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네.”
겨우 그 정도밖에 발음할 수 없다는 것처럼 짧았다. 그러나 이윽고 다시 이어진 목소리에서는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제 침실이 커요. 흔들 목마도 있고, 밤마다 숙부님께서 동화책을 읽어 주세요. 그리고 양옆에 장난감으로 가득 찬 방이 있고요, 그리고 리반도 잘해 주시고, 그리고 음식도 맛있어요. 어제는 오리구이를 먹었는데요, 소스가 독특하고…….”
말끝이 점점 촉촉해졌다.
오리구이가 얼마나 맛있었길래 말하는 것만으로 입맛이 도는 거지.
마침 공작과 시녀장, 집사에게 보양식이 필요한 차였는데, 오리구이로 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메뉴 추천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나는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흐윽.”
그런데 저 말이 마치 도화선이라도 된 것처럼 사샤가 작은 몸을 들썩였다.
“사샤?”
“죄, 죄송해요.”
사샤가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헐떡였다. 나는 다급히 쪼그려 앉아 사샤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는 거니?”
아이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고 온기를 한참 나누고서야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를 짤막하게 흘렸다.
“……안 계시니까요.”
“응?”
“사를 님, 을 볼, 수 없어서…….”
나는 망연한 기분이 되어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작대로라면 이리안이 옆에 있으니 아이는 이렇게 우는 일 없었을 것이다.
성인 남성에 대한 공포가 영구적인 상흔으로 남게 되어 이리안 없이는 대공과 보좌관조차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원작의 모습과 현재.
사샤에게 어떤 게 더 나을 거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아이는 겪을 필요 없었다는 것이다.
“……미안해.”
“아니에요!”
사샤가 허겁지겁 외쳤다.
“제, 제가 그런 말 하시게 해서…….”
작은 몸을 끌어안고 만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한 번도 타인의 품에 안겨 본 적 없는 것처럼 뻣뻣하게 서 있던 아이가 와락 품에 안겨 들었다.
뒤로 넘어가지 않고 이 무게를 버틸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가시면 안 돼요? 계속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쏟아지는 말만큼 나를 붙잡은 손이 절박했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서, 엉엉 우는 아이의 등을 나는 그저 말없이 토닥였다.
그리고 작은 어깨 너머를 무심코 응시한 순간. 이쪽을 응시하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름 아닌 리반 리히트였다.
그는 아연한 얼굴로 사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굳혔다.
참고로 리반 리히트는 대공가의 사람들 중 나를 가장 싫어한다.
대공의 최측근이니만큼 샤를리즈의 행적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당장이라도 나를 경계하며 아이를 데려갈 줄 알았는데, 그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핫, 죄, 죄송해요. 샤를 님.”
겨우 진정한 사샤가 화들짝 내 품에서 빠져나오고 괜찮으냐며 허겁지겁 물어보고도 한동안.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것이다.
* * *
‘사샤 님…….’
리반은 복잡한 기분이 되어 방금 전 칼릭스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사샤가 앞서 달려간 후.
검은밤의 기사가 뒤따라간 것을 확인한 리반은 고민 끝에 돌아서 칼릭스에게 향했다.
[전하, 왜 공녀와 대화하도록 사샤 님을 보내셨는지 그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리반은 줄곧 회의적이었다.
선황자를 찾아 준 공녀의 행동이 완벽한 호의일 리는 없을 것이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전적인 보상으로 족하다.
아니, 그 이전에 양심이란 게 있다면 여태까지 귀찮게 굴어 죄송했다는 말로 보상을 사양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황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리엔타. 그 리엔타의 하나뿐인 후계자인데 부족할 게 뭐가 있겠냐는 말이다.
[원하는 걸 모두 주겠다고 했더니 공녀가 이런 말을 하더군.]
‘사실 저도 다른 귀족들처럼 이 무도회를 선황자 전하를 공표하는 자리로 짐작했습니다. 축하 선물로 드리고 싶어 준비한 것인데,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과연 뜻밖이기는 했지만, 리반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말은 누가 그렇게 못 하겠습니까?]
[음.]
칼릭스가 묘하게 웃었다.
[그보다 사샤에게 접근한 영식이 어떤 말을 했는지 확인하고, 허튼소리를 했다면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을 수 있도록 알려 줘.]
[예.]
리반은 칼릭스가 샤를리즈에 관해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서둘러 영식을 취조하고 사샤에게 향한 뒤 맞닥뜨린 상황이 이것이었다.
‘사샤 님께서는 정말로 공녀를 마음 깊이 따른 모양이지.’
어린아이는 순수한 만큼 타인을 잘 꿰뚫는다. 하물며 기본적인 보호도 없이 거리에서 자란 사샤는 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순하고 착한 것 같아도 경계심이 강해서 도통 곁을 내어 주지 않던 아이.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샤를리즈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일부러 샤를리즈를 먼저 만나 봤을 칼릭스가 허락한 만남.
