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향긋한 입욕제를 푼 따뜻한 물로 긴 목욕을 마치고,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대공저는 욕실 공기가 더 따뜻한 탓이었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구경하는 걸 제법 좋아해서 일부러 보온을 하지 않는 내 욕실을 떠올리자 조금 더 아쉬워졌다.
‘몸이 제대로 차가워서 더 많은 김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터덜터덜 연결된 침실에 도착한 나는 흠칫했다. 네 명의 시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공녀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엘루이든 대공저의 시녀장, 칼렌입니다. 그리고 여기 약입니다. 드셔야 해요.”
정말 맛이 없어서 눈물을 훔치면서도 꾹꾹 먹었다. 이게 바로 내 생존에의 의지다.
“잘하셨어요.”
이제 막 서른 중반은 되었을까 싶은 젊은 시녀장이 푸근하게 웃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칭찬을 받아서 머쓱했는데, 그녀가 접시를 내밀었다. 그 안에 있는 건 사탕이었다.
“많이 쓰셨지요?”
‘여기는 모두 천사뿐입니까?’
나는 두 손으로 공손히 사탕을 건네받아 먹었다.
“조금 더 쉬시겠습니까?”
사탕을 아껴 먹으며 고개를 젓자, 시녀장이 주변의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그럼 바로 전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녀님.”
* * *
칼릭스는 응접실에서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가에 서서 너머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소리 내어 부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벽안이 내게 향했다.
“공녀, 더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그래…….”
그가 의자를 빼내 줘서 나는 엉거주춤 앉았다.
티 테이블을 돌아 맞은편에 앉은 대공의 긴 속눈썹이 햇살 아래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공녀, 사샤를 구해 줘 고마워. 매번 공녀에게는 고마운 일뿐이야.”
“……아닙니다.”
진짜였다.
대공은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좋은 것 같다. 내가 귀찮게 했던 긴 세월을 다 잊다니.
아니면 샤를리즈가 저 정도 존재감이었을 수도…….
나로서는 좋았다!
“사샤를 호수로 민 영식의 가문이 황후로부터 사주를 받았더군.”
어쩐지 선황자를 밀기까지 한 걸 보고 의아하다고 생각했더니 과연 황후가 손을 뻗은 거였다.
“공녀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겨 버렸어.”
‘그렇겠지.’
사샤를 대공저로 데려갔던 이리안도 황후의 눈엣가시가 되었는데, 제거할 기회를 놓치게 만든 나는 눈엣바늘 정도 되지 않을까.
“괜찮습니다. 저 싫어하는 사람 어차피 많은데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칼릭스가 문득 묘하게 웃었다.
“그 괜찮다는 말, 입버릇인가? 항상 공녀는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아.”
‘내가 그랬나?’
곰곰이 생각하는데, 대공이 입매를 풀어 느른하게 웃었다.
“호수에 빠졌던 것도 괜찮다고 했다지.”
“그건……. 호수에 빠져도 안 죽으니까요. 살았으면 됐죠.”
생존! 내 최우선적인 목표 되시겠다.
뜻 모를 눈이 나를 주시했다. 왜 저렇게 보나 싶어 갸웃하자 대공이 찻잔 받침을 톡톡 두드렸다.
엉겁결에 꿀꺽 마시자, 대공이 잘했다며 웃었다.
왠지, 샤를리즈가 저 미소를 이전에도 본 적 있다면 대공을 안 쫓아다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보고 싶어서 말이다.
“성가신 일에 말려들게 되어 미안해, 공녀. 공녀를 대공가의 은인이라고 널리 알리는 방향을 생각해 봤는데 공녀는 어떤가? 그 누구도 감히 가볍게 입을 놀리지는 못할 테지.”
안 그래도 얼마나 대공을 사랑하면 조카 구하겠답시고 맨몸으로 호수에 다이빙하냐는 말 들을 것 같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싫어?”
대공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아니, 그 얼굴로 그 말투로 그렇게 물어보면……!
“아니요.”
구차하게 스스로에게 해명하지 않겠다. 나는 저 얼굴에 넘어간 게 맞았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는 게 아니야, 공녀. 공녀가 해 준 것은 공녀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니까.”
칼릭스가 눈을 접어 가늘게 웃었다.
“이래 봬도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 * *
‘나, 알고 보니 이용 가치 대단하다든가?’
왜 이렇게 잘해 주지?
볼을 긁적이는 사이 마차가 저택 대문을 통과했다.
‘공작은 소식 전해 들었겠지……?’
이거 또 기절해 계시면 어떡하나 걱정이었다.
마차가 멈추고, 씁씁후하 숨을 미리 정돈도 하고.
이제 내리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샤를.”
마차에서 내 발로 내린 게 아니라 안겨서 내려졌다. 나를 끌어안은 공작의 목소리가 뭉개졌다.
“샤를, 내 아가.”
울음조차 배어 있지 않은, 경황없는 목소리에 점차 물기가 스몄다. 공작의 품에 내가 안긴 후였다.
허약 체질인 줄 알았는데 공작은 의외로 힘이 셌다.
있는 힘껏 절박하게 끌어안은 팔이 몸을 조여 아팠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목을 가다듬었다.
“저 괜찮―”
[공녀는 항상 괜찮다고만 하는 것 같아.]
