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공의 목소리는 실로 평이했다.
이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공녀님으로부터 전하에 대해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어라?’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많이 전했는데!
얼떨결에 바라보자 이리안이 내게만 보일 정도로 살그머니 웃었다.
그게 마치 ‘저 잘했죠?’ 같아서, 나는 그만 뒷목을 잡고 싶어지고 말았다.
* * *
공작씩이나 되는 가문이 아직도 상단을 전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뒤로나마 헐뜯지 못하는 공고한 위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남부의 실질적인 지배자.
제국의 자금줄을 틀어쥔 거부.
물 밑에서 수없이 오간 간계와 음해로 추락한 숱한 건국 공신 가문들과 달리 현재도 굳건한 위상.
그러니 감히 그 누가 리엔타 공작가 자체를 얕볼 수 있겠는가.
오랜 위용을 간직한 리엔타의 저택은 황성을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유일한 딸자식의 성질머리 때문에 무도회를 여는 일도 없어 아쉬운 시선들이 스치곤 하는, 밤이 되어도 별빛처럼 아름답기로 유명한 저택.
그 한 폭의 명화 같은 저택 지하에 있어야 할 것 있고, 없어야 할 것 있는 감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리고 론은 막 그 드문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빈 의자에 누가 앉을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때.
샤를리즈가 나타났다.
‘됐다!’
공작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눈에 비친 환희가 들킬까 싶어 론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아가씨.”
그를 내려다보는 미끈한 녹안에 아주 작은 파문조차 일지 않았다는 건, 그래서 몰랐다.
“아가씨,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면…….”
“내가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 줘야 하나?”
온갖 변명을 주워섬기려던 입이 밀랍을 바른 것처럼 쩍 붙었다.
상체를 앞으로 조금 굽힌 샤를리즈가 입술을 올렸다. 미소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저 정도 표현이 적합했다.
“대답해 봐. 내가 네 변명 따위를 들어야 되겠느냐고.”
“죄, 죄송합니다.”
그때서야 론은 전시회에서 목도한 샤를리즈의 낯선 모습을 기억해 냈다.
“간단해. 내가 질문하면 너는 답하는 거야. 할 수 있겠지?”
“예, 예! 그럼요, 아가씨. 잘할 수 있습니다.”
“네게 전시회를 털라고 한 작자가 대가로 주겠다고 한 거, 뭐야.”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을 론이 필사적으로 수면 아래에서 끌어올렸다.
‘절대로 다 말 못 하지.’
그랬다가는 죽음이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론이 절반의 답을 했다.
“돈이었습니다.”
“그것뿐일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모시는 아가씨의 소문은 그들도 당연히 알고 있다.
오만하고 가릴 것 없는 성격을 일컬어 망나니라고 한다는 말에 그것참 제대로 지었다며 킬킬 웃기도 했다.
그러면, 앞뒤 가리지 않고 뺨부터 날리는 게 맞았다.
어차피 쫓겨날 게 틀림없다. 맞은 걸 빌미로 돈이라도 뜯어내거나 신문사에 투고하려고 했더니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대답 안 하니?”
이렇게 고요해 숨조차 죽이게 만드는 선득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아직 네가 덜 괴로운 모양이야. 거짓말할 정신도 있고.”
현실 도피를 하고 있던 정신을 낮은 웃음소리가 낚아챘다.
“이제 기억이 다 난 참입니다! 카지노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게임이 있는데, 그래서 사람이 몰려 귀족 나리들도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만 앉아도 눈총받는데, 그, 그 리닉스 공작 각하쯤 되셔야 계속 할 수 있는 자리! 거기를 온종일 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제가. 죄송합니다! 제가 순간―”
샤를리즈가 손을 올렸다.
아무 표정도 드리우지 않아 아직 적히지 않은 책의 다음 페이지 같은 얼굴에선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한편, 샤를리즈는 그저 고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의미였던 사람을 잊어버렸기 때문일까.
‘샤를리즈 리엔타’의 생이 꼭 전생처럼 아득하고, 오히려 이전 생의 기억이 더 뚜렷했다.
그러니 익숙한 환경 속에서 익숙한 기억의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툭툭 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내리치던 동작이 어느 순간 멎었다.
‘묘하네.’
론의 말을 듣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황후가 의도했는지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리닉스 공작이 꼭 카지노의 걸어 다니는 홍보물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잖아.’
황후가 카지노에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가?
제 부친을 살려 둔 이유는 같잖은 정 때문이 아니라 철저한 목적 지향 주의적 사고의 결과라는 쪽이 더 그럴듯했다.
‘이놈의 책, 주인공들만 빼놓고 다른 인물들은 대충 서술한 거 아냐?’
샤를리즈의 얼굴을 정면에서 목도한 론이 “힉!” 소리 내며 어깨를 파득 떨었다.
그에 줄곧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에반스가 날 선 시선을 던졌다.
“저 하인은 어떡할까요, 아가씨?”
* * *
‘고단한 하루였다…….’
그나마 모두 한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야 되는 거였으면 이 종이 몸은 벌써 파업을 선언하고도 남았다.
“우씨, 나중에 꼭 손봐야지.”
도박에 미쳐 전시회의 물품을 털려고 한 하인을 죽이기까지 하는 건 과도한 처사다.
가문에 흠집이 갈까 봐 얼른 내쫓는 정도가 적당하다.
“당분간은 황후 짓인 거 모른 척해야 한다.”