리반은 그의 주군을 믿었다. 충심을 제외해도 엘루이든 대공의 판단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랬기에 샤를리즈 리엔타가 생각한 것만큼 아주 최악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잠시 생각했다.
* * *
늦은 저녁.
무도회는 목적을 마치고 일찍이 끝났다.
아쉬운 기색인 귀족들도 더러 보였지만, 선황자의 어린 나이로 말미암아 짐작한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연회는 부드럽게 마무리됐다.
저마다의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대공저는 안온한 침묵에 감싸였다.
평소보다 일찍 밤이 찾아온 사샤의 침실엔 나른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래서 아기 용사는 작달막한 검을 들고…….”
동화책을 읽어 주던 칼릭스는 문득 사샤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힘겹게 뜨고 있었다.
“내일도 읽어 줄 텐데?”
“숙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샤를 님께서 또 만나자고 하셨는데, 언제 오실 수 있는지 여쭙지 못했어요.”
“날이 밝으면 공녀에게 물어보마.”
“정말요?”
“그래, 정말.”
사샤가 수줍게 웃었다.
“기뻐요…….”
그러고는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었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지 않고 한동안 더 사샤의 곁을 지켰다.
서늘한 빛깔의 벽안은 아이가 답지 않은 고집까지 보이며 착용한 목걸이를 향했다.
아이의 살에 눌리지 않도록 침구 위로 걸쳐 두고도 그의 손은 여전히 펜던트에 닿아 있었다.
줄곧 생각하고 있던 부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살아났다.
[마법 처리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공 전하. 마탑의 마법사가 보증합니다.]
공녀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이전에도 악에 받친 표정 정도가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었으니 그런 기미가 사라진 지금은 그저 늘 무심한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를 슬쩍 곁눈질한다든지, 뭐가 필요하냐는 말에 혹한 눈치라든지.
분명 그가 필요해 보였다. 어떤 의미로든.
[원하는 것을 모두 주겠네.]
그래서 이 말에 지속적인 만남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꼭 그때 지었던 표정으로 칼릭스는 펜던트를 놓았다.
[사실은 공녀가 내게 필요한 게 있는 것 같았어.]
[안 된다고 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샤를 주기적으로 만나고 싶다며 그걸 빌미로 기회를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샤를리즈가 깨닫고 말할까 봐 그런 건 아니었다.
알면서도 애초에 염두에 둔 적도 없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녀가 콧잔등을 찡긋했다.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어느새 샤를리즈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미묘한 위화감을 칼릭스가 깨달은 순간, 샤를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생활 청산하기로 해서요. 그리고 이번이 아니면 선황자님께 선물 드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하지만 칼릭스는 생각했다.
마법사를 불러와 감정을 맡기는 건 당연한 절차지만, 그 선물은 사샤에게 고스란히 전했을 거라고.
아이가 이토록 기뻐하며 한시도 손에서 떼어 놓지 않으리라고 짐작했으니 말이다.
* * *
“고작 무도회 다녀왔을 뿐인데 왜 쌔빠지게 뛰어다닌 날보다 힘들지?”
역시 체력이 문젠가?
“체력을 키워야겠어.”
고개를 끄덕하던 차,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수고 많았어.”
도움을 받아 내린 나는 그대로 흐느적흐느적 들어가려다가 휙 돌아섰다.
“있잖나, 경.”
“예, 아가씨.”
에반스 경은 거의 깡총 뛰어오른 수준으로 화들짝 놀랐다.
나는 같이 놀라지 않았다. 이 집 사람들은 다 잘들 놀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번에는 마부도 깡총 뛰었다.
‘주인이 토끼 같은 심성의 소유자라서 그런가.’
아주 일리 있어 보였다.
“체력 운동을 하고 싶은데, 연병장에서 나도 같이 달릴 수 있을까?”
“……예?”
“아침에 빙빙 돌잖아. 그때 나도 슬쩍 끼워 줄 수 있겠나?”
“그, 그건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당연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지마안! 많이 힘드실 텐데요.”
“힘들면 알아서 슬그머니 빠질게.”
“그으, 기사들 땀 냄새도 굉장히 심하고요.”
심해도 하수구 냄새보다는 덜하겠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그럼 내일 또 봐, 경.”
뒤에서 “예에…….” 하고 양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현관 앞에 당도했을 때.
씁씁후하. 나는 몇 번이나 하고서야 문을 벌컥 열었다.
“샤르을―!”
그리고 예견된 상황과 조우했다.
* * *
……졸지에 거짓말을 쳐 버렸다.
“아가씨, 에반스 경에게 오늘 연병장을 가기는 어렵겠다고 전했습니다.”
“으응, 고마워.”
나는 시무룩하게 공작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