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여전하다고 생각한 감각은 둔해져 있었다.
무시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공녀?”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말할 힘은 있나 보네. 그럼 들을 힘도 있겠지.”
샤를리즈가 눈짓했다.
그 옆에 있던 사내가 다가와 지혈제를 뿌렸다. 흰 가루가 몸에 닿자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강렬한 의문이 기어코 목소리를 토해 내게 만들었다.
“왜, 저를.”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말하는, 죽어 가는 상대를 보면서도 특유의 열없는 눈은 여전했다.
저 얼굴만 보자면 지혈제가 아니라 고통만 느끼도록 구현된 약이라는 쪽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잊지 마. 이대로라면 그대로 죽었을 너를 구한 게 나야.”
“어째서…….”
“어째서겠어.”
겨울의 숲속에서 발견한 녹음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네 가치를 알아봤다고 했잖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기는 아까워서 말이야.”
혹시 내가 버려지는 상황을 안배한 게 바로 당신이느냐는 의구심은 들지도 않았다.
그의 주군이 바로 황후였다.
설령 그렇게 판을 짰다고 해도, 그를 처분한 건 황후의 의지다.
고귀한 가문이 사용하는 약은 같은 이름이 붙어 있어도 다른 걸까.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노아는 볼 안쪽 살을 세게 짓씹는 것으로 길게 말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저는 황후 폐하의 사람입니다. 공녀님이 곤경에 처하도록 뒤에서 전달한 게 저고…….”
“알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 없겠군.”
그는 상체를 일으켜 앉고, 공녀는 자세를 낮춘 탓에 직선으로 닿아 온 시선이 유독 선명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가려졌다고는 해도 어째서 그동안 모를 수 있었을까.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면 그건 그저 과거가 될 뿐이지. 그거라면 감안할 수 있어.”
“…….”
“내 사람이 돼.”
최악의 평판을 가진 여자가 하는 그 말은 이상하게도 더없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그 말을 믿고 싶은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였던가.
“……정신을 잃었습니다.”
상태를 살핀 에반스가 무겁게 말했다.
“마차에 옮겨 주겠나?”
“예, 아가씨.”
에반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샤를리즈는 생각했다.
‘춥다.’
원작에서도 황후가 결심한 직후 바로 처분했으니 오늘일 거라고 예상했고, 적중했다.
‘죽이지도 않고, 너무하네.’
그 덕택에 주운 입장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묵묵히 걸으면서 샤를리즈는 노아에 관한 정보를 복기했다.
기사가 되지 못한 기사, 노아.
원작에서 황후의 손바닥에서 철저하게 놀아나기만 하다 버려진 사람의 이름이다.
변신의 귀재. 매몰된 정보의 수확꾼.
원작에서는 일 년 내내 겨울인 숲에 버려져 결국 죽었기 때문에 황후에게서 완벽하게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다.
‘인생은 원래 그렇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대로라면 어차피 정보는 다 망가져 가는 원작에나 의지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도 아니면 끽해야 대공에게서나 정보를 주워 먹을 수 있거나.
그래서 샤를리즈는 그녀가 직접 본 그 사람의 눈을 믿기로 했다.
‘너, 내 사람이 돼라!’
“…….”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 얼굴은 시뻘건 불고구마이리라는 사실을…….’
기사의 동경심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라 그런 식으로 접근하기는 했지만 일개 소시민인 탓이다.
‘기사, 대단한 존재들!’
왜냐하면 에반스도 촉촉한 눈으로 힐끗힐끗 샤를리즈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감화받은 사람들이 있으니 몸부림치는 건 좀 그렇다.
그래서 샤를리즈는 그저 불타오르는 얼굴로 주먹만 꾹 쥐며 감내했다.
‘적성 살려서 정보 길드 차릴 테고, 내 의뢰는 그래도 잘 수락해 주겠지?’
그러니까, 깨어나자마자 찾아온 노아가 어떤 말을 할지 샤를리즈는 짐작하지 못한 상태였다.
* * *
늦은 밤, 모든 업무가 종료될 시간.
최근 칼릭스에게는 이 시간대의 일정이 하나 생겼다.
꼭 감긴 아이의 눈가에 물기가 비쳤다.
“차라리 불러.”
고작 이틀.
다른 시간을 모두 합쳐도 나흘이 되지 않을 짧은 인연.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녀가 정말로 아무런 수를 쓰지 않은 게 맞을까요?]
그간 축적된 경험은 결국 리반이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아이는 낮에 여느 때와 다름없다.
공녀에게 더는 편지를 부칠 수 없어 의욕을 잃지 않을까 염려한 이들이 무색하게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밝게 웃진 않아도 흐린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혹여 사술이 어둠을 틈타 침입하는 줄로만 알았다.
신전에 거액을 기탁하고 대가로 받은 성물도 아이의 고요한 밤을 지켜 주지 못하자,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깨닫게 됐다.
[사샤 님이 공녀와 지낸 시간은 기껏해야 이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 정도는…….]
“보고 싶다고, 한마디만 해. 그러면 내가 공녀에게 부탁할 테니.”
이 작은 아이는 과연 형의 자식이 맞았다.
