 기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건만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이리안 그림도 샀고, 칭찬도 마구 했고.”
[……정말로 제가 그림을 잘 그리나요?]
그건 전혀 겸양이 아니었다.
이리안은 스스로의 실력을 낮잡아 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썹을 슬쩍 올리며 되물었다.
[그럼 내가 다른 사람 기분 좋아지라고 이런 말 할 것 같아?]
[……아니요.]
조금 씁쓸했으나 효과는 좋았다. 이리안은 끝까지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지만.
‘헤어지기 전에 내가 든 그림 보고 이리안이 희미하게 웃는 거 봤다고.’
히죽 웃은 나는 허리에 끼워 넣은 쿠션에 깊이 등을 기댔다.
“어이구.”
창가까지 질질 끌고 온 의자에 슬쩍 올려 둔 접시가 영 아슬아슬하더라니 중심을 잃고 휘청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직전에 낚아채 접시를 아예 배 위에 올려 두고 나는 게으른 자세로 심드렁히 생각했다.
‘선황자 찾았다고 공표하기 전까지는 공작저에 콕 박혀 있는 게 낫겠지.’
어차피 공표 금방 할 테니까. 집에 콕 박혀 있는 게 좋기도 하고.
과일을 하나 집어 먹다 문득 의아해졌다.
“오늘이…… 사흘 차인데.”
사샤가 대공저에 도착한 지 말이다.
‘그런데 왜 공표가 아직이지?’
사흘이 아니라 나흘이었나?
그러나 나흘 차에도 여전히 조용했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 공작이 슬쩍 말했다.
“그 아이가 선황자 전하가 아니었나 보다, 샤를.”
“조용하죠……?”
“그럼 대공저에서 쫓겨났을까?”
안도한 기색도 잠시였다. 마음씨 좋은 공작은 불편한 얼굴을 했다.
“얌전하고 착한 아이 같던데 말이다.”
“그랬죠.”
어라, 이상하다…….
‘아!’
사샤를 찾은 기간이 작중과 달라서인가? 이 시기에 황후와 대공의 사이가 가장 극악이라 대공이 사샤를 지키기 위해 숨겼을 수도 있겠다.
사샤 자체가 세력 구도와 밀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그럴듯한 가정이기는 했지만 묘하게 찜찜했다.
‘그런데 대공이 황후 눈치 볼 리가 없는데…….’
저녁 식사를 대충 마치자마자 나는 후식도 거르고 곧바로 침실에 돌아와 다시 다이어리를 펼쳤다.
‘검은 머리, 푸른 눈, 오른볼의 점.’
쏙 빼닮았는데 아니라고? 혹시나 싶어 사샤를 씻겼던 시종들에게 아이의 성별이 남자가 맞는지도 확인했는데 맞는다고 했다.
“설마 대공 그놈이 자기 조카 못 알아본 거야……?”
아니! 무슨!
대령해 줘도 못 알아보냐고!
“아니면, 혹시 설마 아주 몹시 매우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진짜 아닌가……?”
정말로 그 순한 아이가 꼬마 선황자가 아니라서 대공저에서 내쫓겼다면 데려올 작정을 진심으로 한, 그 이튿날.
웬 초대장 한 장이 내게 도착했다.
그리고…….
“허, 허억!”
“가주님―!”
……공작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