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37) (37/232)

37화

“그러면 안 돼!”

아이를 내려놓으려는데, 내 목깃을 꾹 쥐고 놓지를 않았다.

‘컥.’

숨이 막혔다.

얼른 안아 올리자 아이는 언제 암살을 시도했냐는 듯 얌전히 내 품에 안겼다.

“아, 아이가 공녀님이, 좋, 좋나 봅니다.”

원장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얼굴을 보지 못하셨나요?’

험악해서 어른들도 슬슬 피하는 인상이랍니다.

나는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대답하려다 말았다.

‘옷 때문이겠지.’

모친이 입었을 드레스가 떠올랐던 게 아닐까 싶다.

“제가 떼어 놓겠습니다.”

“으우, 으우우!”

아이가 연신 도리질했다.

‘……음?’

“이 아이, 말을 못 하나?”

“그, 그것이.”

왜 교사가 계속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귀족이 직접 후원하는 곳이 완벽하지 않다면 그게 바로 제 체면 상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나이가 네 살가량으로 추정돼 어리기도 하고, 발음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말이 느린 편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틀린 추측이다.

‘충격 때문인가.’

“후에.”

놀랐는지 아이가 눈물범벅인 얼굴에서 또 눈물을 쏟아 냈다.

‘……그래, 많이 슬펐구나.’

“이 아이,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예?!”

“부디 자비를―!”

어, 방금 진심이 튀어나온 것 같은데.

“내가 지원하는 곳에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돼.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얼떨떨한 얼굴의 두 천사들을 바라봤다.

“다쳤는데 말하진 않은 아이들은 없는지 내일 의사를 보내 확인하고, 배우고 싶은 분야도 지원할 생각이야.”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그렇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럼 다음에.” 하고 돌아섰다.

얼결에 길게 대화하는 까탈스러운 상관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뒤늦은 노력은 무색했다.

뒤로 “감사합니다, 공녀님!” 하고 어서 썩 꺼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고 있습니다…….’

토끼 귀를 쪽쪽 빨며 나를 올려다보는 무구한 눈이 악덕 상관 짓을 한 나를 위로하듯 올려다봤다.

* * *

나는 그길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풀썩.

공작이 소중하게 들고 있던 토끼풀 화관이 추락했다.

“샤, 샤르을―!”

공작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서둘러 반박했다.

“제 애도 아니고, 황족도 아니고, 납치도 아닙니다!”

“끄흑!”

숨을 헐떡인 공작이 이번에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허겁지겁 아래를 쳐다봤다.

“틈틈이 만든 화관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공작이 참담하게 뇌까렸다.

‘휴.’

나는 같이 쪼그려 앉아 공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 부분만 수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품에 아이를 안은 채로 나는 화관을 매만졌다.

튀어나온 부분이 쏙 들어갔지만, 애초에 얼기설기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는 무리였다.

‘그래도 저 얼굴이니까 이 화관도 빛나겠다.’

슬쩍 머리에 올려 주려는데, 공작이 화관을 붙든 손에서 힘을 안 뺀다.

‘어?’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려던 찰나였다.

“화관은 아직 아무도 만들어 주지 않은 게지?”

공작이 뿌듯하게 웃었다.

사샤 일행과 토끼풀 주물렀다는 이야기를 한 게 벌써 일주일도 더 전인데…….

‘그동안 만들고 계셨던 건가.’

“다음에는 진짜 티아라를 선물하마.”

“괜찮습니다.”

나는 재깍 거절했다.

공작이 상처받은 얼굴 그대로 쩌적 굳었다.

‘안 그래도 털린 주머니 또 털 수는 없지.’

그리고.

“어차피 이보다 기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공작이 서서히 미소 지었다.

* * *#

“로제타. 내가 네 신경을 거스른 적이 있었던 거니?”

호손 자작 부인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미안하단다. 그래도 네가 동의했던 일을 어떻게 우리에게……. 흐윽.”

“부인! 부인!”

호손 자작이 휘청거리는 부인을 부축하며 입술을 꾹 물었다.

“로제타. 정말 너무하구나. 네가 세파에 상처받지 않도록 우리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정녕 모르는 게냐?”

“우리가 너를 기만했다며 황성에 거짓을 고하다니 두렵지도 않은 거니?”

감색의 간소한 드레스를 입은 로제타는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사무관이 말했다.

“이클리스 백작 영애. 발언하십시오.”

“저건 제 서명이 아니에요.”

“로제타!”

“귀부인, 백작 영애께서 발언하실 시간입니다.”

실무관이 몹시도 사무적인 투로 호손 자작 부인을 제지했다.

그는 어서 연차가 쌓여 실무에서 벗어나기만 소망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영애가 직접 날인한 서명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쉽게도 없어요. 그때 저는 침실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지만, 호손 자작에게 매수된 전담 시녀는 제가 직접 서명했다고 말했으니까요.”

“매수라니!”

“하지만 증인은 있어요.”

