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저번에 떠오른 게 실제로도 들어맞는지 확인은 해 봐야지.’
이럴 때는 공작 모르게 개인적으로 운용할 사람이 없다는 게 불편하기는 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렇게 살았는데 나한테 괜찮은 수하가 있겠냐고.’
있다가도 잽싸게 도망쳤겠지.
정신 승리를 살짝 하자면 차라리 처음부터 없던 게 낫다.
괜찮은 수하 목록에 나한테서 탈출해 다시 돌아올 리가 없는 사람들을 빗금 처리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난 씁쓸한 눈으로 마차에 작게 난 창문 바깥을 응시했다.
―언제 내리는 게냐. 덜컹거려서 불편하구나.
이놈의 신수는 내가 애수에 빠질 타이밍도 안 줬다.
‘어허. 마차 바로 밖에 기사가 있습니다.’
―어차피 너만 들을 수 있지 않느냐.
‘저만 들을 수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저번에 뒤늦게 공작도 들었으면 어떡하나 싶어 물어보자, 신수는 태평하게 대꾸했다.
[―내 말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 대상을 특정해서 할 수 있습니까?]
[그랬던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
[…….]
나는 운 좋게 공작이 못 들었을 뿐이라고 납득했다.
성축일도 깜빡해서 불참했던, 신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도 들은 음성이지 않은가.
‘진짜 나한텐 왜 들리는 거지.’
사샤와 친해지고 싶은 신수의 절박함 때문인가?
나도 이제는 신수가 사샤랑 친구가 되기를 바랐다.
수다쟁이가 옆에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되기도 할 테고, 너무 착해서 걱정인 애가 자기주장도 펼칠 수 있게 될 것 같다.
―……어쩐지 네 기색이 이상하다.
저런 것도 눈치채다니 아주 좋다. 주변에 허튼 생각 품고 있는 자가 있다면 잘 구별해 내겠어.
‘역시 신수님과 사샤가 친해지는 게 좋겠습니다.’
―간만에 옳은 말이다.
‘저는 자주 옳은 말을 합니다.’
―그나저나 아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냐?
채근하는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있는 사이 반가운 말이 들려왔다.
“도착했수.”
마차에서 내리자 마부가 퉁명스레 구시렁거렸다.
“거, 좋은 옷 입은 분이 수고비도 안 챙겨 주는구먼.”
―양심이 없다!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시종 투덜댔던 신수가 분개했다.
―절대 주지 마라!
‘처음부터 줄 생각 없었습니다.’
나는 침착하고 빠르게 멀어졌다.
돈이란 무릇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법.
없다가 있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있다가 없어지면 쌔빠지게 일해야 한단 말이다!
‘플라타너스, 플라타너스.’
상냥한 정원사들이 앞다퉈 설명해 준 덕택에 어떤 게 그 나무인지 똑똑히 알고 왔다.
그 근처에 있는 가게로 들어가자, 주인이 얼른 반겼다.
“어서 오세…….”
‘말을 왜 하다 말아.’
바라보자, 남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음, 맞게 온 것 같다.’
놀란 것과 켕긴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방금 저놈은 켕긴 참이었다.
“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당연히 의뢰할 물품이 있어서 왔어.”
“예?”
“왜, 어렵나?”
“아닙니다.”
“그런데 조금 아쉽게 됐군. 나는 나일 줄 모르는 사람을 찾으러 여기까지 온 참이었거든.”
이 말에 귀족 영애가 왜 이 구석진 곳까지 왔는지 의문스러워하던 시선이 풀렸다.
대신 다른 긴장이 깃들었다.
그럴 만하다.
뒤통수치려고 준비 중이던 상대가 찾아왔는데 긴장 안 하면 그 적성을 살려 다른 일 하는 게 낫다.
놈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어떤 물품을 의뢰하고자 하시는지요?”
“이거.”
나는 준비해 온 종이를 내밀었다.
“구현할 수 있겠나?”
“……저보다는 보석상 쪽이 더 적합…….”
그렇게 중얼거리던 남자가 돌연 말을 멈췄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착수금은 여기 있네.”
수표를 내밀자 남자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신수가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너, 수전노가 아니었나?
이 자식이……?
신수가 쏙 들어간 주머니를 흘겨보고 있는데, 놈이 양 손바닥을 비볐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좋은 자세군.”
뭐, 너는 그럴 생각이 들었다면 다행이다.
‘황후한테 냉큼 이거 말해라.’
나는 픽 웃었다.
참고로, 난 내 건 절대로 안 빼앗기기로 유명했다.
* * *
무릇 사람은 배불러 있을 때 너그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공작이 디저트까지 다 먹은 후까지 참을성 있게 타이밍을 노렸다.
“아버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너무 비장했나.’
공작이 또 대공과 관련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놀라면 어떡하나 싶어 빠르게 덧붙이려던 순간이었다.
“그래. 말해 보려무나. 샤를.”
공작이 흔쾌히 말했다.
너무 익숙했던 반응이 사라져서 그런가.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되었지만, 어쨌든 공작이 안 놀랐으면 다행이다.
나는 준비한 말을 읊었다.
“상단 일을 아주 조금 도왔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버지의 노고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잘 알게 됐다.
귀족만 상대한다고 해서 내심 종수가 적겠거니 했건만 오산이었다.
상단이 얼마나 많은 물품을 취급하는지, 그래서 진품 유무 구별하려면 내가 얼마나 개고생해야 할지를 절절히 깨달은 뜻깊은 시간이었다.
“샤를. 체자레도 네가 열심이라고 하더구나.”
공작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해서,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 죄송스럽다고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훌쩍이는 공작에게 집사가 옆에서 손수건을 챙겨줬다.
그러는 집사의 눈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저도 상단의 일을 돕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세부 관리는 당장은 힘들 테지요.”
“계속 말하려무나.”
“그래서 물품을 한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귀족 자제들을 겨냥한 것인데, 연인 간에 서로 나누는…….”
풀썩.
눈물 젖은 손수건이 아래로 추락했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그리로 향했고, 그 근처 발발 떨고 있는 손을 발견했다.
‘왜, 또!’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이제야 마치 고향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졌다…….
‘에효.’
* * *
[샤를, 그,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래, 그러거라…….]
[아버지.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저거 줄 사람 없습니다.]
[그래…….]
“어째 또 이상한 생각하고 계신 것 같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빙의와 환생의 연타를 맞은 뒤 나는 저 말의 신봉자가 됐다.
그렇다고 대공이랑 여차여차한 사이가 될 것을 유념한 건 절대 아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황후의 뜻을 따르는 척 ‘황후 폐하께서 사샤 님을 감시하고자 대공 전하와 약혼하라고 하시는데, 같이 뒤통수 쳐 볼 생각 없으십니까?’ 하며 대공에게 제의할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똑 부러지게 대공과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할 수는 없어서 얼버무렸더니, 공작의 어깨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나뭇가지처럼 축 내려앉고 말았다.
‘아무튼 허락이 떨어졌다는 데 의의를 두자.’
그사이 놈은 벌써 시제품을 만들어 보냈다.
“이건 진짜네.”
본 순간, 그냥 알았다.
‘흠.’
절대 음감도 아니고 절대 미감인가.
“사람 진심 판별할 줄 아는 쪽이었으면 더 편리했을 테지만, 이게 어디냐.”
중얼거리며 햇살에 비추자, 둔탁한 하트 모양으로 세공된 보석이 투명한 붉은색의 빛살을 다각도로 반사했다.
대충 탁상에 내려놓으며 나는 함께 온 서신을 집어 올렸다.
본 제품은 언제까지 만들면 될까요, 공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