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렇다.
나는 팔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쏟아부은 돈을 잊을 생각도 없었다!
“고, 공녀님. 이게 무슨, 무슨 일로 저를 이렇게.”
일단 무릎부터 꿇리라고 했더니 내 요구대로 에반스 경이 척척 자세를 잡아 놓은 상태였다.
나는 자세를 낮췄다.
드레스 입고 쪼그려 앉으면 에반스 경이 또 ‘공녀님―!’ 하고 부르짖을 것 같아서 승마복 입고 왔다.
‘근데 드레스보다 불편하다.’
끙. 그래도 이미 입고 왔으니 어쩔 수 없지.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저 남자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거짓말을 할 거였으면 끝까지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초수를 상대하고 있다니.
‘재미도 없네.’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겠다. 체자레에게 오늘 밤은 편하게 자라고 편지도 전해 줘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압박 대신 본론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정말 모르겠어?”
“예, 예?”
“네가 만든 물건, 가짜던데.”
쩌적 굳은 눈을 보는데, 문득 웃음이 났다.
나는 황후에게 공들일 가치도 없는, 숙적이라는 위기감조차 주지 않는 존재구나.
* * *
이번에 남자가 요구받은 모조품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완벽하게 진짜가 아니라 모조품의 티가 나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미리 입을 맞춘 감정사 정도나 판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였다.
그러나 공녀의 웃음기 어린 녹색 눈을 마주한 순간, 남자는 제 실력을 믿으면서도 속절없이 불안해졌다.
“네가 만든 물건, 가짜던데.”
잠깐 숨이 멎어 한 템포 늦게 원성을 터뜨리는 실수를 했다.
“말도 안 됩니다! 제가 변두리 장인이라고 무시하시는 것인지요? 그래도 저도 장인의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잠시 침묵한 공녀가 고요히 웃었다.
“그래, 다음 말은 재판장 가서 떠들도록 해.”
“저, 저는―!”
“그전에 먼저 우리 집에 가 있자.”
몸을 일으킨 샤를리즈는 에반스에게 눈짓했다.
다 잃게 된 놈이 혹여 미친 짓을 벌일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에반스가 남자를 빠르게 제압했다.
“뭐, 편안하지는 않겠지만 따질 형편은 아니잖아?”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공녀님이시라고 해도 무고한 사람을 이렇게 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공작 각하께서는 공녀님이 이렇게 사람을…….”
“아.”
그리 크지 않은 울림이 귀에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박혀 들었다.
공녀가 사납게 웃었다.
남자는 저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늦어도 한참 늦은 깨달음이었다.
* * *
그 시각.
“……공녀가 갑자기 그 남자를 끌고 갔다고?”
카타리나가 미간을 좁혔다.
“예, 모조품을 눈치챘습니다.”
공녀는 정말 소문 속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저번에 나눈 대화가 없었다면 노아는 지금 내심 많이 놀랐을 터다.
“공작저에 잠입할 수 있겠니?”
“그건…….”
노아가 말끝을 흐렸다.
리엔타 공작저는 그 오랜 역사에도 내부 상세 지도가 유출되지 않은 요충지였다.
거대한 본관과 별관 세 채로 이루어진 저택은 저택보다는 차라리 성에 가까운 위용을 자랑했다.
감옥은 분명 존재할 테지만, 저 어디에 있을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감옥에 가장 최근 수감되었을 사내는 죽기 전 이런 소리나 지껄였다.
[저, 전혀 모르겠습니다. 검은 천을 덮어쓰고 정신을 차리니 그곳이었습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래, 네겐 어려운 일이겠지……. 내가 많은 걸 바랐구나.”
동요하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할 수 있다는 대책 없이 호기로운 말이 나오기 전, 카타리나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실패하면 대가가 너무 크지. 내가 공녀를 만나 봐야겠어.”
이튿날이 그 남자를 처리하기로 예정한 날이었다.
‘당일에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아니, 찾아올 것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마를 짚은 손 아래 적안이 맹렬히 빛났다.
* * *
이 이후로는 황후가 나를 부른 이후에나 착수할 수 있다.
나는 이 잠시의 여유로움을 생산적으로 쓰기로 했다.
‘내 노선을 정했다.’
대공의 아는 사람 1이 되겠다!
가끔 만나면 반갑고 자주 만나면 귀찮은 정도의 사이.
……그렇다.
지금은 저 정도도 아니다.
저번에 그놈 족치러 가는 길에 책방에서 구매한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렸다.
“샤를.”
밑줄까지 열심히 치며 공부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늦었나 보다.
공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왔다.
“웬일로 식사 시간 전에 와서 기다리지 않고. 어디 아픈 게냐?”
하는 일 없이 식량만 축내는 식충이는 진실을 읊었다.
“공부를 하느라 식사 시간이 된 걸 몰랐습니다.”
“공부? 학술원을 졸업하고 책 한 번 안 보더니?”
순진하게 사람 뼈를 때린 공작이 슬쩍 고개를 빼어 내 어깨 너머를 보았다.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나는 책을 접어 표지를 보여 줬다.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그 사람의 유일무이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예.”