사람만 바뀔 뿐 일은 반복적이었다. 해이해져 증빙 서류를 사전에 확인하지 않은 지 제법 된 실무관은 이제야 서류의 다음 장을 넘겼다.

“증인은 들어오십…… 시…… 오.”

점차 커진 실무관의 눈이 경악하며 문을 향했다.

“리, 리…….”

“공녀……?”

경악한 이들 사이에서, 로제타가 날카롭게 미소 지었다.

“샤를리즈 리엔타 공녀님이세요.”

* * *

나는 뻐근한 턱을 문질렀다.

‘내 몫은 했다…….’

딱딱한 분위기에서 말하려니 혀 씹으면 어떡하나 걱정됐는데, 어찌어찌 입은 잘 털었다.

“로제타는 잘하고 있으려나.”

홀랑 집 가기는 뭐해서, 엉거주춤 산책하듯 걷던 중이었다.

“리엔타 공녀님 아니십니까?”

바나첼 후작이 놀란 눈으로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도 뵙는군요.”

‘뭐야.’

테오도르 바나첼의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원작에 나왔던 적 없다.

“예. 후작께서는 어쩐 일로?”

“저도 일이 있어서 왔지요.”

말할 생각 없다면 귀찮게 대화 끌고 갈 이유도 없었다.

대강 예의 차리고 대화 끝내려는데, 테오도르가 또 말을 걸었다.

“곧 사냥제가 다가오다 보니 다들 일이 바빠 제가 왔습니다.”

그러며 손에 든 서류를 슬쩍 흔든다. 꽤나 두꺼웠다.

황성의 사무관은 역시 대충 일하진 못하는 직업인가 보다.

“마침 잘 되었습니다. 곧 서신이 갈 테지만, 미리 말씀드릴 수 있어서요.”

테오도르가 온유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선황자 전하가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는 데에 큰 공헌을 하신 공녀님에게 따로 하사하신 물건이 있습니다. 곧 있을 신년제 무도회에서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꽤 남긴 했지만 벌써 가기 싫은데…….

“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또.”

테오도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멀어졌다.

‘생각났다.’

사샤에게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니었다. 바이에르에도…….

그때,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님?”

로제타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봤다.

“왜 여기 계세요?”

“영애를 기다렸지.”

“……저를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타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눈매를 꿈틀거리고, 입 끝에 힘을 꽉 주고, 목울대를 울렁이는 게…….

‘……괜히 기다렸나?’

화를 꾹 참는 사람 같았다!

금세 쪼그라들어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로제타가 말했다.

“후견 기간은 바로 종료되었어요. 감사해요. 공녀님 덕분이에요.”

“영애가 잘 준비한 덕이지.”

“그것도 맞고요. 다음에 한 번 찾아뵐게요.”

나도 안다.

저 말은 안 찾아오겠다는 뜻이다.

능숙한 사회인이라면 같이 시크하게 고개를 끄덕여야 할 테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서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꼭 와.”

와서 나한테 내 소문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해 주기야.

로제타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이미 그러겠다고 말씀드렸답니다.”하고 대답했다.

* * *

아침부터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벌써 한 건가?”

발신인을 보고 떨떠름하게 확인한 내용은 더 이상한 탓이었다.

“원작에서는 엄청 나중이었는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바이에르 공작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이거 위조 아니야?”

앞뒤로 샥샥 돌리고, 불에 비춰도 보았지만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바이에르 공작이 이러는 건 이상한데…….’

바이에르 공작은 우연히 마주친 척한 것만으로도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는 수완가다.

하지만 저 방식은 필연적으로 시간이 다소 소요된다.

그렇다면 시간적 여유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더 끌어 봤자 답답하기만 할 테지.’

오늘 당장 가겠다는 회신을 보낸 나는 서둘러 채비했다.

물론 하녀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아기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이다.

“오랜만에 보는 사이에 대화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 미안하게 됐군.”

턱 끝을 넘지 않는 단발이 살짝 흔들렸다.

바이에르 공작은 선대의 유일한 자식이었기 때문에 가주위에 오른 게 아니다.

오라버니와 맞서 가주위를 쟁취해 낸 인물이다.

그래서 저런 성격이니 가능했다는 말을 들을 만큼 차갑고 냉랭한 면모로 유명했다.

‘그런 인물이 조급함을 미처 다 감추지도 못했다…….’

멈춰 선 집사가 옆으로 비켜났다.

공작이 문을 열었다. 그 안은 아이의 장난감이 가득했다.

“이것들을 확인해 주었으면 하네. 저주는 설령 이중 구조라고 해도 시전은 한 명에만 가능하지. 매개로만 남은 것을 찾아주었으면 해. 그대에게 해가 될 일은 없어. 바이에르의 이름으로 확신하지.”

“…….”

“살펴야 하는 물건이 많다는 것을 알아. 필히 커다란 대가를 주겠어.”

내가 대답하지 않자 공작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이러는 게 아니었다.

