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사람 많은 길거리에서 마차가 이 속도로도 달리는 줄은 몰랐네.”
길에서 마구 달리면 안 되는 건 맞았다.
그러나 행인들이 암묵적으로 마차를 알아서 잘 피하는 게 보통이었다.
“……공녀님, 외람되오나 마차는 보행자가 피하는 게…….”
“지금 내가 비켜야 했다고 말하는 건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재깍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이구나.”
라베트의 안색이 흐려졌다.
황후 폐하를 뵙고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는 게 아니었는데.
“아가씨, 나가지 마시어요. 분명 그 공녀가…….”
“엘라.”
“……죄송해요.”
“앞으로 하지 않으면 된단다.”
상냥하게 웃은 라베트가 익숙하게 평지를 걷듯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죄송해요, 공녀님. 많이 놀라셨나요?”
진심이 가득 담긴 사과에도 그저 공녀는 뚱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에 기사가 울분을 삭였다.
한편, 샤를리즈는 그저 흠칫했을 뿐이었다.
‘……만나고 싶기는 했는데……. 어째 원작의 대부분 인물들을 길바닥에서 만나네.’
흠.
아, 혹시……?
‘내가 길바닥 출신이라서 그런가.’
* * *
시곗바늘을 되감아, 이른 오후.
오랜만에 아침 운동을 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샤를리즈는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나는 우연을 빌리지 않으면 라베트를 절대로 못 만난다.’
라베트의 추종자들이 겹겹이 둘러싸 째려볼 게 뻔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양 뺨을 감싸고 시선을 팍 맞추는 미친 방식도 있지만 그건 기각했다.
이미지 때문은 아니었다.
‘내 이미지는 진즉에 골로 갔다.’
“그랬다간 볼 수 있어도 가능하다는 사실만 깨닫고 끝이겠지.”
그러면 애달프게 로나터스 후작가를 그리워만 하게 될 터.
더군다나 로나터스 후작은 황제파 인물이다. 중도파인 공작을 몸 사린다며 싫어했다.
‘공작 살리려고 하는 일에 공작 적수만 늘리게 되는 꼴이다.’
그래서 샤를리즈의 선택은 이거였다.
“아가씨, 후원 물품은 명하시면 구하겠습니다. 굳이 하나하나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나온 김에 다 처리하고 싶어서 그래.”
다정한 라베트는 보육원 봉사도 자주 한다.
그래서 물품을 건네면서 언제 언제 나오는지 슬쩍 알아볼 계획이었다.
‘저거 괜찮은데?’
“영애님!”
샤를리즈를 의식하며 힐긋힐긋 곁눈으로 훔쳐보고 있던 주변이 동시에 ‘헉!’ 하고 억눌린 숨소리를 흘렸다.
“저, 저 아이. 어쩌면 좋아요.”
“미리 경비대를 부를까요?”
“공녀님에게 구걸을 하려고 들다니…….”
낮게 소곤대는 목소리들이 경악 일색이었다.
뛰어난 기사인 탓에 그 소곤거림을 들은 에반스도 내심 같이 경악했다.
못 들은 척할까 고심하던 에반스가 무거운 입을 뗐다.
“저어, 아가씨. 저 꼬맹이가 아가씨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만…….”
샤를리즈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나를?”
나를 반갑게 부를 사람은 공작이랑 집사랑 하녀장이랑 사샤랑 이리안뿐인데.
그러나 알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저 기억하시죠, 영애님?”
“으응.”
엔젤이 싱긋 웃었다.
“몰래 나오신 것 같아서 공녀님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나 모르는 사람 없을걸…….
좋게 쌓아 올린 인지도가 아닌 탓에 샤를리즈는 흐린 눈으로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만 했다.
“그런데 왜 부른 거지? 이유가 있나?”
“아, 그게 말…….”
역시 돈이 필요해서 그러나. 그런데 현금은 아쉽게도 안 들고 왔는데.
그때, 소녀의 뒤로 커다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엔젤, 너 이 자식! 고아를 일하는 데 끼워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
기세 좋게 소리친 음성이 어물어물 가라앉았다.
덩치 큰 중년 사내는 엔젤 앞에 서 있는, 누가 봐도 귀한 집 자제를 보고 얼떨떨하게 굳었다.
“뭐야.”
사실 ‘뭐야’라고는 했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를리즈를 곱게 자란 공녀님으로만 아는 엔젤이 일목요연하게 전달해 속삭였다.
가만 경청하던 샤를리즈가 눈을 번뜩 빛냈다.
“우리 아버지가 재상 시절에 소아 노동법 지정하는 데 얼마나 공을 들이셨는데 네가 그걸 망치려고 들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중년 사내는 금세라도 녹아 바닥과 한 몸이 될 기세로 졸아들었다.
* * *
내가 봤을 때 이 체력은 집안 환경의 산물이다.
그렇게 잘 쓰러지는 걸 보면 공작도 나만큼 체력이 형편없을 게 틀림없다!
그 체력 쪼개서 열심히 일해 지정한 법률을……!
‘나쁜 사람.’
이글거리는 눈으로 부리나케 사라지는 뒤꽁무니를 째려보고 있는데, 시야 구석에 걸려 있던 몸이 사라졌다.
