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사샤를 핍박했던 건달은 아이가 4년쯤 전부터 보였다고 기억해 냈다. 공포에 질려 본연 이상의 능력이 발휘된 결과였다.
“행적은 여전히 묘연하십니다.”
무릇 가문보다는 황제의 총애로 결정되는 위치상 황비는 대체로 화려한 미인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전대 황비는 수선화 같은 여린 인상의 여인이었다. 이목구비뿐 아니라 색상도 그러했다.
제국에서 가장 흔한 색상인 갈색. 갈색 머리카락과 그보다 조금 짙은 눈동자 색을 가진 황비는 특정 짓기 어려워 수색이 가장 더뎠다.
“혹시 몰라 리닉스 공작가 쪽도 살피고 있습니다만…….”
리반은 끝내 침통한 숨을 흘리고 말았다.
부디 그쪽과 얽히지 않았기를 리반은 바라고 또 바랐다. 소박하고 다정한 성정의 여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염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칼릭스는 오랜만에 선황제를 떠올렸다.
[선택에 대한 결과가 모두 내 몫인 건 당연한 일이란다.]
황족에게 몹시도 드문 연애결혼. 그 결과가 부인의 오랜 시녀와 동침한 것이었냐며 소리 죽여 비웃는 말을 선황제는 감내했다.
황실에는 무릇 귀족가보다 공고한 여러 금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부모를 잡아먹고 태어난 아이라는 오명이 귀족보다 황족에게 더 치명적임은 현 황후에게 그 사실이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애절하게 부탁한 아내의 뜻을 받아들인 황제와 작은 황비궁에 갇히는 삶을 선택한 그녀의 시녀.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실은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황비 역시 생존해 있을 수도 있었다.
“조금 일찍 전시회를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내심은 능숙하게 숨긴 채로, 칼릭스는 시선을 거두었다.
누군가에게는 염원일 장소가 황후의 비자금 조성 목적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파악한 건 제법 오래전이다.
그는 오늘 황후의 활로를 하나 잘라 낼 예정이었다.
* * *
‘내 안목, 돌았습니까?’
이건 미감이 아니다. 이건 판별기다!
뭐가 진품이고, 뭐가 가품인지 쏙쏙 눈에 들어왔다.
‘허어.’
신기해서 이리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가도 나 혼자 멈춰서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리안이 기분 나빠 하면 어떡하나 걱정됐는데, 이리안은 마음마저 드넓어서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었다.
“즐거워하시다니 다행이에요. 혹시 지루해하실까 봐 걱정이었거든요.”
“전혀 안 지루해, 이리안.”
내 눈이 쏙쏙 구별한다니까?
그러던 중, 뒤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녀가 한자리에 멈춰 있네요.”
“괜찮아 보이기는 해요.”
“그럼 저 작품…….”
뒷말은 아주 작게 소곤거려서 안 들렸다. 나는 이리안을 터벅터벅 따라갔다.
‘내가 그렇게 오래 서 있었나?’
같이 구경하고 싶으면 옆에 슬쩍 와도 됐는데. 하지만 이건 여태 나를 겪은 저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선택지일 테니 쑥덕거릴 수밖에 없을 것 같기는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앗.”
전시회라고는 해도 귀족들만 모이는 이 장소는 다른 성향의 연회이기도 했다.
때문에 작품들이 보호 장비 없이 전시되어 있음에도 핑거 푸드와 음료가 마련된 구역이 있었고, 쟁반을 들고 다니는 서버 역시 여럿 보였다.
서둘러 움직이다 이리안과 부딪힌 소년이 든 쟁반이 뒤로 넘어가고, 유리잔 두 잔이 아래로 추락하려고 했다.
나는 잽싸게 유리잔을 허공에서 잡았다.
‘오, 아직 안 녹슬었네.’
연병장 도는 것도 아직도 얼레벌레 헐떡거려서 완전히 맛이 간 줄 알았다.
뿌듯하게 있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잽싸게 행동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이랑 다른 행동을 보이면 말이 생기기 마련.
‘헉, 또 소문 퍼지려나?’
소년의 얼굴이 창백했다.
“히, 히익.”
“공녀님의 드레스에 얼룩이 졌어요.”
“저 아이, 안타까워라…….”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걸 봐서는 이건 안 퍼질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소년이 넙죽 엎드리려고 했다.
유리잔을 내려 두고 나는 굽어지려는 아이의 몸을 잡아 올렸다.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괜찮아.”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왠지 지나치게 사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영애도 아니고 공녀라고 정확히 언급한 아이를 보고 눈치챘다.