본 즉시 알았고, 그래서 가지게 된 의문 때문이었다.

‘진짜 가짜 판별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지?’

의아했지만 지금 갖고 있을 의문은 아니었다.

본인의 이름을 딜런이라고 소개한 공작의 보좌가 나섰다.

“의심되는 물품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것들을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동화책, 만년필, 유리잔, 오르골, 그리고 피리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각각 다른 가문으로부터 선물받은 건가?”

내 질문에 딜런이 주저하자 공작이 대신 대답했다.

“공녀의 말이 맞아.”

바이에르 공작이 매개로 의심되는 것들을 파괴하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는 저주가 이중으로 중첩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일 것이다.

‘함부로 파손했다가는 저주가 덧입혀질 텐데 그럼 이미 파손된 매개로는 저주를 풀 수 없어지니까.’

하지만 이건 단일 저주다.

‘이래서 칼릭스가 성물을 늦게 손에 쥐었던 거구나.’

나는 걸음을 뗐다.

“고, 공녀님!”

그리고 다섯 가지 물품들을 모두 밟아 부숴 버렸다.

돌아보며 나는 웃었다.

“단일인지 이중인지 알아낼 필요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쉈을 때 공자의 상태가 더 악화되면 이중이겠지요.”

바이에르 공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입을 악문 딜런은 서둘러 달려 나갔다. 목적지는 루카스의 침실일 것이다.

밀도 높아진 공기 사이로는 작은 소리도 파고들 틈이 없을 듯이 소름 끼치는 적막이 이어졌다.

공작이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가르기 전까지는.

“바이에르를 건드린 것, 앞으로 매분 매초 후회하게 될 터.”

“후회할 일 없습니다.”

나는 공작에게 다가갔다.

공작은 내가 어떻게 하려는지 보겠다는 듯 그저 관조적으로 응시하고만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이런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

“드디어 둘만 남았네요.”

주어졌기 때문에 가진 게 아니라 거머쥔 사람의 눈이 그 순간 일변했다.

* * *

샤를리즈가 사뿐사뿐하게 걸어가 의심되는 매개를 모두 부순 순간.

일라이저는 진심으로 샤를리즈 리엔타를 죽는 것보다 괴롭게 살게 할 작정이었다.

멍청했다. 그간의 악명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었을 터.

루카스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일을 벌여 아예 그르치게 하고 만 제 실책이 참담하게 다가왔다.

“바이에르를 건드린 것, 앞으로 매분 매초 후회하게 될 터.”

선전 포고나 다름없는 선언은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딜런이 급하게 달려가고 다가온 공녀는 조금도 멍청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가는 필요 없습니다. 저도 이 일에 끼게 되었으니까요. 오르골, 누구로부터 받은 겁니까?”

으르렁거리는 목울음을 듣고 있자니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소리 내어 웃고 말았을 것이다.

‘정말로 깜찍하게도, 모두를 속였구나.’

“폴든 백작가였지.”

대공가의 방계 가문이다.

“엘루이든의 소행으로 몰아가려던 것이었군. 마침 루카스가 사샤와 마찰도 있었으니 수월했겠어.”

일라이저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붉은 입술이 비틀렸다.

“그럼 나도 묻지. 단일 저주라는 것까지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었나?”

“보자마자 알았습니다.”

“좋은 능력을 가졌군.”

“저주를 받아야 좋은 능력이겠지요.”

심드렁히 대꾸한 샤를리즈가 부서진 잔해를 흘깃 내려다봤다.

일라이저 역시 시선을 내렸다.

‘엘루이든과 바이에르의 사이를 악화시키려고 감히 내 아들을 건드려.’

“그럼 둘로 좁혀지겠군. 대공가를 배후로 몰 생각으로 일부러 단일 저주로 했으리라는 것.”

만약 샤를리즈를 통해 듣지 못했더라면 일라이저는 이것을 앞으로 제대로 숙이라는 의도의 경고성 조치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남은 하나는 정녕 폴든 백작의 소행이리라는 것. 저번 성축일 때 있던 일로 대공가로부터 흠씬 혼이 났다지 않아. 악의를 갖고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닐 겁니다.”

샤를리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 저주, 속도가 굉장히 빠른 저주입니다. 상태가 차례대로 악화된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순식간에 급변하는 종류여서 말입니다.”

샤를리즈가 매개로 추정되는 물건들을 함부로 파손했을 때도 찌푸려지기만 했을 뿐인 일라이저의 얼굴이 굳었다.

“공자님은 이대로라면 이 저주로 사망하게 되셨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감히 가문을 건드렸다는 것이든 뭐든 공작 각하의 이성이 마비될 거라고 생각했겠죠.”

녹색 눈과 마주친 순간 샤를리즈가 말했다.

“실은 공자님, 많이 아끼시잖아요.”

잠시 멈칫한 게 언제냐는 듯 바이에르 공작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후 뇌까린 어조는 선득했다.

“그래, 감히 내 전부를 건드렸지, 겁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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