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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30) (30/232)

30화

갑자기 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건넨 우산을 나는 아이가 비 맞지 않도록 기울였다.

나무로 짜인 피크닉 바구니에 빗물이 들어차고, 풀밭에 깔아 둔 천에 흙물이 배었다.

‘비가 결국 왔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조금 더 욕심내고 싶었다.

대공과도 이대로라면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으니까.

그럼 대공가의 사람들도 나를 덜 경계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역시 그러면 안 됐다.

이게 현실이다.

나는 쪼그려 앉아 사샤와 눈높이를 맞췄다.

“선황자님.”

크게 뜬 눈을 바라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샤를 님.”

“헤어졌던 날이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대공 전하의 배려로 더 뵐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눈을 깜빡거리던 사샤가 이내 천천히 미소 지었다.

“저도 그랬어요.”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그럴게요.”

아이가 추위에 떨리는 입술로도 차분한 목소리를 내었다.

“샤를 님도 건강하게 잘 지내셔야 해요.”

이제는 정말로 안녕이었다.

* * *

이상하다.

집사와 공작이 내 눈치를 계속 살살 살폈다.

뭔 일 났나 싶었지만 애초에 저지르는 건 나고, 수습하는 게 저쪽이어서 무슨 일인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갔다.

그래서 그냥 물어봤다.

“왜 제 눈치 살피십니까?”

“허, 허억!”

숨을 들이켠 공작이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집사도 목울대를 크게 울렁였다.

‘……뭐야.’

진짜 무슨 일 있나!

내가 자신 있는 뒤처리 분야는 협소하다.

애초에 뒤처리해 줄 사람도 없었던 빈약한 인간관계 탓이었다.

“그게 아니라…….”

우물우물 주저하면서도 내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자르는 공작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샤를 네가 울적해 보여서 말이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걱정이었습니다, 아가씨.”

“저 완전 쌩쌩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자, 많이 먹거라.”

‘내가 그동안 식량 거덜 냈던 거 에둘러서 지적하신 건가?’

아니지. 공작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우렁차게 대답했다.

“예!”

스테이크를 전투적으로 해치우던 중, 문득 생각했다.

‘내가 울적해 보이나?’

나 하나도 안 울적한데.

‘그러고 보니 정작 울적했을 때 화났냐고 물어보셨었지.’

그럼 공작 눈은 그냥 삐었나 보다.

가니시도 다 먹고, 디저트도 공작 몫까지 먹고, 차도 먹고, 이를 빡빡 닦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 올리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눈이 삐신 게 아니었습니다.

창문 난간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 왔다.

‘수다쟁이야, 잘 도착했니.’

[이제 선황자님을 제가 뵐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있어도 도움 되실 것 없어요.]

신수도 보내고 나니 마음이 헛헛했다.

퀭한 눈으로 나는 입술만 달싹여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많이 좋아했나 봐.

“화관, 만들어 줄걸.”

비 맞아서 앓게 돼도 아픈 거 잘 참을 자신 있는데.

침울하게 중얼거린 것도 잠시. 나는 생각을 바꿨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반지는 금세 시들 테니 대공저 사용인들이 아이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때 적절하게 버릴 거다.

“……그래.”

그 정도 인연이면 됐다.

* * *

황후는 빠르게 행동했다.

고작 이 정도로 재차 만남을 가지는 건 내가 이상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나를 만나기 귀찮았던 건지 서신으로 전달됐다.

“황후 말고 관직으로 나갔어도 대성했겠는데.”

재상까지 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 일 처리 속도다.

수도 외곽의 작은 가게의 주인.

너무 큰일에는 끼어들지 못했지만, 그건 순전히 연줄이 없었던 탓.

심지어 저 한 놈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황후의 장인 목록을 얻었다…….”

도대체 나를 얼마나 물 먹이고 싶었던 거지.

‘에효.’

빠른 답에는 빠른 답으로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

나도 빠른 회신을 보내었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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