괜히 튀게 행동해 황후의 표적이 되는 건 사양이다.
아직 공작을 죽게 만든 ‘그’라는 작자가 누구인지 윤곽조차 잡지 못했다.
그래도 처벌과 함께 추천장 없이 내쫓긴 했지만 생각할수록 아까웠다.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못 살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데!
뚜둑.
손가락을 꺾으며 나는 지금 몸의 기억보다 더 뚜렷한 이전 생에서처럼 웃었다.
‘몸이 이럴 뿐이지, 악바리 정신 가득한 악녀라서 정신적으로 힘든 건 끄떡없다고.’
후후후.
“…….”
사랑만 받고 자란 내 두 번째 생에서 왜 이렇게 악바리 정신 가득한 사람으로 자라났느냐 하면 그건…….
‘음?’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문 쪽으로 시선이 향했고, 이어 집사가 고했다.
“아가씨, 저녁에 드실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눈을 빛내며 어서 문을 열어 줬다.
‘체력 닳았는데 마침 잘됐다.’
“그렇죠, 그렇죠, 아가씨. 쭈욱 들이켜시면 됩니다. 이제 거의 다 드셨습니다. 한 번에 드셔야 고역이 덜합니다. 쭉. 쭈욱. 예, 잘하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친 나는 별것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집사가 장하다는 얼굴로 눈망울을 흔들었다.
“여기 사탕입니다, 아가씨.”
한 개를 소중하게 야금야금 아껴 먹고 있는데, 어쩐지 열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엉거주춤 고개를 들자 집사가 아련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 내기까지 했다.
“우리 아가씨 언제 이렇게 다 크셨는지…….”
예전에 다 컸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못 말린다.
이전 생을 기억하지 못해 성격 파탄자 수준을 밑돌았던 시절의 짜증에도 불굴의 의지로 계속된 주책바가지를 내가 어떻게 말리겠는가.
그래서 사탕을 입 속에서 굴리고나 있었는데, 집사가 또 애틋하게 두 손을 모았다.
‘2차전 시작이다.’
“약 드시기 싫다고 투정 부리신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그렇다.
자라나며 부족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샤를리즈의 성격이 그 모양 그 꼴이었던 데에는 의외로 상식적인 이유가 있다.
시시때때로 아픈 몸.
공작이 온 대륙을 다 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난 세월. 그럼에도 끝내 치료제를 찾아내진 못했다.
그 말인즉슨 평생토록 안고 가야 할 동반자라는 것.
해결할 수 없는 문제만큼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게 있을까.
‘저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약그릇 엎고, 먹기 싫다며 문을 잠그고.
괜한 투정이 아니었다고, 당사자인 나는 알고 있다.
[나 때문이잖아. 나 때문이잖아!]
비합리적인 죄책감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별수 없이 울적해지고 마는 건, 내가 결국 샤를리즈 리엔타이기 때문일 터였다.
* * *
“아하하.”
옅은 색조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손에 들린 보고서가 한 사람의 최후에 관련되었다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청아한 음색이었다.
“마음에 드는 미술품을 하인을 시켜 훔치게 했다는 정도의 가십으로 만족해 주려고 했는데, 안 되려나 봐.”
카타리나가 싱긋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묻는다.
“라프란체는?”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흐응. 없을 것 같긴 했지.”
관심 없다는 듯 카타리나가 고개를 까딱였다.
바나첼 후작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늘 이랬다.
아군으로 포섭할 이를 선택하면 망쳐 놨다.
절대로 그녀 이외의 대안이 존재할 수 없도록.
“아, 리엔타 공작가라서 다행이야.”
카타리나가 화사하게 웃었다.
명망과 재력. 리엔타를 이루는 둘 모두에 경쾌한 타격감을 선사할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 * *
론에게 이번 일을 사주한 사람은 높은 확률로 황후다.
황후의 몹쓸 버릇이 고개를 든 것이다.
‘내게 차선이 없도록 하려는 거야.’
일이 어그러졌으니 황후는 다른 걸 생각하고 있을 거다.
이제 리엔타는 사용인들을 이전보다 확실히 관리할 테고,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협소해진다.
“그럼 하나 아닌가.”
남부의 곡창 지대는 황후라도 못 건드린다.
아니, 황후라서 못 건드린다. 황제의 부덕으로 일이 번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상단.”
원작에서 황후의 명령하에 나온 모조품은 감정사들도 혀를 내두를 품질이었다.
“황실에 납품할 걸 가짜로 바꿔치기할지, 아니면 시중에 풀리는 걸 할지 그걸 모르겠다.”
흠.
원작에서 원래 ‘샤를리즈’는 황후의 절대적 아군이었다.
그녀의 사랑에 던져진 엄청난 모욕. 그 순간에 닿아 온 손을 샤를은 구명줄이라고 여겼다.
그러니까, 상단을 공격하는 건 황후의 본래 계획에 없었다.
“그럼 전자든 후자든 시간이 더 걸리겠네.”
얼마 전 성축일이었으니 다음 납품까진 석 달은 족히 남았고, 후자는 대량으로 모조품을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그럼 그때까지 황후의 ‘손’이 되어 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야겠다.
‘황후 성격상 황성 안에 두었을 리는 없겠고…….’
심드렁히 눈을 깜빡이며 바깥을 내다본 때였다.
“아가씨, 외출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귀찮아, 귀찮아…….’
나는 터벅터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