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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32) (32/232)

32화

“네!”

냉랭한 느낌의 얼굴에 사르르 미소가 덧그려지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아 시야를 봉인했다.

‘이건 취향을 넘어서는 외모다.’

보면 큰일 날 게 분명하다고 내 촉이 윙윙 경고음을 울려 댔다.

“햇빛이 뜨거워.”

눈치채지 못한 사이 느릿한 음성이 거리를 좁혀 왔다.

“사용인들이 양산을 잊었나?”

“그건 아닙니다. 제가 불편해서요.”

몸 어디에 매달아서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 손 하나 믿고 다녀야 하는 게 아직은 익숙하지 않다.

“마침 다행이야.”

‘나를 만난 게 다행은 아닐 테고 말입니다……?’

어리둥절해져 올려다본 때, 머리 위에 그늘이 졌다.

“수하가 잔걱정이 많은 편이라. 혼자 갈 거면 이거라도 들고 가라더군.”

낮게 웃음을 흘린 칼릭스가 양산을 펼쳐 내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빠릿빠릿하게 대처했다.

“제가 들겠습니다.”

“공녀는 양산이 불편하다고 했잖아. 내가 억지 부리는 거니 내가 드는 게 맞지.”

‘참…….’

전직 거머리한테도 이런 배려를 보이다니.

대공이 내 아들이었으면 이렇게 착한 애가 내 새끼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을…….

“…….”

갑자기 숙연해졌다.

잠시 잊고 있던 난이도가 심금을 후려갈겼다.

‘1년 전에라도 전생 기억해서 다행이긴 한데……. 다행이긴 한데요.’

속으로 눈물을 훔치며 자동 반사로 걷던 중, 아까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 다시금 싹을 틔웠다.

‘그런데 왜 수락한 거지?’

슬쩍 훔쳐본 옆얼굴에서는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뭐, 이유가 있겠지.’

필요하면 본인이 말할 테니 나는 내가 할 말이나 하기로 했다.

“전하, 제 마차로 가시겠어요?”

가로로 긴 눈매가 나를 향했다. 나는 마차가 있을 방향을 검지 끝으로 가리키며 마차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별로 안 멀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나?”

“예.”

그러니까 산책하자고 했겠죠?

대답 안 하고 뭐 하냐며 멀뚱멀뚱 보고 있는데, 대공이 얕은 웃음을 흘렸다.

“싫으십니까?”

“아니, 좋아.”

눈웃음 살살 치며 말했으면 윽, 했을 텐데.

단정한 얼굴로 하는 말에 위기감이 찾아왔지만 열심히 단련한 심장은 잘 튕겨 냈다.

“마차까지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묘한 시선이 와 닿는 순간은 짧았고, 익숙한 울림이 금세 이어졌다.

“고마워, 공녀.”

* * *

‘아가씨는 언제쯤 오시려나.’

마차에 등을 기댄 채 에반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반반한 얼굴의 그는 놀랍지도 않게도 귀족 출신이다.

핏대를 세우며 귀족파를 비난하는 부친이 질려 중립으로 유명한 리엔타에 자의로 소속됐다.

때문에 그의 친우들은 최근 아가씨에 관해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다.

무려 선황자를 발견하고 구해 내기까지 하신 데다, 최근 황후와 만남을 몇 번 가지기도 한 까닭이다.

세간에서는 여전히 공녀가 대공을 애모해한다는 말이 주류지만, 에반스는 알았다.

아가씨는 정말로 대공에게 먼지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녀의 기사 된 도리로 이곳저곳 졸졸 따라다닌 탓에 대공을 바라보는 샤를리즈의 눈빛만큼은 어쩌면 공작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사람이 바로 에반스 그였다.

“허윽!”

잠시 그 눈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오들오들 떤 에반스는 서둘러 잔상을 털어 냈다.

허겁지겁 고개를 젓고 있던 때, 저 멀리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아가씨?’

에반스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아가씨……!’

* * *

의외로 멀었다.

때문에 가깝다고 입방정을 먼저 떤 죄로 식은땀을 흘리던 나는 마차 근처에 당도하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숨을 돌리는데, 웬 시선이 느껴졌다.

‘뭐냐.’

에반스 경이었다.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눈치껏 마차 문을 열었다.

“고마워, 경.”

“아닙, 큽, 아닙니다.”

먼지를 많이 먹었나 보다.

혹시 몰라 가장 큰 마차를 타고 와서 다행이었다.

무릎이 스치는 극악의 환경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아, 그렇다고 좋았다는 건 아니다.

밀폐된 공간에 둘이 있는 건 너무나도 어색했다!

‘에반스 경도 들어오라고 하면 안 되려나.’

안 되겠지. 응, 안 되지…….

법칙 두 번째.

상대가 원하는 ‘그’ 말을 상대방이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해라.

얼마나 중요하면 저렇게 강조 표시까지 했을까.

“오늘 황후 폐하를 알현했습니다.”

정답 같다.

칼릭스가 오묘한 눈을 했다.

“저희 상단이 모조품을 판다는 명목으로 평판을 추락시키려던 의도로 생각됩니다.”

나는 가까운 과거를 반추했다.

“그래서 그 가짜를 만드는 작자를 생포해 저택에 가뒀습니다. 그랬더니 황후 폐하께서…….”

[공녀가 굳이 힘들일 것 없어. 내가 처리하겠네.]

