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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7) (17/232)

17화

[음, 반딧불이?]

[―……내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그럼 아이에게 익숙할 동물은 어때요?]

[―좋은 생각이다! 그럼…….]

[쥐 말고! 쥐 말고!]

[―신수의 생각을 짐작하다니. 너는 예상보다 대단한 존재로군. 대단한 인간이여, 그럼 다른 거 뭘 해야 하겠나?]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믿겠다.]

저러고 홀랑 사라지려고 해서, 공수표였냐고 다급히 붙잡자 이런 말을 했다.

[―힘이 돌아오면, 너를 축복하마.]

저 시기는 앞으로 반년 후다.

[축복 말고 소원권으로 주시면 안 됩니까?]

원작에서 힘을 되찾은 신수는 제국 북부에 그가 숨겨 둔 장소로 가장 먼저 향했다.

그곳은 용의 둥지만큼이나 반짝반짝했다. 신성 시대의 성물도 있을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 하리.

거기서 갖고 싶은 게 있었다.

[―알겠다.]

“히히히.”

히죽 웃은 나는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오늘부터 연병장 돌려고 했는데, 기겁하셔서.’

한참 창문에 달라붙어 있었는데도 연병장을 도는 기사들은 계속 행복해 보였다. 한때는 나도 함께 행복했는데…….

“내일부터 나도 같이 해야지.”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공작에게 나 정말 괜찮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밥도 많이 먹고 운동도 매일 하는 일주일이 흘렀다.

아, 그리고 그사이 나는 부자가 됐다.

‘아직도 실감 안 난다.’

한번 거절은 했다.

당연히 예의상이었는데, 내역을 확인한 공작이 다소 놀란 눈치였기에 나는 마음을 비우고 대공저에서 보낸 마차를 보지 않았다.

‘보면 욕심날 테니까!’

이별하는 날에 베개를 흠뻑 적실 게 틀림없다.

그러나 대공은 거절을 거절했다.

‘하긴 냉큼 환수하는 남주는 좀…….’

아무튼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런 소인배에게 예의상 회복을 기다리는 기간이 끝나자마자 서신 두 장이 도착했다.

“아가씨,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희희낙락 들떠서 확인하니 로제타가 아니라 이리안이었다.

“말해 준다고 약속해 놓고…….”

시무룩한 기분이 되어 이리안의 편지를 확인한 나는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황후의 티타임 초대장이었다.

쿠당탕탕 달려온 공작이 걱정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샤를, 가지 않아도 된다.”

“아니요. 이왕 초대도 받았는데 다녀오려고 해요.”

나는 빙긋 웃었다.

‘마침 잘됐어.’

황후는 이 세계의 주요한 악역이다.

그러니까, 공작을 ‘죽일’ 수 있을 만하고도 남는 인물이라는 이야기였다.

황후는 다소 급하게 초대장을 보낸 것치고 일정은 넉넉하게 잡았다.

때문에 이리안을 먼저 만나게 됐다.

그녀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부랴부랴 응접실을 향했다.

“많이 기다렸나?”

“아니에요, 제가 일찍 온 건데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성큼 다가온 이리안이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아주 괜찮아. 앉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몇 번이나 더 물어보던 이리안은 내가 괜찮음, 멀쩡함, 아주 튼튼함으로 일관하자 그제야 안도했다.

“소문을 들었어요.”

케이크를 야무지게 먹던 나는 어버버 고개를 올렸다.

“사랑에 성공하시다니, 축하드려요.”

“……뭐?”

“공녀님을 실제로 뵌 사람들은 대공 전하께서 운이 좋다는 사실을 모두 아실 거예요.”

이리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결혼도 하실 건가요? 아, 이건 아직 너무 이른 질문일까요.”

“그. 그 소문……. 과장이 심하네. 대공 전하께서는 나를 그냥 고마운 사람 1 정도로 보고 계셔.”

“……네?”

이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무하세요. 선황자 전하를 찾아 드리고, 호수에 뛰어들어 구해 주시기까지 했는데 그 정도로 보고 계시다니요.”

