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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8) (18/232)

18화

이상하게도 떨리지 않았다.

간계와 모략을 일삼는 원작의 명실상부한 악역을 마주했는데도 말이다.

‘저번에 공작이랑 나눠 먹은 약이 효과가 좋았나?’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흐음?”

역시나 황후의 눈이 첨예하게 빛났다.

‘……또 다른 데드 플래그다.’

귀족들의 인식에 샤를리즈 리엔타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안하무인 공녀다.

황후에게는 멍청하게 보일 터였다. 그러니까, 대화의 내막을 눈치챌 머리는 못 되는 주제에 누가 어떤 말을 나누었냐고 살살 긁으면 술술 불 수 있을 만큼.

‘원작에서도 샤를리즈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았는데.’

쟤도 나라서 그런지 아주 조금 씁쓸하기는 했다.

그때, 황후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길로 제 입술을 손으로 가렸다. 죽일지 말지 가늠하는 기로에 선 순간 보이는 버릇이었다.

그녀가 얇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어째서지? 공작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건가?”

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 * *

고단한 하루였다. 넋이 나가 흐느적흐느적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침대에 누워 요양을 취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천장만 멍하니 구경하고 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잽싸게 편지지를 꺼냈다.

“바로 알려야지.”

저는 말입니다, 황후 편에 붙을 생각이 전혀 없어요! 마음도 다 접었습니다!

비록 공작에게 화살 안 가게 하려고 입은 털어 버렸지만…….

내 생에 대한 의지가 이렇게나 강하다. 중간중간 허공을 보며 “허어.” 하는 한숨도 뱉으며 줄줄 써 내려간 비굴한 편지는 점차 그 끝을 보였다.

“그나저나…….”

저번 성축일 예배 당일 분명 근거리에서 대공과 눈을 마주쳤다. 칼릭스의 키가 큰 탓에 한 뼘이 조금 넘는 거리이기는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근처였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미래의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대공저의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달랐지?”

연회장, 정원, 신전과 응접실…….

깃펜으로 턱을 콕콕 찌르던 중 문득 깨달았다.

‘미래의 편린이 보이지 않은 날은 본래 일어나야 했던 장면을 박살 낸 당일이었지.’

거기까지였다. 나는 ‘미래를 바꾼 당일은 대공의 눈을 봐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라는 가능성을 하나 열어 두는 것을 끝으로 더 고심하지 않기로 했다.

학문도 아니고 머리 싸매고 골몰한다고 해서 이 이상의 답은 어차피 얻어 낼 수 없다.

“편지나 점검하자.”

저번에 사샤를 보고 내 자식이냐며 공작이 오해했다는 망발을 내뱉은 전과가 있는 내 무의식은 믿으면 안 된다.

다 쓴 편지를 몇 번이나 더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그 옆, 이리안의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사흘 후네.”

내가 일주일 요양만 안 했더라도 이리안은 넉넉한 일정으로 초대장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미안해하면서도 가겠다는 소리에 수줍게 기뻐했던 얼굴이 떠올라서일까. 괜히 초대장을 뚫어져라 노려보게 됐다.

* * *

“영악한 계집.”

노을 지는 하늘로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카타리나가 돌아섰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고개를 숙인 테오도르 바나첼을 발견한 입술이 조금 올라갔다.

“입을 열어도 괜찮네, 후작.”

“샤를리즈 리엔타입니까?”

“그래.”

카타리나가 눈매를 구겼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건방지더군.”

가늘어진 적안이 얼마 되지 않은 과거를 되짚었다.

[어째서지? 공작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건가?]

카타리나는 녹색이 그토록 차가운 빛깔일 수 있다고 그 순간 깨달았다.

공녀의 녹안이 그녀에게 스르르 미끄러졌다. 제 개인사를 사사건건 묻는 건 설령 황후라고 한들 불쾌하다는 양.