[그럼 재판이 빠르게 열리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재판?]

[감히 저를 건드렸는데 순순히 둘 수는 없지요. 다시는 같은 일로 먹고 살 수 없도록 본보기를 보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공녀. 귀족이 평민에게 농락당했다는 것 자체로 말이 많이 나올 걸세. 어쩌면 공녀의 안목을 의심하는 자가 나올 수도 있고 말이야.]

[애초에 제게 공녀라는 지위 말고 잃을 게 있었던가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일이 저렇게 흐르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황후도 마찬가지일 터다.

‘저 일로 까 내릴 수도 있지만, 샤를리즈 리엔타 심미안 대단하다는 말이 더 돌걸.’

[면전에서 못 하고 뒤에서나 수군대는 이들의 말 따위, 제가 경청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같은 수법은 사용하지 않겠어.”

그럴 거다.

그러라고 한 말들이었으니까.

내리뜬 눈꺼풀이 올라가고, 그 아래 시리도록 선명한 벽안이 나를 향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수습하는 정도에 불과할 거라는 건 공녀도 알 텐데.”

“그래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황후는 상대에게 저밖에 없어야 안심하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내가 잡을 손이 황후밖에 없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길게 고민할 것 없다.

이미 본 것이 있지 않던가.

‘법칙 세 번째.’

상대에게 매사 솔직해라.

“저를 매정하게 차 버리십시오. 제가 지긋지긋하다는 소문을 내시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술술 불려던 순간이었다.

“……하.”

칼릭스가 오른손으로 입매를 가렸다.

“어떡하지. 고마운 사람에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저는 괜찮은데요.”

“얕잡아 볼 시선들을 공녀가 굳이 감내할 필요는 없어.”

“저는 그게 더 편한데.”

서로 말은 하는데 대화가 영 이어지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 제안하신 그 방안, 공녀는 아예 생각이 없는 건가?”

드러난 입매는 미소 짓고 있었다.

“약혼 말이야.”

나는 이를 꽉 깨물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던 말을 막았다.

‘미치셨습니까?’

“……그건 저만 좋고, 대공 전하에게는 이득이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내가 말한 게 역시 좋지 않겠느냐는 눈빛을 발사했다.

대공도 수긍이 가는지 다시금 손으로 입매를 가려 집중하는 자세를 취했다.

“싫은 사람이랑 엮이면 많이 힘드시기도 할 테고요.”

“왜 내가 공녀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그야…….”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말문이 막히는 드문 경험을 나는 하고 있다.

“싫어하지 않아.”

“예에, 감사합니다?”

쭈뼛쭈뼛 대답하자 칼릭스가 손마디에 턱을 괴었다.

“정말인데.”

지그시 닿아 오는 빤한 시선이 관찰과는 느낌이 달라 신기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쩐지 그 눈을 보는 게 어려워졌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건, 피하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 이거……?’

깨닫기 전, 그가 입술로만 미소 지었다.

그제야 느껴진 묘한 탈력감으로 나는 내가 어떤 것을 느꼈는지 눈치챘다.

혼자만 느낀 긴장감.

이보다 비참할 수가!

이마를 속으로 빡빡 때려 대고 있는데, 칼릭스가 제 왼쪽 손등을 오른 검지로 톡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그리로 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

무심결에 마주친 얼굴이 굉장했다.

“그리고 물론 나도 이득이 있고.”

멍하니 감탄하다가 깨달았다.

‘그럼 나만 이득 없는……!’

……그동안 대공 졸졸 쫓아다니느라 나만 이득이었을 테니, 이런 양심 출타한 생각은 얼른 지워 버렸다.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줘.”

깔끔하게 물러나는 태도는 대공에게 저 건이 그 정도 의미라는 걸 알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내가 괜히 확대 해석한 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괜찮은 대안을.

* * *

……하지만 나보다도 더 확대 해석을 하는 사람이 여기 눈앞에 있다.

오물오물 맛있게 식사를 하는 공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 공작 살리려고 하는 짓인데 한 달 사이 세 번 기절시키는 건…….’

“식사가 입에 맞지 않느냐?”

“아닙니다. 아버지 드시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서요.”

걱정으로 말입니다.

“원, 녀석도.”

공작이 내가 좋아하는 흰 빵을 내 접시 위에 올려 줬다.

그걸 잠깐 내려다보다가 나는 묵묵히 빵을 먹었다.

“많이 드세요.”

“너도 많이 먹거라, 샤를.”

생각 없이 입에 들어오는 대로 먹다 보니 과식하고 말았다.

괜찮았다.

오늘은 밤 운동을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 * *

높게 자란 나무가 빽빽하다.

죽음의 순간, 하늘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은 마치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처박힐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흐릿한 시야로 그는 웃었다.

버림받는 것도 모자라 모시던 주군에게 치명상을 입고 우는 건 그 얼마나 비참한 마지막인가.

[그동안 수고했단다.]

상냥한 음성은 그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늘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절박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네 쓸모가 대단하지는 않더구나.]

다정한 건 말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척하고 싶어도 더는 그럴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해 버려서.

긴 세월 헌신했어도 그는 단번에 죽여 뒤처리하는 것조차 귀찮은 정도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풀을 밟는 소리가 기민한 청각에 잡혔다.

하지만 노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

예상보다 일찍 다가온 죽음이 차라리 기꺼웠다.

“눈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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