나, 요주의 인물이니 조심하라고 초상화 같은 거로라도 미리 봤구나…….
“됐어. 가서 일 보도록 해.”
“용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춰 사과하는 모습은 마치 몸에 밴 행동 같았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인 듯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인 것이다.
‘사샤와 똑같은 버릇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사샤를 알게 모르게 챙겨 주었던, 건달 무리 산하에서 고생하고 있던 남장 소녀의 이름을 말이다.
‘그런데 왜 전시회에서 일을 하고 있지?’
어린애는 채용하지 않고 말고를 떠나서, 굳이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대공은 아이들을 모두 보육원으로 보내고, 그 보육원에 막대한 기부금을 기탁한다. 그래서 그중 후일 사샤를 위해 일하고 싶다며 열심히 공부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아이도 있다며 외전 말미에서 나오기도 했다.
“유리잔은 왜 이렇게 많이 들고 있어?”
“빗질을 하던 중 나리께서 요청하셨습니다.”
“딸꾹!”
내가 저 나리요, 하고 여봐란듯이 딸꾹질을 하는 남자를 쳐다봤다.
‘나쁜 사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귀찮아서 이 어린애한테 일을 시켜?
그러다 문득 아이의 손바닥이 부르튼 게 보였다.
“너, 나 따라와.”
딸꾹, 딸꾹!
딸꾹질 소리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실내를 울렸다.
* * *
엔젤은 앞서 걷는 여자를 경계 가득한 눈으로 따라갔다.
길에서 살고 구걸하며 사람의 감정을 잘 알아챈다고 생각했다. 때리려고 하기 전에 달아나야 했으니까.
그런데 공녀님이라는 저 여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용서해 줄 듯 굴다가도 이렇게 외진 곳으로 데려갔다.
공녀님 옆에 있던 여자는 좋은 분이시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지만 그녀보다는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보였던 얼굴이 차라리 더 믿을 만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역시 다른 애들처럼 믿으면 안 돼.’
지금은 어쩌다 보육원이라는 곳에 맡겨졌다. 하지만 언제 또 쫓겨날지 모른다. 엔젤은 돈을 많이 모아야 했다.
아주 많이 모아야 했다. 먹고살아야 했고, 하고 싶은 일이 또 있기 때문이었다.
“손 줘.”
절로 손을 내밀게 되고도 남을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엔젤은 선뜻 손을 줄 수 없었다.
손은 소중하다. 손을 다치면 한동안 일을 할 수 없다.
“싫은가 보네. 그럼 여기 받아. 손바닥 아픈 것도 몰랐니?”
연고를 휙 건넨 공녀님은 아무 의자에 앉더니 허공에 마뜩잖은 숨을 흘렸다.
“이상한 약 아니야. 너랑 비슷한 또래인 분이 생각나서 그랬어.”
“……비슷한 또래인 분이요?”
이 질문을 하고 만 이유를 엔젤은 몰랐다. 내뱉고 나서야 뒤늦게 혀를 깨물었다.
“그래. 나이만 비슷하지만. 그분은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을 가진 분이시거든.”
언제 또 이런 약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 열심히 손바닥에 바르던 엔젤이 작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오른볼에 마치 밤하늘을 아주 작게 오려 붙인 것 같은 예쁜 점이 있으시지.”
벨이다. 벨이 틀림없었다.
엔젤은 어느새 공녀님을 멍하니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계속 후회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유일한 가족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 피하는 게 아니라 잘해 줘야 했다. 아주 조금 잘해 주는 게 아니라, 많이 잘해 줘야 했다.
힘들 때 안아 주고 손도 잡아 주고 동냥에 성공한 동전을 두어 개 주는 게 아니라 전부 줘야 했다.
[그 꼬마, 가치가 없어서 버렸어.]
어디서 맞았는지 잔뜩 얼굴이 부은 얼굴로 돌아왔던 건달이 그런 말을 한 날, 엔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잘 지내는구나.’
공녀님이랑 아는 사이고, ‘분’이라고도 한 걸 보면 좋은 곳에 간 모양이었다. 무의식에 가까운 추한 질시는 짙은 안도의 틈새로 끼어들지도 못했다.
엔젤은 이상하게도 따끔거리는 것만 같은 눈을 부릅뜨고 약을 손바닥에 치덕치덕 발랐다.
* * *
‘큰일 났다!’
엔젤한테 사샤 근황을 슬쩍슬쩍 알려 주다 보니 그게 조금 길어졌다.
그래도 큰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일이 벌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