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뭐지……!’
잘한 것도 없는데 보너스를 받았다.
[오늘 사샤까지 만나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테니…… 조만간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고 싶은데 괜찮겠나?]
미래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도!
그래서 나는 살짝은 마음을 놓고 원작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거리의 고아에서 선황자로 일약 신분 상승한 사샤를 시기하고 못 마땅히 여기는 또래는 많았다.
웃긴 일이다. 본래라면 감히 허락 없이 쳐다보지도 못할 존재.
당연히 제 자리를 찾아간 것인데, 저런 생각을 하게 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러는 꼬맹이들 역시 능력으로 거머쥔 게 아니라 운 좋게 탯줄 잘 선택해 태어나 얻은 신분이면서.
급기야 소년들은 사샤를 밀실에 가두기까지 했다.
‘그때 사샤를 지켜 준 게 이리안이 주었던 야광석이었지.’
당연히 저 자체를 막으면 다 좋을 테지만, 문제는 사샤가 저 과정으로 신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뭐 어떡해야 하냐.’
하지만 저런 기억 자체를 안 가지게 되도록 하는 건 나중에 부랴부랴 시도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펜던―, 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살심을 품은 기색은 아니라서 그냥 생각을 이어 가기로 했다.
‘―트를 사샤에게 주…….’
타다닷 하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질 때도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컥.”
그리고 무언가가 내 다리로 팍 날아왔다.
‘넘어질 뻔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완전히 뒤를 돌아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시선을 내리고, 거기서 더 내리니 그제야 눈에 띄었다.
이상하게도 오늘 내도록 불현듯 떠오르기 바빴던 새까만 정수리가 말이다.
* * *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림이 가득한 동화책을 열심히 보고 있던 사샤가 그 너머로 빼꼼 눈을 꺼냈다.
[사샤 님. 리반입니다.]
[들어오세요.]
책을 접으며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대견하다며 리반은 헤벌쭉 웃었고 사샤는 부끄러워 귀를 붉혔다.
키가 큰 리반이 무서웠던 건 처음 이틀뿐이었다.
작은 글씨가 빼곡한 종이를 읽는 대단한 사람. 그러나 말할 때는 쉬운 단어만 사용하는, 숙부님의 보좌관 리반 리히트.
사샤는 그 배려를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곧 사샤 님께서 돌아오신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이기로 했다고 저번에 말씀드렸지요?]
[네, 기억나요.]
그에 가장 먼저 생각난 얼굴은 당연히 샤를리즈였다.
‘샤를 님도 와 주실까?’
사샤가 동화책을 꾹 쥐며 배시시 웃자 리반도 같이 웃으며 무도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리반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하아……. 가주님께서는 왜 그 영애를…….]
사샤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리반의 혼잣말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사샤를 앞에 두고도 저들끼리 대화하는 사람들은 원래 많았다. 궁금해하면 혼나기만 할 뿐이었다.
몇 번 더 한숨을 내쉰 리반이 화들짝 놀라 죄송하다며 연거푸 사과하는 건, 그래서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여러 가지 중 하나였다.
[제국에는 공작 가문이 총 세 군데 있습니다. 바이에르, 리닉스, 리엔타입니다.]
리반의 눈은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 날카로웠지만, 아직 어린 사샤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물결치듯 흔들린 눈망울을 목격한 리반은 입맛이 썼다.
‘샤를리즈 리엔타가 맞기는 한가 본데…….’
그 영애가 사샤를 괜히 도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인상착의가 배포된 후이니 누구보다 재빨리 찾아내서 보냈을지도 모르지.
사샤가 ‘샤를 님’이라고 중얼거린 것마저 무의식중에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도록 훈련시킨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샤를리즈 리엔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중 리엔타 공녀에게도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만약 공녀가 참석한다면…… 일단은 아는 척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잘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주억이던 사샤는 그에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리반이 간절하게 눈썹 앞머리를 모았다.
[위험한 영애입니다. 아직 어린 사샤 님께 제대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무튼,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사샤는 저 냉철한 외양의 보좌관이 의외로 수더분한 성격이란 걸 알았다.
허리를 잡아 높게 높게 올려 주기도 했고, 마주칠 때마다 헤벌쭉 웃기도 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샤를리즈 님도 나쁜 분이 아니야.
그럼에도 사샤가 샤를리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시선을 피한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이 그림을 보고 찾아왔다고 해 줄 수 있겠니?]
아는 척하지 않기로 샤를 님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힐끔힐끔 자꾸 샤를리즈에게 가려는 시선을 애써 꾹 내리던 중이었다. 나긋하고 다정해서 좋아하게 된 목소리가 사샤를 불렀다.
“사샤,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니?”
“네? 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잘 조형된 조각상처럼 무표정했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몄다.
“그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겠어. 어떻게 네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긴 손가락이 사샤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눈을 깜빡이기를 몇 번. 사샤가 볼을 발긋하게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올게.”