꼭 그렇게 되고 싶은 염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무이……? 뉘앙스가…….”
무어라 혼자 중얼거리던 공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친구라니 누구……. 아, 이클리스 백작 영애를 말하는 게냐?”
“아니요.”
‘……로제타는 저를 싫어한답니다.’
증인까지 해 주겠다고 했는데 나를 하나도 안 믿어요…….
씁쓸해서 그런지 배가 고파 와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누구인데? 내가 모르는 네 인간관계라니.”
보통 이런 시점에서 부모들은 쓸쓸해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던데 공작은 기대감 어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에 부응하고자 나도 재깍 대답했다.
“모르는 관계 아닙니다.”
“……어?”
‘왜 안 오시지.’
얼른 밥 먹으러 가려다 보니 공작이 안 따라오는 것도 몰랐다.
돌아보았다가 양 주먹을 꾹 쥐고 있던 고개를 갸웃하는 자세 그대로 굳은 공작을 발견했다.
“……아버지?”
“그, 그래. 샤를.”
“저녁 먹으러 가요.”
“그, 그래. 샤를.”
‘어라, 방금 똑같은 말씀하셨던 거 같은데?’
뭐,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넘기며 나는 공작의 팔꿈치를 잡고 다이닝 룸을 향해 척척 이끌었다.
식사 시간 동안 공작은 하라는 식사는 하지 않고 가쁘게 말만 했다.
“샤를, 너무 공부하면 몸에 안 좋단다. 학술원을 졸업한 지 고작 5년밖에 안 되지 않았니.”
“그때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다시 공부를 한다니, 이 아비는 네가 무리할까 봐 걱정이 된다.”
“공부 잘하는 딸보다는 건강한 딸이 더 좋구나. 아, 아니. 물론 샤를 네가 수석을 차지하고 월반을 했을 때 무척 기뻤다!”
“그렇다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건 아니란다.”
‘흠.’
뒤늦게 배가 고파졌는지 열심히 말하면서도 주섬주섬 빵을 주워 먹는 공작을 보며 나는 차를 홀짝였다.
‘저번 생이 그 모양이었으니 그때 몫까지 쳐 준 건가.’
대부분의 자식들이 바라 마지않는 부모의 대사를 한 번에 쫘르륵 하시다니.
역시, 이번 생에 나는 부모 복만큼은 타고난 것 같다.
‘자연사하실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대공의 아는 사람 1이 꼭 될게요.’
다시금 결연하게 다짐하며 투지를 다진,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 * *
공부하기 싫어 침대를 굴러다니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은 덕분에 나는 빠르게 독파했다.
이제 체득할 순간이 도래했다!
법칙 첫 번째.
‘우연을 노려라.’
그럼, 그럼.
일단은 만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때마침 황후가 나를 황성으로 부른 덕택에 가능했다.
[마침 엘루이든 대공도 황성에 있을 테니 함께 차를 마시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되었어. 하필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라서 말이지.]
나는 황후의 말을 들었을 때처럼 눈을 빛냈다.
‘절호의 기회다.’
대공이 황제를 알현하고 나면 반드시 찾는 장소가 있다.
푸른 장미의 정원.
추억이 깃든 장소를 나로 더럽히기는 아무래도 미안했다.
그래서 정원을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을 얼쩡거리는 중이었다.
“잘 꾸며 놨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도착하는 정원의 이름을 알려 주듯 곳곳에 푸른 장미가 만발했다.
쪼그려 앉기까지 해서 장미꽃 향기를 맡던 사샤가 문득 떠올라서였을까.
꽃보다는 열매를 선호했던 나는 쇄골 정도 높이에 있는 장미에 코를 묻었다.
풍기는 꽃향기는 강렬했지만, 의외로 역하지 않았다.
‘이것도 생각보다 괜찮네.’
의외로, 생각보다 괜찮은 게 많았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되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음성이 원하지 않은 순간 불쑥 귓가를 울렸다.
“공녀?”
이 세계에서 내가 목도한 첫 번째 의외가 그곳에 있었다.
그저 다 짐작하고 있을 사실, 친절하게 서술하지 않았을 뿐이지 칼릭스 엘루이든은 샤를리즈 리엔타를 분명 싫어하고 있을 거라고.
그 책의 독자 그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할 테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었던 모든 기로에서 그러지 않은 사람.
미래를 보기 위해 계속 눈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당신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우연도 있네요.”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이 김에 함께 산책하실래요?”
칼릭스는 대답이 없었다.
정교하게 계산한 그림보다 완벽한 생김새의 남자가 무표정하게 서 있는 모습은 느껴 본 적 없는 새로운 종류의 감상을 선사했다.
나는 금세 쪼그라들었다.
‘……너무 급발진했나.’
여기서 칼릭스가 “햇볕이 뜨거워서 산책할 생각은 없어서 미안해. 즐거운 시간 보내기를 바라, 공녀.” 이렇게 대꾸한다면 나는 이제 바느질을 배워 볼 참이다.
‘이불을 꿰매야 할 테니까!’
역시 너무 건너뛴 것 같다.
뒤늦게나마 수습하고자 입을 더듬더듬 열었다.
“역시 혼…….”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