“……그 호수, 빠져도 사람 안 죽는다는 전설 아시잖아요. 저 다친 곳 없어요, 아버지.”
“그래도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니.”
공작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어. 나는 너를 걱정하지 않는 방법을 모른다.”
공작의 어깨 너머가 문득 보였다. 하녀장은 부은 눈으로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고, 집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일수록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나는 어색하게 공작의 등을 토닥였다.
“저 여기 있어요, 아버지.”
‘엄청나게 걱정을 끼치고 말았다…….’
저녁 식사도 눈치를 보며 일부러 많이 먹었는데도 공작의 침잠한 눈은 쉽게 기운을 찾지 못했다.
이른 밤, 시무룩하게 침대에 누운 순간이었다.
―인간이여.
……예?
* * *
어린 얼굴은 약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동그란 이마와 올망졸망한 코, 제법 살이 오른 뺨까지 느리게 확인한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황후는?”
“이쪽이 알아챘다고는 짐작도 못 하고 있습니다. 백작은 탈세까지 감행했을 만큼 도박 빚의 액수가 상당하더군요. 사후 빚을 밝히면 갑작스러운 죽음도 의심스럽게 여겨지지만은 않을 테니 닐레로 선택한 모양입니다.”
리반이 이를 악물었다.
“닐레 백작가를 어떡할까요?”
“탈세 건을 터뜨려.”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는 입술은 싸늘했다.
“블레아는 어찌할까요?”
반나절 전, 사샤를 끌어안고 안도한 리반은 아이를 다른 기사에게 넘겼다. 그리고 소년들을 적절하게 압박해 전말을 파악했다.
믿을 수 있는 건 가신 가문의 가주이지, 그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한 시간이었다.
“차기 가주로 누구를 세울 계획인지 물어봐. 장자를 말한다면…….”
칼릭스가 사납게 웃었다.
“블레아 자체를 쳐 내야지.”
장자는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만하면 대단히 자비로운 처사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리반이 무릎을 쾅 꿇었다.
서늘한 벽안이 몇 시간 전을 되짚었다.
[샤, 샤를 님은요?]
깨어나자마자 울먹이며 아이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무사하다는 답을 돌려주고서야 안심한 얼굴로 가냘픈 숨을 내뱉었다.
“…….”
이복형의 자식.
그 정도 거리감으로 적당히 대하고 있던 소년은 이만큼이나 작은 아이였다.
고작 이틀의 시간이 귀중해 잊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사샤 님이 공녀와 지낸 시간은 기껏해야 이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정도는…….]
칼릭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필요로 한 순간에 다가온 온기를 잊지 못하는 마음은, 비록 저 정도 깊이는 아닐지라도 그도 경험한 적 있는 종류였다.
“으응.”
그때,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고, 흐린 벽안이 드러났다.
“처방이 부족했나 봅니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리반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칼릭스는 제법 명징해진 눈에 대고 웃어 보였다.
“어떡할까, 사샤. 너를 괴롭힌 가문들의 문을 모두 닫으면 기분이 조금 풀리겠니?”
눈가에 닿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동작은 이 아이의 부친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네 숙부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다.”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사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자도록 해.”
눈꺼풀 위를 가만히 쓰는 손동작에, 손바닥 밑에서 몇 번 깜빡이던 눈꺼풀이 고요히 닫혔다.
칼릭스는 간단히 결정했다.
황실이 아이에게 아예 기어오르지도 못하게 해야겠다고.
곧이어 도착한 의사는 돌려보냈다.
“리반. 리엔타에 성의 표시를 하고자 해.”
이어지는 꽤나 긴 말을 모두 숙지한 리반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곤 침실을 바삐 나섰다.
새하얀 달빛 아래, 희게 빛나는 아이의 뺨을 본 순간. 칼릭스는 문득 샤를리즈를 떠올렸다.
아니, 저 순간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칼릭스는 샤를리즈를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다시는 대공 전하를 성가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샤를리즈 리엔타는 칼릭스 엘루이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지겹도록 되풀이한다. 쉽게 내뱉는 말의 무게란 가볍기 마련이다.
그런데 늘 온 힘으로 부딪쳐 와서. 세상 모든 걸 잃어도 그만 있으면 족하다는 듯이 굴어서.
[다시는 대공 전하를 성가시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나는 공녀가 성가셨던 것도 같아.
샤를리즈는 언제나 불가해의 영역이었다.
그건 달라진 관계에서 달라지지 않은 한 가지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1년 만에 되풀이하는 의문이었다.
* * *
‘히히, 소원권 얻었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는 알고 보니 신수였다.
[―내 주인이 나를 두려워한다.]
고민 상담을 하러 온 신수 말이다.
원작에서는 빛의 신수가 밀실을 환하게 밝혀 주며 등장해서 혼자 있던 사샤가 바로 마음을 열었는데, 이번은 어쩐 일인지 조용히 대화만 나눠서 그런 듯했다.
[형체도 없이 대뜸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이이니 말입니다.]
[―그럼 내가 형체를 가지면, 주인이 나를 좋아해 줄까?]
[글쎄요. 제가 사샤가 아니라 모르겠는데요.]
[―사례를 하마.]
[일단 큰 건 무서워할 것 같기도 하지 말입니다.]
[―작은 형체로는 지금도 구현이 가능하다!]
신수가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무엇으로 하는 게 좋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