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럼 죄송하지만 도움 한 가지를 더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뻔뻔한 말이었으나, 고양된 기분에 이 정도는 넘길 수 있었다.
카타리나가 짐짓 관대하게 웃었다.
“물론이네.”
“마차까지 함께 갈 동행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급하게 온 차라 기사를 대동하지 못해서요.”
“저런.”
안타깝다는 듯 눈썹 앞머리를 모으고 카타리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방금 보니 문 옆에 시종이 있더군요. 황성 내부이니 기사가 아닌 시종으로도 괜찮습니다.”
“…….”
일순 싸늘한 빛을 띤 적안이 샤를리즈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이내 시선을 뗐다. 경계할 필요도 없는 온실 속의 꽃이었다.
“공녀가 괜찮다면야. 그럼 그렇게 하지.”
종을 흔들자 들어온 시종에게 카타리나가 명령했다.
“마차까지 공녀를 배웅해 주고 오게.”
잠시 멈칫한 시종이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깊이 숙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차를 정차한 장소까지 가는 길은 적막했다.
그랬기에 샤를리즈의 말은 그야말로 맥락 없이 툭 튀어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대가 기사인 거 알고 부탁한 거야. 같은 기사면 굳이 기다려서 갈 필요 없으니까.”
남자의 눈에 묘한 경계가 서린 것은 아주 찰나였다.
바라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짧은 순간을 샤를리즈는 포착했다.
“이전에 마상 경기에서 본 적이 있어서 말이지.”
“흔한 인상이라는 말은 많이 듣습니다.”
“굳이 아닌 척할 건 없지 않나. 실력이 눈에 띄어서 기억했어. 그뿐이야.”
“…….”
“시종 생활하기 뻐근하면 리엔타로 와도 좋아. 꽤 괜찮은 곳이거든.”
“죄송합니다만, 저는 황후 폐하의 수족이라서 어렵겠습니다.”
“그래? 아쉽네.”
담담한 말은 일견 떠본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겠으나, 진담처럼 들렸다.
“그럼 기억은 해 둘 수 있겠지? 샤를리즈 리엔타가 그대의 가치를 알아보고 제안을 했었다고.”
“기억하면 황후 폐하께 보고드릴 수도 있을 테지요.”
“그대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입술 끝을 틀어 올린 샤를리즈가 손을 흔들었다.
“저기 마차가 보이는군. 안내 고마웠어. 잘 가.”
분명 거절한 쪽은 그고, 거절당한 쪽은 샤를리즈였다. 그러나 떠나가는 걸음의 무게는 정반대였다.
* * *
‘칼거절…….’
그럴 거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철벽이 엄청났다.
시무룩했던 것도 잠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살았다!’
개고생은 피하게 됐다.
‘그나저나 재수 없게 말하니까 편하다.’
황후는 내가 원래 그렇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까.
‘내일 드디어 사샤 만난다!’
희희낙락하다가 전조 없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이제 더는 안 되겠지…….”
대공가에서도 내가 사샤를 계속 보는 게 달갑진 않을 거다.
그리고 나도 사샤를 그만 만나야 한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다.
‘사샤가 나를 좋아해.’
내가 워낙 눈치가 빠르기도 하지만, 만약 눈치가 없었어도 모를 수가 없었을 거다.
다정한 애정이 충만한 눈은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까지 하게 만들 정도였다.
‘나 같은 인간이랑 친하다고 사샤를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 있을지도 몰라.’
무엇보다도 아이 정서에 안 좋다. 주변에서 다 경계하는 사람을 혼자 괜찮게 생각하고 있으니 나중에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그러고 보니 이리안 못 본 지도 꽤 됐네.”
‘젊은 작가들의 밤’이 그 난리가 나고 한동안 기운이 없더니 다시 의지에 불타올랐다.
[제 작품이 전시된대요! 제목은 이미 정했답니다.]
작품들이 다 타서 신예 작가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모양이었다.
[오, 축하해.]
[제목은 안 물어보세요?]
[뭔데?]
이리안은 그때 참 수줍게 웃었다.
[백합이에요.]
“백합 진짜 좋아한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시무룩했다.
* * *
화창한 날이다.
맑은 하늘을 멍하니 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비가 안 오네.”
오늘 아침 나는 정말 일찍 일어났다.
신수가 같이 있었다면 내가 일어나기 전부터 볼을 때려 댔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 날인데.’
멜리사 부인이 깨우기도 전에 혼자 눈이 번쩍 뜨였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지 않고 바로 일어나 닫힌 커튼을 젖히고자 잡았다.
그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기대하면 안 되는데, 기대해서 이뤄진 적이 없는데 그만 또 기대하고 말았다고.
날이 좋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보 같아.’
생각했는데.
[이런 감정 따위 죽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이거 하나 제대로 못 하고. 네가 대체 잘하는 게 뭐가 있어!]
빗방울을 맞이하듯 뒤집고 있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러쥔 주먹을 잠자코 보고 있던 때였다.
“샤를 님.”
상기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귀 씻은 느낌이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정화되는 듯한 순수한 생명체가 나를 올려다봤다.
“잘 지내셨어요? 저는 잘 지냈어요.”
볼을 손등으로 매만지자, 아이가 눈을 사르르 접었다.
앞으로는 최소 대공 조카 최대 차기 황제를 대상으로는 하지 못할 행동이니 사심을 살짝 담아 미적미적 손을 뗐다.
“잘 지냈어.”
“아.”
사샤가 수줍게 웃었다.