[아버지 때문이 아닙니다. 순전히 제 의사입니다. 대공 전하는 무정한 분이시지요. 현재는 저를 좋게 봐 주신다고 해도 그게 오래가겠습니까.]

‘설마 내가 약을 제조할 줄 안다는 사실을 파악한 건가?’

새어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음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묘한 말이었다. 카타리나가 주먹을 쥐었던 차, 관상용으로 보기에만 좋은 얼굴이 까딱 기울어졌다.

[저는 낮은 확률에 목을 매고 싶지 않습니다. 최대한 끌어올리고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겠죠.]

“아주 영악했지. 대공과 만남을 조성하라고 요구하더군.”

카타리나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있던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샤를리즈 리엔타가 황후를 충족시켰다고.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인가.’

일례로 겉으로 내심을 짐작하려고 함은 만용이라는 점이 그러했다. 황후는 마음에 들어 하면서 저런 식으로 표현을 하는 뒤틀린 성정이었고, 샤를리즈는 표정 변화 자체가 거의 없었다.

공녀를 최근 만난 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선황제의 아들과 관련된 일을 언급하며 치하했을 때, 귀찮게 왜 말을 붙이냐며 건방졌던 눈빛이 지독히도 생생했다.

그때, 황후가 감미로운 목소리를 흘렸다.

“공녀가 전시회에도 참석한다고 했지.” 

“예, 이리안 라프란체가 초대장을 전달했다고 합니다.”

“라프란체.”

“자작 영애입니다. 우연히 이리안 라프란체의 그림을 보게 된 공녀가 실력을 호평하여 연이 닿았다고 하더군요.”

“그래.”

본래라면 황후는 흘리듯 말하는 것을 끝으로 이리안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을 거였다.

그런 한미한 가문 따위 그녀의 관심사였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샤를리즈의 머리에 무슨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알아 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을 배경으로 삼아도 여전히 선명한 붉은 눈이 휘어졌다.

“이리안 라프란체에게 접근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주군.”

* * *

리엔타 공작저는 이른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다.

곧 방문할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제가 대공저로 가도 됐을 텐데요.”

“안 된다. 외출을 하고 온 지 얼마 안 되지도 않았느냐. 그리고 사흘 후 또 외출해야 한다지 않았어.”

공작은 강경했다.

약의 효과가 대단한 모양이다. 이제 담이 많이 강해졌는지 안색도 멀쩡했다.

‘다행이네.’

사샤가 보낸 편지는 황성에서 돌아온 그 이튿날에야 발견했다. 겉에 대공가의 문장이 찍혀 있기는 해도 삐뚤빼뚤한 글씨 때문에 누군가 장난을 친 줄 알았다며 하인이 눈물을 보였다.

‘……내가 죽일 것 같았나…….’

무슨 왕에게 하는 것도 아니고 죽여 달라던 외침이 떠올랐다…….

그래도 편지가 소각되기 전이라서 다행이었다. 그 하인에게도 나에게도 말이다.

듣자 하니 예전에 나를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대공가의 문장을 유사하게 흉내 내어 보낸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대단한 사람.’

그 담대함에 박수를 짝짝 치는 한편, 그 정도로 미움을 사고 다닌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그 밤 이불을 팡팡 쳐 댔다.

아무튼 아침 식사는 평화로웠다. 공작도 그렇게 느꼈는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오늘 하루가 꼭 지금만 같이 흘러가면 좋겠구나.”

굳이 저런 말을 한 걸 보면 걱정이 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안 된다고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본래 사샤의 것이어야 마땅할 황위를 차지하고 있는 황제. 실질적인 권력자라는 황후가 사샤를 곱게 볼 리 없다는 사실은 굳이 되짚을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

이번 일로 나는 새삼스럽게도 리엔타의 권력을 실감했다. 황후와 대공 둘 중 어느 한쪽을 굳이 선택하지 않더라도 타격이 없는 가문이 리엔타였다.

‘알고 보니 밖에서는 막 냉철하고 그러시나?’