뭔가 싶어 보니 엔젤이 꾸벅 굽힌 허리를 다시 세우고는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답 하나 해.”
“예, 공녀님.”
“왜 이렇게까지 일하는 거지? 보육원 식사가 형편없나?”
내 소중한 돈을 횡령하고 있다면 결단코 가만두지 않겠다.
“아니에요, 그냥……. 돈이 필요해서요.”
내키지 않는 투로 겨우 대꾸한 엔젤이 다시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저 꼬맹이의 사정이 기억나 버렸다.
‘몸이 약한 오빠를 찾는 게 목표라고.’
“마침 잘됐네. 딱 네 정도 나이대의 안내가 필요했거든. 수고비는 넉넉하게 챙겨 주지.”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본 엔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기계적인 미소를 걸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쁩니다.”
“아가, 이상한 생각 하는 거 같은데 네가 진짜로 필요해서 이러는 거 맞아.”
“…….”
허물어진 미소 사이로 살짝 드러난 찰나의 모습만큼은 나는 잊기로 했다.
……그렇게 라베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여신님?’
손을 내밀며 ‘괜찮은가?’ 하고 묻는다면, ‘손이 닿은 덕택에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하는 헛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갈 것만 같은 자애로운 미인이었다.
“괜찮으신가요?”
라베트가 내게 다가오려고 하자, 같이 내린 시녀가 라베트의 소매를 조심스레 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내 선택을 결정했다.
속으로 눈물을 쓱 훔치며 나는 내 이불에게 씁쓸하게 미리 사과를 건넸다.
‘먼지 앉을 날이 없구나.’
눈을 표독스럽게 치켜뜨고 손목을 돌려 손등을 보였다.
“여기, 놀라서 쓸렸어.”
명백한 개소리에도 라베트의 반응은 단연 달랐다.
“어머…….”
놀란 라베트가 얼른 다가왔다.
조심스레 내 손을 잡고 환부를 걱정스레 보다가 시선을 들어 사과했다.
“다행히 흉은 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희 저택으로 가시겠어요? 여기서 멀지 않답니다.”
‘기회다!’
줄곧 기다린 타이밍을 나는 먹이를 눈앞에 둔 개처럼 낚아챘다.
“…….”
“…….”
“……공녀님?”
라베트가 우미한 눈매를 어색하게 깜빡이고 나서야.
나는 참담하게 인정했다.
가설 세 번째.
원작의 전개에 정석적으로 돌입한 인물들만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부질없었던 꿈…….’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릴 여지 없이 기각.
라베트는 막 원작 전개에 발을 디디고 돌아오는 길일 테니 말이다.
세세한 대사까지는 몰라도 전체적 맥락은 기억하고 있다.
라베트의 시작을 말이었다.
* * *
한때는 리엔타와 필적할 만큼 부유했던 가문은 그저 적막했다.
그 깊은 곳, 가주의 침실은 그 주인을 둘러싼 추문처럼 짙은 안개가 깔린 듯 축축한 분위기였다.
장대한 기골은 여전하나, 살집이 빠져 메마른 몸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엿보기 어려웠다.
뒤늦게 맛본 여흥이 얼마나 짜릿했기에 망가진 거냐는 말은 틀린 답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다.
대부분 귀족들과 같이 클럽에서 카드 게임 정도는 거의 평생토록 해 왔으니까.
“아버지, 드셔 보세요.”
카타리나가 매끈한 눈썹을 기울였다.
“황궁의가 처방한 약이랍니다. 조금 쓸 테지만,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지 않아요.”
카타리나가 부친의 턱을 들어 올렸다. 틀어쥔 손에 악력이 실린 건 순식간이었다.
“언젠가 아버지의 입에 독약을 부어 넣을 테지만, 당장은 아니랍니다. 정말 약이 맞아요. 아직은 건강하셔야지요. 제대로 할 수 있는 일 하나 없지만, 그래도 삼키는 정도는 제대로 할 수 있으시겠지요?”
선득한 붉은 눈이 휘어지면서 만면 가득 화사한 미소의 모양새를 띠었다.
잠든 공작을 성가신 것 보듯 바라본 카타리나가 침실을 나섰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황후 폐하.”
“그대도.”
집사의 공손한 인사를 받고 마차에 오르자마자 줄곧 걸고 있던 엷은 미소가 즉각 걷혔다.
순식간에 변하는 표정은 섬뜩한 구석이 있었지만, 느릿하게 구르는 적안보다는 못 했다.
부친의 저 꼴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간단한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다니 아쉽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카타리나는 쿠션에 깊이 기대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진정 아쉽지는 않았다. 제대로 행동할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탓이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였다.
애초에 그녀가 배후로 있다고 리엔타는 짐작조차 못 할 테니.
“어머니, 조금만 더 살아 계시지 그랬어요.”
애석하다는 듯 카타리나는 얕은 한숨을 흘렸다.
“그랬다면 사람들을 더 쓸모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녀는 이내 한 사람을 떠올렸다.
라베트 로너터스.
쓸 만하기는 한데, 너무 여린 게 문제였다.
“그럼 그런 마음 따위 사라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나?”
아이처럼 무구한 얼굴로 카타리나가 중얼거렸다.
* * *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귀가하자마자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