“잘 지내시라고 매일 기도했는데, 별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셨나 봐요.”
‘오, 신이시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참았지만 아이의 뺨에 내 볼을 비비는 추태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안 돼! 마지막 날에 그런 추태를…….’
그래서 나는 아무 말이나 꺼냈다.
“별님 좋은 분이시네. 좋은 분 소개해 줘서 고마워.”
“일찍 도착했다고 들었어. 많이 기다렸나?”
……나는 이제 별님에게 칼릭스가 조금 전 내가 씨불인 헛소리를 잊게 해 달라고 물 떠 놓고 빌어 볼 작정이다.
으어어어어 하다 보니 어느새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음료도 먹은 후였다.
그 와중에도 꼭꼭 씹는 사샤의 야무진 뺨과 해사하게 웃으며 조잘거린 말소리는 놓치지 않은 게 내가 생각해도 대견했다.
정신이 제대로 든 건 사샤가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샤를 님, 샤를 님. 저 이제 단어 많이 알아요. 불러 주시면 쓸 수 있어요.”
옹골차게 색연필을 잡은 주먹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흰 빵.”
꼬물꼬물 열심히 손을 움직인 사샤가 뿌듯한 얼굴을 했다.
“천사.”
“다음도요.”
“아기.”
“또요!”
흥분했는지 아이의 볼이 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흠, 복숭아는 어렵겠지?’
“딸기.”
그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사샤가 놀란 눈으로 칼릭스를 바라봤다.
‘어라.’
눈을 가늘게 접어 웃던 칼릭스는 특유의 나긋한 투로 설명했다.
“저번에 나도 딸기를 문제로 냈었거든. 그랬더니 사샤가 그만…….”
“안 되는데!”
아이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에 더 깊이 웃으며 칼릭스가 말을 이어 갔다.
“그때도 정답을 맞혀 얼마나 대단한 선생을 붙여야 할지 고민이었지.”
“숙부님!”
저를 놀렸다고 알아챈 아이의 뺨이 크게 부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많이 친해졌네.’
원작의 타임라인과 비교한 건 아니었다.
무게감 잡지 않고 의외로 장난스럽고 다정한 숙부와 착하고 순한 조카이니 당연한 수순 같다.
“샤를 님, 또요!”
떠오르는 단어가 더는 없어 나는 겨우 한 가지를 더 내뱉고 허겁지겁 주변을 탐색했다.
‘어라, 여기 토끼풀이 많네.’
“사샤, 반지 만들어 줄까?”
“반지요?”
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응, 풀 반지.”
괜찮겠느냐며 슬쩍 대공을 보자, 칼릭스가 빙긋 웃었다.
“만들어요.”
나는 사샤를 데리고 적당한 풀을 함께 골랐다.
줄기 가운데를 갈라 만든 간단하다 못해 초라한 반지에서 아이는 시선을 쉽게 떼지 못했다.
토끼풀 반지를 낀 손을 제 가슴께로 가져가 매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너무 감사해요, 샤를 님. 정말 너무 좋아요.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눈을 느리게 깜빡이게 됐다.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도 다정한 본성은 잃지 않을 아이에게 이 순간이 그럭저럭 즐거웠던 과거로 남는다면 좋겠다.
“……샤를 님?”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아이의 머리를 나는 괜히 쓰다듬었다.
“고마워.”
생판 남이 머리를 만져 대는데도 사샤는 그저 수줍게 웃었다.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돌아가는 길. 그 끝에 있는 사람을 보던 사샤가 갑자기 깡총 뛰었다.
“아! 숙부님 것도 만들어 드려야 해요!”
“나를 잊었구나…….”
‘세상아.’
왜 사샤가 매번 속는지 알겠다.
장난이란 걸 아는데도 순간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처연한 얼굴이었다.
당장 달려가 만들어 바쳐야 할 것만 같다. 열 손가락에 모두 끼워 주면 웃을까. 그럼 내 손에 녹색 물이 배어 사라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내 심장은 잘 버텨 냈다.
그래도 앞으로도 눈을 마주치고자 얼쩡거릴 예정이니까 뭐 하나는 줘야겠다.
‘흠.’
“그럼 행커치프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윗주머니에 꽂으면 그게 바로 행커치프다.
나는 크기가 큰 토끼풀을 찾아 눈을 부릅떴다.
“행커치프?”
사샤가 의아하게 중얼거리자, 칼릭스가 설명했다.
“겉옷 윗주머니에 꽂는 손수건을…….”
잠시 침묵한 칼릭스의 벽안에 묘한 웃음기가 스몄다.
“행커치프라고 부른단다, 사샤. 공녀, 설마 토끼풀 한 송이인가?”
순수한 아이의 눈이 충격에 물들었다.
저 눈망울 앞에 나는 나쁜 짓을 저지른 인간이 된 것만 같아 양심이 쑤셨다.
양 손가락을 쭈뼛쭈뼛 얽으며 사샤가 조심스레 물었다.
“숙부님도 반지 만들어 드리면 안 될까요?”
천사가 나를 황천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저 멀리 있는 기사들이 나를 도끼눈으로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다.
사실 남이 그러든 말든 그건 알 바 아니지만, 대공도 내심 그럴까 봐 그게 문제였다!
‘진짜로 그냥 반지 만든 건데. 흑심 없이 그냥 아가한테 선물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속으로 찔끔 눈물을 훔치며 나는 대안을 짜냈다.
“화, 화관은 어때?”
“화관이요?”
“응, 더 멋질 거야. 사샤 것도 같이 만들자.”
“네!”
하지만 만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