힐끔힐끔 공작의 얼굴을 보기도 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 식사는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엄 있는 면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얼굴에 애석하게도 이제는 익숙해진 창백한 안색이 깃들었다.

“대공 전하께서 함께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허, 허어.”

입술이 하얗게 질린 집사가 전한 말을 듣고서부터였다.

나는 의외로 놀랍지 않았다. 대공이 아이를 생각보다도 훨씬 아낀다고 실제로도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 가지 의문이라면, 대공이 방문 일정을 당일에서야 알린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흠.’

공작의 어깨를 토닥이며 근처의 하녀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눈치 빠르게 냉수를 갖고 왔다. 공작에게 먹이고, 집사도 한 모금 마신 후.

엘루이든의 마차가 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 *

넓은 마차 안에서, 사샤는 한껏 어깨를 굽히고 앉았다. 아직도 아이에게는 여럿이 좁은 방을 공유할 때의 버릇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서둘러 뜯어내는 일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차근차근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만, 이런 면모를 발견하게 될 때마다 칼릭스는 기사를 보내고는 했다.

“죄송해요, 숙부님.”

아이는 사과를 할 때 반드시 얼굴을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그 쓰레기들 때문에 생긴 버릇일까.’

아이의 뺨을 쓸어 주며, 칼릭스는 내심을 숨기고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마음대로 편지를 보내서 바쁘신데…….”

“다음에는 리반이 아닌 내게 말을 해 주기로 약속하기로 하고 끝난 일이 아니었니?”

아직 글을 쓸 줄 모르는 아이였다. 리반이 글을 작성하자 그것을 옆에 두고 편지를 써 내렸다. 글을 쓴다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가까웠다.

사샤는 깨어나자마자 서둘러 리엔타로 편지를 부쳤지만, 무슨 일인지 샤를리즈에게선 일주일이 넘도록 회신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바짝바짝 타들어 간 마음을 드러내듯 힘겹게 올랐던 볼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칼릭스가 동석을 하기로 결정한 이유였다.

걱정을 입 밖으로 말하는 법이 없는 아이가 악몽에 시달리다 어젯밤 흐느꼈기 때문이었다.

[샤를 님……. 흐윽, 호수에 들어간 거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 그러니까…….]

보드라운 손수건으로 눈가를 문지르지 않고 세심하게 닦아 주었지만, 아이의 눈꺼풀은 유심히 본다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통통했다.

리엔타 공작저의 철제 대문이 열렸을 때였다.

서늘한 벽안은 작은 아이가 제 옷을 꾹 쥐는 것을 확인했다.

“호수에서 공녀는 너를 꼭 껴안고 있었어. 놓치지 않을 듯이 말이야.”

칼릭스가 벌써 몇 번이나 해 준 이야기였지만 사샤는 그때마다 희망을 엿봤다.

샤를 님은 내게 실망하지 않으셨을지도 몰라. 편지도 그냥 늦게 발견하셨을 뿐인지도 몰라. 일찍 발견하신 거라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도 그냥 내가 일찍 답을 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러셨는지도 몰라.

만약 기억이 종이로 이루어진 책이라면 샤를리즈가 기록된 페이지는 해지고 낡아 찢어졌을지도 몰랐다.

“사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일매일 그린 사람이 있었다.

겨우 눈매가 조금 휘어질 뿐인 미소를 보며 사샤는 울컥 치밀어 오를 뻔한 눈물을 삼켰다. 샤를리즈의 예쁜 옷에 눈물 자국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이렇게 다시 안 안아 주실지도 몰라.’

“샤를 님…….”

기억이 책이라면, 그 부분만 찢어서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

어차피 사샤의 세상은 작았다. 좁고 냄새나는 방에서 숨죽여 끙끙거릴 때마다 감히 가졌던 소망은 샤를리즈의 품에 안겨 있으면 현실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아이는 세상이 이렇게 다정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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