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로제타가 직전까지 애써 외면하고자 노력 중이던 감동은 금세 꼬리를 말았다.
“……반대하시기는 했죠.”
과연 가문을 위해 자식들의 친목을 장려하는 부모들과 달랐다.
숙부 내외는 로제타에게 그럴듯한 연줄이 생기는 것을 경계했다.
“나쁜 사람들.”
살짝 구긴 완벽한 모양새의 눈매를 멀거니 보던 중, 어째서일까.
풋 웃음이 터졌다.
속에서 풍선처럼 부풀었던 무언가도 함께 터져 사라진 듯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공녀님이 이번에도 그냥 하시는 말이란 걸 알아요.”
엉거주춤 오래 들고 있던 탓에 먹지는 못할 사탕이 말아 쥔 주먹 안에서 달콤하게 굴렀다.
“그래도 고마워요.”
이 순간 느끼는 감정만큼은 진실이었다.
* * *
“기껏 열심히 말했더니 쓸모없는 말로 치부하고 너무하네.”
조금 시무룩한 기분이 되어 나는 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같이 경비대를 가겠다며 생떼 부리길래 다녀와서 무슨 일 있었는지 다 말하겠다며 얼렀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클리스라……. 그런 일이 있었구나.”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작고한 백작 부부의 근심이 크겠어.”
철없는 자식을 둔 부친의 절절함이 느껴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공작이 침잠한 눈을 했다.
“그리고 그 하인이 죽었다고 하더구나. 아깝게 됐어.”
역시 괜히 최후 악역이 아니다.
행동력이 몹시도 빨랐다.
“그렇게 쉽게 가다니.”
공작이 고요히 분노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손을 뻗어 공작의 손등을 덮었다.
“샤를…….”
론의 죽음은 예상했다.
공작에게 론에 관해 모두 이야기한 것도 리엔타를 건드리려는 사람이 있으니 목숨 간수 잘하라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막상 겪으니…….
“아, 아니지! 미, 미안하다. 샤를. 내가 착각을 했더구나. 마차. 그래! 마차 사고였다고 들었다!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헛소리 늘어놓고 있는 공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키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샤, 샤를?”
내뱉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나는 웃었다.
그제야 공작의 얼굴이 풀렸다.
‘아버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 * *
이번에도 사샤는 잔뜩 걱정 서린 눈으로 나를 찾았다.
이 나이 먹고 조그만 꼬맹이에게 걱정거리만 안기는 몹쓸 어른이 되었다.
“그때 대공 전하도 계셨고. 나 무사하고.”
계속 했던 이야기를 변형해야 하는 일은 원래도 말주변 없는 내겐 몹시도 고난도였다.
“네.”
사샤가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 있다고, 그래서 나는 힘주어 작은 손을 맞잡았다.
놀라 조금 커진 아이의 눈이 휘영청 휘었다.
끝내 나는 아이의 볼에 뭐가 묻어서 닦아 주는 척 조물조물거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왜 이번에도 대공이 함께 왔지?’
뭐, 나로서는 좋았다!
이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흠.’
그래서 사샤에게 저택 구경을 시켜 주겠답시고 슬쩍 멀어지려고 했는데.
“내가 따라다니면 불편한가, 공녀?”
남주는 남주다.
사람 속내를 저렇게 잘 꿰뚫다니!
속으로 감탄하며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열심히 내저었다.
그렇게 때아닌 산책이 시작됐다.
“이건 해바라기고.”
“네에.”
“그건 장미다.”
“향이 좋아요.”
“저건…….”
뭐더라.
하도 예전에 들어서 까먹었다.
그때 줄곧 가만히 있던 대공이 입술을 열었다.
“리시안셔스.”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아셨어요, 숙부님?”
“좋아하는 꽃이거든.”
긴 손가락으로 꽃잎을 매만지던 대공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
사샤와 함께 신기해하고 있던 나는 식은땀이 났다.
‘이, 이거 설마.’
아무래도 대공이 좋아한다고 해서 심은 것 같다…….
어쩐지 여기가 붉은 장미 좋다고 갑자기 갈아엎으라고 했던 구역이었더라니.
“오랜만에 보는군. 공녀의 정원을 구경시켜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정원사의 안목에 저도 고마워해야겠습니다. 이렇게…….”
……그만하자.
이미 수습할 수도 없다.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있는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웃나 싶어 째려봤는데, 칼릭스의 얼굴은 그저 무해했다.
그냥 내가 나쁜 놈 같았다.
“대화를 청하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을까?”
쪼그려 앉아 꽃향기를 맡고 있던 사샤가 후다닥 돌아봤다.
커다란 눈이 대공과 나를 번갈아 움직였다. 배시시 웃은 아이가 어디선가 나타난 리반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냐.’
그 재빠른 일련의 과정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대화를 훔쳐 들을 이들이 없도록 리반이 정리했을 테니 걱정할 것 없어, 공녀.”
‘헉.’
그럼 근처에 아무도 없단 말이었다.
나는 내심 경계 태세를 갖추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인이 죽었다지. 많이 놀랐겠어.”
“괜찮습니다.”
이미 한번 마주쳤던 대공의 푸른 눈이 다시 내게 향했다.
때맞춰 부는 바람 때문에 표정까지는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이 휘날려 시야를 가리는 통에 앞도 못 봤는데 말이다.
이제 와 새삼 주인공 아니라고 이런 사소한 점마저 차별하냐! 는 토로는 나오지 않았다.
여긴 철저하게 주인공만 애틋한 세상이었다.
그게 아니면 더 이상하다.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며 나는 방금 전 본 미래를 복기했다.
“……리엔타가 난리겠군요.”
리반이 헛웃음을 흘렸다.
칼릭스는 손에 들린 문서에서 시선을 뗐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리엔타’의 상단인 탓에 상품을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리엔타와 거래한 귀족 가문들은 지금 문건과 물건을 검토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