“……생각해 보니 저것보단 더 고맙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이어지는 내 변론들을 잠자코 듣던 이리안은 폭 한숨을 쉬었다. 나를 보며 안쓰러운 얼굴을 하다 입술을 질끈 물고는, 글쎄.

“공녀님, 이렇게 착하셔서……. 공녀님이 공녀님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오, 신이시여.’

눈물이 찔끔 났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시무룩하게 스콘을 씹었다.

“그리고요, 공녀님.”

이리안이 수줍게 웃었다.

“여기 초대장이에요. 제가 젊은 작가들의 밤에 초청을 받아서요.”

이거 알고 있다.

원작 중반부에 폭삭 망할 뻔한 전시회인데, 대공의 약혼녀인 이리안이 지원을 해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이때도 관심이 있었구나.’

하긴, 화가들이라면 모두 제 작품을 전시하기를 꿈꾸는 곳이기는 하다.

“오셔도 심심하지 않으실 거예요. 여기 좋은 작품들이 많아요.”

“나는 이리안만 있으면 되는데.”

“아이 공녀님도 참.”

이리안이 볼을 붉혔다.

“이번에는 바나첼 후작 각하께서 소후작 시절 작업하신 흉상도 전시된대요.”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황후가 탐낼 만한 게 있나?’

흠…….

잠깐 생각에 잠겨 있자, 이리안이 다시금 입을 떼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 주실, 거죠?”

“그러지.”

이리안 작업물도 보고 싶고.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이리안이 기쁜 얼굴로 웃었다.

* * *

원작에서 황후는 통칭 ‘약제사’로 불렸다.

그 태생으로 인한 능력 때문이다.

리닉스 공작비가 난산으로 끝내 사망하고 홀로 살아남은 기구한 운명의 아이로 알려졌지만, 실은 황후의 진짜 모친은 따로 있다.

한마디로 사생아였다.

사생아는 인정하지 않거나, 설령 거두더라도 혼인 동맹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뿐 멸시하는 귀족들과 달리 리닉스 공작은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그 이유는, 리닉스 공작가의 피가 흐르는 존재는 모두 리닉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닉스가 무시받는 일은 결코 참아낼 수 없던 공작은 아이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아는 모두를 죽였다. 공작비도 포함된 숙청이었다.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당사자인 황후는 본인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았다. 피를 타고 이어지는 능력 때문일 터였다.

리닉스 공작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르는 비밀.

그러나 타고나기를 고압적인 성향 탓에 황후는 제 출신을 수치스러워한다. 모든 일을 본인이 도모하고도 남을 능력을 갖췄음에도 유서 깊은 후작가의 가주를 제 수족으로 부리는 이유는 저 때문이었다.

그 수족이란 게 바로 바나첼 후작이다.

그리고 나는 그 원작 최고 악역의 일등 부하를 엉겁결에 만나 버렸다.

“리엔타 공녀 아니십니까?”

마치 성직자처럼 아주 착하게 생겼지만, 실상은 흑막이다. 이 소설의 서브 남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흠칫하지 않았다. 내막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흑막인 척하는 거였지.’

여주를 살리려다 대신 죽으면서 후작의 과거사가 밝혀진 덕분이었다.

아마 작가는 섭남의 인기가 많아져서 과거를 풀어 준 것 같지만 역효과만 났다. 칼릭스의 인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후작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악역만 좋아하는 취향이 대다수였던 탓이다.

그래서 악역이 아니라 사연 있는 남자라는 게 밝혀지자 후작파는 울분만 토해 냈다.

‘그래서 샤를리즈는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끔찍한 최후로 끝나게 된 걸지도…….’

“황후 폐하를 알현하시러 향하는 길입니까?”

“예.”

“공녀의 용기 있는 결단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과찬입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뻣뻣해졌다.

겉으로는 황후에게 찰싹 붙은 나쁜 놈인 후작은 사실 마음 씀씀이가 깊다.

과연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눈치 좋게 “그럼 먼저 가 보지요.” 하고 사라졌다.

