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무심한 어조와 함께 등장한 여자는 결코 얕볼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표정이 깃들지 않을 것 같은 싸늘한 얼굴은 그 완벽한 이목구비와 더불어 절로 거리감을 자아냈다.
대공을 쫓아다니는 경악스러운 행태에도 대다수 귀족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기만 했을 뿐인 이유였다.
태생부터 그들과 다른 존재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그 위압감이 한층 크게 다가오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 * *
절로 찡그려지려는 안면 근육에 힘을 줘 버텨 냈다.
내 얼굴의 위력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쁜……!’
여럿이서 한 명을 괴롭힌 비겁하고 못된 소년들이지만 애들이었다.
어른이 질책하는 건 저보다 더 비겁한 일이다.
하지만 같은 어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공녀, 공녀. 닐레 백작은 제 저택에서 나를 그렇게 부르나 보군. 내 앞에서는 공녀님, 공녀님 하던데 뒤로는 그렇다니…….”
‘그거 아주 잘됐네.’
나는 눈꺼풀을 내려 눈동자를 가렸다.
내 눈 보면 저 백작 놈 가만두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될 거다.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돕기는 싫단 말이다.’
원작에서 사샤는 어느 백작의 눈빛을 기민하게 포착해 대공에게 보고한 바 있다.
그러니 이래 봬도 상등의 교육을 줄곧 받았을 저 꼬마도…….
“흐, 흐아앙!”
……음. 사샤가 대단한 거였군.
저 울음소리가 마치 기폭제라도 된 듯이 다섯 중 둘이 연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대체 왜!’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괴롭힌 건 너희들이면서 왜 울어?”
“괴롭힌 거 아니에요.”
“그럼?”
“알려 준 거예요.”
“뭐를?”
앞 문장 다 떼먹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질문했을 뿐인데, 소년이 주먹을 꾹 쥐었다.
“저 가짜 선황자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공녀님도 대공 전하 때, 때문…….”
아, 이번에는 뭘 하긴 했다.
끝까지 들어 봤자 기분만 찝찝하게 만들 말이 나올 게 뻔해서, 사샤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돌아가요, 선황자님. 리엔타든 엘루이든이든 원하시는 그 어디든.”
나는 아이가 내 손을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 맞다.’
그냥 넘어간 문장이 떠올라 시선을 흘깃 옮겼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이 어깨를 화드득 떨었다. 그리고 그게 부끄럽다는 듯 어깨를 더 크게 펴고 나를 노려본다.
“그리고 네 말, 다 틀렸어. 내가 선황자님을 많이 좋아해.”
왜 아직도 안 잡지. 설마 사샤도 내가 무서워진 건가?
조금 떨리는 심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때였다.
“이, 이익!”
소년은 그대로 사샤를 호수로 밀어 버렸다.
나는 허겁지겁 팔을 더 길게 뻗었지만, 허공에 뜬 두 손은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하고, 호수가 작은 몸을 집어삼켰다.
‘저 꼬마가 혼자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어.’
그건 나중에 확인해도 될 문제였다.
곧 호수 표면은 검게 변해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할 터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 * *
원작에서, 사샤는 호수가 아닌 밀실에 갇혔다.
빛 한 점 새어 들지 않는 완벽한 암흑에서 사샤를 위로해 준 것은 이리안이 선물한 야광석이었다.
하지만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는 공간에 일곱 살 아이가 혼자 있다. 호롱불 수준의 빛만으로 안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잠들어 있던 빛의 신수가 깨어나기 전까지 그 시간은 작은 몸에 여실히 남아 밤에 불을 켜지 않으면 진정하지 못하는 날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럼에도 내가 그 일을 아예 막으면 되겠다고 단번에 일축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였다.
후일, 사샤가 신수 덕분에 목숨을 구명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 같이 있으면 돼.’
어둠 속에 홀로 남지 않도록.
역시 제 곁에 누가 있어 줄 리 없다는 나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혼자 두지 않으면 돼.’
깊은 호수의 어두운 사위 속에서 나는 마침내 아스라한 빛을 내뿜는 야광석을 발견했다.
“사샤!”
목소리는 물에 막혀 전달되지 못했다. 질끈 눈을 감은 아이의 작은 가슴팍이 가냘프게 들썩였다.
‘이거, 힐링 소설 아니야.’
나는 이를 갈았다. 아이에게 끔찍한 기억이 두 개나 생기는데 어떻게 힐링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힘껏 뻗은 손끝에 자그마한 손가락이 스치고, 아이의 예쁜 눈이 크게 뜨였다.
‘여기 있어.’
사샤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아이는 꿋꿋하게 참았던 눈물을 기어코 터뜨리고 말았다.
퐁퐁 샘솟은 아이의 따스한 눈물이 볼을 스쳤다.
나는 겨우 맞닿은 작은 온기를 품 안 가득 그러모았다.
* * *
이곳은 신전 측에서 신수의 둥지라고 말하는 장소였고, 그리 크지 않은 직경 때문에 신전이 제대로 돈독 올랐다며 비웃음도 샀으나, 실제로 그러했다.
빛의 신수는 빛 아래가 아닌 신전의 어둠에 깊이 잠들어 있다.
‘직계 황족이 왔으니 곧 깨어날 텐……. 아, 깨어났구나.’
물살 때문에 떠올라 있던 야광석이 가슴께로 서서히 내려갔다.
몸이 가라앉는 게 천천히 느려지고, 빛은 완전히 차단됐다.
신수가 아이에게 대화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된 거 참아 보자.’
사샤는 괜찮을 거다.
교황은 현 황제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신수에게 직계 혈족은 사샤뿐.
그러니 아이는 여기서도 무리 없이 숨 쉴 수 있을 터다.
나를 꽉 부여잡고 있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지고, 사샤의 벽안에 금색 불티가 새겨졌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이리안이 이 호수에 빠지는 장면이 있었다.
호수 표면으로 투과되는 햇살이 완전히 걷혀 시야가 완벽한 암흑으로 물든 순간.
이리안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이상한 일이지.’
세상과 유리된 듯한 기묘한 감각이 일고, 기묘하게도 마음이 평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