“네.”
숙부님께서 어디를 가시나 살그머니 보던 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샤를 님?’
칼릭스와 대화를 나누던 샤를리즈의 얼굴이 무섭도록 무표정해졌다. 주변 귀족들은 겁에 질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 댔다.
그러나 사샤는 알았다.
‘샤를 님, 걱정하고 계셔.’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생기신 걸까.
애타는 눈으로 샤를을 보기를 얼마간. 아이는 “핫.” 하며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아는 척하면 안 돼.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네, 전하.”
사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엉거주춤 들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샤를리즈가 칼릭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테라스로 향한 후, 귀족들은 소리 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눈치를 필사적으로 키워야 하는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황족의 직감이라는 것인지. 사샤는 사람의 감정을 굉장히 기민하게 알아채는 재능이 있었다.
그중 가장 특화된 것은 단연 부정적인 종류의 감정 포착이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의 거의 모든 사람이 샤를리즈를 안 좋게 본다는 것을.
‘다정하신 분이니까 상처받으셨을 텐데.’
다시 푹 고개를 숙이며 사샤는 입술을 말아 먹었다.
“사샤 님, 드실 음료수를 새로 가져오겠습니다.”
“네? 아, 괜찮…….”
습관적으로 하려던 말을 사샤는 잘라먹었다.
[많이 혼잡하고,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때로는 혼자 계셔야 하실 수도 있지만, 위험한 일은 없으실 겁니다.]
“네에, 다녀오세요.”
리반이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제법 멀어진 리반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사샤 님?”
상냥한 말씨에 사샤는 주춤주춤 고개를 돌렸다. 과연 목소리만큼이나 상냥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보였다.
“사샤 님께서 조심하셔야 하는 인물이 있어,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샤를리즈에게 거하게 깨진 영식이었다. 영식은 겉으로는 걱정스럽다는 듯 눈매를 구기며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리엔타 공녀를 조심하십시오. 공녀는 십 년 가까이 대공 전하를 짝사랑해서 쫓아다니기로 이름 높았지요. 사샤 님께서도 곧 알게 되실 테지만 말입니다. 분명 사샤 님께도 접근할 테니까요. 그 영애는 정말 지위만 공녀지, 행실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두 손 가득 과일 주스를 들고 돌아선 리반이 서둘러 달려왔다. 사샤가 놀랄까 봐 소리를 낮췄을 뿐 눈동자에는 맹렬한 불길이 일렁였다.
“아, 아닙니다!”
영식이 부랴부랴 사라지고, 리반이 그가 무슨 말을 했냐며 애달프게 질문해도 사샤는 그저 아니라며 고개만 저었다.
저 영식의 말을 계속 곱씹어 보다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그런 깨달음은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 되었다.
“사샤, 리엔타 공녀가 네게 준 선물이다.”
크게 뜨인 투명한 벽안이 한차례 거세게 흔들렸다. 펜던트를 받아 드는 고사리손 역시 파르르 떨렸다.
“축하한다고 하더구나.”
말없이 펜던트를 움켜쥐고만 있던 사샤는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그랬다가는 고인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 것 같았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느꼈던 애틋한 온기를 기억했다.
눈물을 닦아 주던 메마른 손가락. 하지만 누구보다도 다정한 사람이 보고 싶었다.
‘고개 돌리지 말걸.’
그냥, 그냥 샤를 님이 고개 돌리시기 전까지 보고 있을걸 그랬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샤를 님은 무려 공작가의 영애님이셨다.
“공녀는 지금 회랑을 지나치고 있을 테지. 리반, 사샤를 안내해 줘.”
사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러운 만남은 후일 내가 공녀에게 사과할 테니.”
커다란 손이 물기를 걷어 갔다. 이제는 뚜렷해진 시야 너머로 보이는 남자는 상냥하게 웃고 있진 않았으나 충분히 그러했다.
“만나고 싶었잖아. 순서를 뺏어 미안했어, 사샤.”
“으응, 아니, 아니에요.”
고개를 허겁지겁 저은 사샤는 이윽고 작은 짐승처럼 목을 울렸다.
“사샤 님, 가시죠.”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아이는 리반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다.
* * *
자세히 보니 사샤였다.
얘가 왜 여기 있지?
의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나는 일단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가족을 찾으신 걸 축하드려요.”
“그, 그렇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드레스 자락을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흠…….’
주변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단 걸 확신하고 나는 다시 말을 꺼냈다.
“많은 사람 앞인데도 담담하던걸. 훌륭했어.”
여전히 내 드레스를 꼭 껴안고 얼굴을 파묻은 채로 사샤가 자그맣게 질문했다.
“정말요?”
“그럼.”
‘나, 신용을 못 주는 얼굴인가?’
이리안도 그렇고, 공작도 그렇고, 이제는 이 작은 꼬맹이까지.
혹시 이게 바로 악녀의 디폴트값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잘 지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