황후는 오래 기다리도록 해서 기를 꺾는 유치한 수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샤를리즈의 평판 때문일 터였다. 샤를리즈라면 그럼 가 보겠다고 자리 박차고 나설 가능성이 높아서…….

아무튼 덕택에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바로 알현하게 됐다.

“공녀,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 줘 고맙네.”

옅은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황후는 이제 막 서른 중반이 된 젊은 여성이었다.

“제 몸을 던져 아이를 구했다지. 선황제 폐하의 자식이니 내 조카이기도 한 아이를 구해 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서 말이야.”

“치하를 받을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 아주 대단한 일이었어, 공녀.”

애석하다는 듯 여유롭게 웃고 있지만, 황후의 붉은 눈은 나를 차갑게 주시했다.

“내가 말이 많았군. 자, 차를 들게.”

차를 한 모금 넘긴 황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차를 안 마시지? 취향이 아닌가?”

“찻잔이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잠깐 본다는 게 길어졌습니다.”

“아하하, 부담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 특히 아끼는 잔이야. 하지만 공녀에게 내어 주기는 아깝지 않았지.”

‘아직은 나를 적으로 완전히 돌리진 않았구나.’

아끼는 잔이라는 말은 맞다. 이 잔은 쉽게 내어 주는 잔이 아니니 말이다.

죽으면 좋고, 안 죽으면 말고인 상대에게 그녀가 건네는 찻잔이 바로 이것이었다.

은식기로 판별은 물론이고 사후 검출도 되지 않는 독. 황후의 특기라고 할 수 있다.

몸에 똬리를 틀어 한 달 후 전조 없이 피를 토하게 만드는 독약을 어느 한 방향에 얇게 도포한 것이다.

즉, 운이 없으면 죽는다…….

“억지로 들 건 없어.”

“그럼 송구하지만 그리하겠습니다.”

“흐응.”

황후가 가늘게 눈웃음쳤다.

“그러고 보니 공녀가 대공에게 호감이 있다고 했지. 이번 일로 대공가에서 공녀를 은인으로 여긴다고 들었어. 아이도 공녀를 따른다고.”

샤를리즈는 원작에서 멍청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중 단연 최강은 말귀 못 알아듣는다는 쪽이었다.

사실은 우아하게 돌려서 하는 말은 대개 길어지기 마련이니 성가시고, 해석하는 것도 귀찮아서 못 알아들은 척 머리채를 휘어잡았을 뿐인데…….

그 덕택에 황후는 사교계 특유의 우아하게 빙빙 도는 어법을 적당히 깎아 말해서, 나로서는 이득이었다.

“사샤 님께서 워낙 상냥하십니다.”

“황족이 상냥한 건 장점이 아닌데, 그건 조금 걱정이군.”

“아직 어리시니 후일 적당한 선을 알게 되시겠지요.”

“공녀가 아이를 그렇게 신경 쓰다니, 역시 대공가와 혼담이 오가고 있나?”

“먼 이야기입니다.”

영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자, 황후는 입술을 말아 올린 채 나를 훑어보았다.

“사실 공녀를 부른 건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어.”

황후가 검지로 제 턱을 가볍게 쓸었다.

“공녀는 응당 대공가의 은인이고, 황후로서 황가의 아이를 지켜 준 그대의 공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싶지 않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더니.

“대공을 향한 공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예?’

“혼담이 성사할 수 있도록 내가 힘을 쓰겠네.”

‘예?’

얼이 빠져 있는데, 황후의 차가운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그녀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신혼 생활에 아이가 있는 게 달갑지만은 않을 테지만……. 조금만 참으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황후는 사샤를 처리하기 위해 나를 꼬시고 있었다. 대공저에 세작을 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머리 나쁜 리엔타 공녀를 이 김에 이용하려는 속셈일 터다.

와아, 내가 황후도 포섭할 만한 인물이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원작이랑 안 얽히려고 냅다 튀었는데 이렇게 되다니요.

‘그런데 여기는 강제성 그런 것도 없나?’라고 생각했던 내 이마를 속으로 쾅 때렸다.

내가 멀리 저 멀리 던져 버린 데드 플래그를 황후가 어디선가 찾아와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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