때로는 그들의 부친 같은 종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의 형.
이득이라고는 전혀 없을 선택을 기꺼이 해 준 사람.
그래서 아이의 동의 없이 공녀에게 만남을 부탁하는 일은 도리어 상처가 될 것이라고, 칼릭스는 알았다.
[이 보 정진을 위한 일 보 후퇴.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요?]
선황자 시절 자주 찾았던 정원을 향하는 길목에서 그 사람을 발견한 순간, 리반의 말이 불쑥 귓가를 울렸다.
그로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리반이 말하는 대로 공녀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의도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든.
중요한 건 공녀가 사샤를 먼저 보고 싶어 만나러 왔다는 상황으로 합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칼릭스는 이 우연일 리 없는 만남이 차라리 반가웠다.
샤를리즈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었다.
[전하, 제 마차로 가시겠어요?]
그 제안을 선뜻 수락한 것도 결이 같았다.
그랬는데.
[저를 매정하게 차 버리십시오. 제가 지긋지긋하다는 소문을 내시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예상도 못 한 말을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던 것은, 그 처음이 끝이었다.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줘.]
그 말 대신 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왜 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공작의 과보호를 이해했다.
평판. 향하는 시선. 수군거림. 누군가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할 것들.
넘치는 비호 아래에서 세상의 험한 면 따위 모르고 자라 오만한 철부지이기 때문은 아닐 터였다.
그보다는 그 정도 상처쯤은 장미 가시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듯한 쪽에 가깝게 보였으니.
그때 계약 결혼을 제의했던 건, 순전히 아이가 받을 상처 때문만을 고려한 결과는 아니었다.
사샤를 구해 줬다. 위로해 줬다. 아이가 이렇게 보고 싶어 할 만큼 순수한 애정을 선사했다.
살면서 대가 없는 호의를 받아 본 적 없을 자그마한 아이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샤를리즈 본인이 아무렇지 않게 치부한 수군거림을, 그녀가 듣게 하고 싶지 않아졌다.
* * *
이튿날.
오랜만에 늦잠 좀 자 보려는데 문밖을 알짱거리는 기척 때문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이놈의 직업병은 몸이 바뀌어도 여전했다.
“할 말 있으면 그만 하고 들어와.”
다시 잘 생각이라 세수하기 전에 불렀는데 아뿔싸 노아였다.
‘제, 젠장.’
황후는 매사 빈틈없다.
언제나 윤기 나는 머리카락, 입술에 바른 색조, 과하지 않은 눈 화장까지.
잘 때도 실크 가운 입고 잘 것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나는 하얀색 면 잠옷을 입은 채로 방금 일어나 눈 부은 채로 맞이하고 있다.
‘역시 이런 사람이 하는 의뢰 못 받겠다고 말하려는 건가.’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만.
“공녀님.”
잠시 호흡을 고른 노아가 말을 이어 갔다.
“저는 황후 폐하의 개로 7년을 살았습니다. 제 능력의 부족함을 참아 주셨던 황후 폐하께서는 저를 버리셨고요.”
갑자기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뭐지.’
그래서 나도 했다.
“나는 샤를리즈 리엔타. 스물한 살이 됐고, 그 이외의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하지.”
“…….”
노아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너무 생략했나.’
본인은 열심히 말해 줬는데 상대가 이러면 어이없을 만도 하다.
별수 없이 다시 소개를 제대로 하려는데, 노아가 더듬더듬 말했다.
“제가, 저는 저 정도입니다. 제가 황후 폐하 아래 그저 오래 있었을 뿐인데, 그로 인해 오해하시는 듯하여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래 있는 것도 능력이야.”
황후가 어디 능력 없는 사람 오래 둘 성격이던가.
“언젠가 꼭 후회하실 듯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뒤통수친다는 선언을?’
얕은 충격에 빠져 있는데, 노아가 덧붙였다.
“저는 공녀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그냥 말투가 특색 있는 거였다.
“그래도 저를 기용하시겠습니까?”
한다고 어제 말했다.
어리둥절했지만 확답을 듣고 싶은가 보다 해서 나도 확답했다.
“그래. 내가 너를 선택했어.”
“네.”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네, 주인님.”
만약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뿜고 말았을 것이다.
일대일 고용 관계가 되고 싶기는 했다. 그야, 그럼 내 정보 아무도 못 살 테니까!
하지만 어렵겠거니 하고 납득했다.
7년을 모신 주군에게 배신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 누구를 모시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공녀인데.
‘어라…….’
아무래도 내 말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노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의 인사를 했다.
“주군은 제가 그리 부를 수 있는 자격이 될 때,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해도 돼.”라든가 “건당 고용인을 생각했는데, 나는.”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낫겠다.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울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노아 말투 특이하다고 할 게 아니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나는 들리지 않게 얕은 숨을 흘렸다.
그에게 안배된 운명은 황후에게서 버림받고 쓸쓸히 죽을 미래다.
약속했다.
‘잘해 줄게.’
두 번 다시 버려지지 않도록, 운명대로 마지막이 외롭고 차갑지 않도록.
내가 네 죽음까지 목격해 주겠다고.
* * *
그렇게 기사단에 막둥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