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35) (35/232)

35화

“그래, 여기 있어.”

이번에도 꿈일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어 기뻤다.

“보고 싶었어요. 많이, 정말로 많이요.”

“나도 그랬는데.”

“그럼 왜….”

항상 의젓한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목소리에 그만 물기가 섞이고 말았다.

“이젠 제가 싫어지신 거예요? 죄송해요. 착한 아이가 될게요. 저, 정말로 착한…….”

“미안해.”

그 말에 가슴이 툭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다가온 손길이 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손길을 아이는 얌전히 받았다.

“네게 상처 준 나를 미워해. 계속, 계속 사과할게.”

“아니, 에요.”

사샤는 이 사람만큼은 절대로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순간 다가온 온기.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알려 준 사람. 떠올리는 것도 닳을까 봐 아까운 사람인데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샤를 님 저한테 잘못한 거 없어요.”

“너도 그래.”

더러운 건 단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을 것 같은 섬세한 손이 다가와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준다.

“네가 내게 그래, 사샤.”

눈물이 날 만큼 따뜻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사샤는 헷갈리지 않게 됐다.

이게 현실일 리 없으니까.

이런 순간이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 리가 없다.

흐윽. 서러운 숨을 삼킨 아이가 더듬더듬 몸을 일으켜 안겼다.

목에 마구 볼을 비비고, 간절함 때문에 껴안은 팔에 자꾸 힘이 실렸다.

“가지 마세요. 계속 같이 있어요.”

그래서 하고 싶어도 계속 계속 참았던 말을 울음과 함께 토해 낼 수 있었다.

“아니면 많이 만나요. 자주 만나요.”

“그래, 그러자.”

샤를리즈가 묵묵하게 아이를 안아 줬다.

강하게 안아 오는 팔 안에서 까무룩 잠이 든 것도 같았다.

그리고 사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샤를 님?”

꿈이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벌떡 일어나 텅 빈 방을 훑는 눈이 다급했다.

그러다 질리는 말을 샤를리즈가 듣지 못한 것에 안도했다.

침구를 꼭 쥐고 있는 손등에 눈물이 툭 떨어진 순간이었다.

“일어났어?”

사샤의 작은 어깨가 크게 동요했다.

‘가짜가 아니었어.’

크게 뜨인 눈이 패닉으로 요동쳤다.

얼마나 귀찮게 안기고, 매달리고, 억지 부렸는지 모두 떠올랐다.

나한테 질리시면 어떡하지.

이제 겨우 다시 만날 수 있게 됐는데.

그만 투정을 부려 버렸다.

아이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그럼 가자.”

아무렇지 않게 사샤를 안아 든 샤를리즈가 복도를 걸었다.

얼떨떨하게 안겨 목에 팔을 두른 사샤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샤, 샤를 님. 내려 주세요.”

“불편해?”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샤는 머뭇거리다가 자그마하게 내뱉었다.

“아니요. 무거우실까 봐.”

“몹시 가벼워. 지금보다 두 배는 더 토실토실해져야 할 텐데.”

혀를 차는 모습은 정말로 버겁지 않은 듯했다.

몸을 지탱하는 온기도 이 순간의 진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는 이제야 생각했다.

정말로 아주, 아주 오랜만에 뵙는 것 같다고.

그래서 용기가 났는지도 몰랐다.

작은 입술을 한참 달싹인 끝에 사샤는 겨우 멀쩡한 소리를 흘려보낼 수 있었다.

“죄송해요. 어제 일이 꿈인 줄 알고 성가시게 해 드렸어요.”

“아니, 좋았어.”

“네?”

“다른 사람하고 마음 터놓고 대화한 적 처음이야.”

그렇게 말한 귀가 조금 불긋하게 달아오르는 모습을 입을 살짝 벌리고 보고 있던 사샤도 따라서 얼굴을 붉혔다.

“저, 저도요.”

“책에서 봤는데 친구는 원래 깊은 대화 하고 그러는 거래.”

“친구요?”

“……나이 많다고 친구 자격부터 탈락이라는 말은 없었는…….”

샤를리즈가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멀거니 듣고만 있던 사샤가 화드득 부인했다.

“아, 아니에요! 친구예요. 맞아요, 친구.”

예측과 벗어나는 대답에 어리둥절해 멍했던 데다 오래 앓아 기운 없던 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친구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럼 그때는…… 뭐. 정확한 단어로 규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 거 없어도 되는 사이니까.”

“네에.”

“앞으로 생각하는 건 숨기지 않고 말할게.”

“네에.”

뭉개진 목소리를 겨우 흘린 사샤는 샤를리즈의 어깨에 아주 살짝 볼을 기댔다.

어느 날 갑자기 샤를 님의 마음이 변해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 한 말과 감정만큼은 진실이었다.

그걸로 됐다.

* * *

오래 누워 있었다고 하더니 사샤는 숟가락을 자꾸 떨어뜨렸다.

내 눈치 보느라 조금 먹는 건가 했는데 원래 양이 이렇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게 있었다!

“숙부님께서 도와주셨어요.”

사샤가 뿌듯한 얼굴로 보여 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손에 들려 있는 건 척 봐도 마법으로 보존한 토끼풀 반지였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싱싱해진 느낌이다…….’

광활한 생명력에 순간 흠칫했을 정도다.

부자 아버지를 두고 있는 지금의 삶보다 전생이 더 뚜렷한 나로서는 손이 떨리는 광경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경탄했다.

“소중하게 간직해 줘서 고마워.”

여기 들어간 돈이 대체 얼마냐.

“아니에요.”

사샤가 수줍게 웃었다.

그러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매번 어렵다.’

다른 사람이 그러면 ‘말해’나 ‘뭐냐’라고 했을 텐데 아기 상대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도무지 안 잡혔다.

끙. 침음을 속으로 흘리던 중, 내가 아는 가장 다정한 말투가 떠올랐다.

“아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냐’는 재빨리 잘라먹었다.

다행히 사샤는 알아서 잘 알아들었는지 긴장된 기색으로 말했다.

“다른 것들도 구경시켜 드려도 될까요? 물론 거절하셔도 돼요! 샤를 님이 보시기에는 초라하실 수 있어서요.”

“하나도 안 초라해.”

진실을 말한 것뿐인데 눈에 띄게 기뻐하는 얼굴이 말갛다.

문득 드는 생각을 나는 놓치지 않고 흘려보냈다.

“사샤, 정말로 다행이야.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말이야.”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 늦지 않게 만나서.

“물론 사샤가 귀엽고 사랑스럽고 눈길이 자꾸 가서,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을 짓게 하는 아이라서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만.”

“샤, 샤를 님.”

별말 안 했는데, 사샤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몸에 열이 많나 보다.’

어쩐지 손을 잡거나 안거나 하면 빨개지더라.

착한 애가 덥다고 말도 못 하고 참았나 보다.

‘……앞으로는 자제해야겠다.’

조금 서글픈 심정이 되어 결심했다.

* * *

사샤 먹이면서 나도 같이 먹었는데,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향기였다.

공작가의 요리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대공가의 식사는 너무 맛있었다.

“공녀, 이것도 그대 입맛에 맞을 것 같아.”

“이건 어때?”

“사샤가 브로콜리도 잘 먹더군.”

칼릭스가 권하는 요리는 모두 환상적이었다.

‘공작도 저녁 먹었으려나.’

이거 공작도 먹었으면 볼을 햄스터처럼 부푼 채로 식사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읽은 책의 거의 마지막 장에 이런 법칙도 있었다.

법칙 98. 양가 부모와 동석해 식사하는 시간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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