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세상에 저렇게 무서운 사람은 이 세계에서는 처음 본다.
‘겁먹은 거, 티 나진 아니겠지?’
특히 음산하게 중얼거릴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매번 잉잉 울고 걸핏하면 기절하는 약골 아버지가 어떻게 무서운 사람들 틈새에서 재상 일까지 했는지. 세상일이란 참 희한하다.
‘그나저나 바이에르 배후는 누구지?’
원래 바이에르 공자 독살은 한참 후에나 나온다.
그런데 벌써 시도했다는 건 사샤의 열이 발현열 때문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일 터다.
바이에르가 사력을 다해 대공가를 방해해 사샤에게만 집중하기 힘들도록 하기 위하여.
‘사샤 열 어서 내려야겠다.’
발현열은 보통 한 달 넘게 가니 그전에 내리는 데 성공하면 열병을 크게 앓았나 보다 하고 말 터다.
발현열이라고 벌써 밝혀지는 건 좋지 않다.
사샤는 신수와 성물 접촉 때문에 시기가 당겨진 모양이지만, 신수는 그럴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물한테 신성력이나 쪽 빨려 왔단 말이다……!’
돌멩이는 저번에 내가 화분에 꾸민 돌로 가장하자고 했더니 토라져 사라져 버렸다.
아마 호수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매일 밤마다 자기한테 기도하는 줄은 알려나.”
에휴, 한숨 쉬던 도중 드디어 마차가 멈췄다.
이틀 연속으로 외출하고, 어제는 머리 싸매며 대공에게 서신까지 보냈는데도 거뜬하다니. 체력 단련은 역시 위대하다.
‘검도 배워 보고 싶긴 한데…….’
망나니한테 검까지 쥐여 주다니 공작이 자식 사랑에 정도를 모른다는 말이 돌지도 모르니 일단은 자제하자.
“아가씨, 가시지요.”
오늘은 에반스 경이 아니라 노아를 데려온 참이었다.
적절하게 변장한 노아는 본래의 얼굴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적하네.’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이라고는 해도 새로운 전시품이 들어온 것도 아니니 사람 몰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름 중 한 번 같은 시간,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근처로 나는 슬금슬금 접근했다.
백작은 전시회는 자고로 조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라 시끄럽게 떠드는 인간들을 싫어하지만, 어차피 나는 이미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상관없다.
“그림 수준이 다 거기서 거기군.”
“최근에 구하신 그림의 수준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작은 종이에 그런 수준의 그림이라니 대단했어. 화가의 얼굴을 꼭 보고 싶은데 서명조차 없으니.”
‘이거 찾느라 고생 좀 했지.’
어차피 백작에게 진정 중요한 건 저 그림이 아닐 테니 위조할까 하다가, 본래 그림을 보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이럴 때는 글자로 쓰인 소설이라는 게 불편해.’
낮게 혀를 찼다.
자연히 대화가 끊기며 생긴 정보 단절에 목표물이 신경 쓰고 있단 게 느껴졌다.
“그래서 찾아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따라 말이 많아.”
“헛, 죄송합니다. 아가씨.”
‘잘하고 있어.’
‘주인님도 의외로 능청스럽게 잘하십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이어 갔다.
배우들은 이 정도 연기 수준으로 자화자찬하는 우리를 비웃을 수도 있겠다만, 우리는 ‘이 사람’보다는 낫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바로 에반스 경이다.
저번에 슬쩍 시켜 봤는데 손에 들고 읽는 것처럼 아주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뭐,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래도 저 수준은 심했다고.
“그 정도의 실력자는 드물 테니 금세 찾을 수 있겠지. 엄지손톱만 한 종이였잖아.”
듣고 있다면 이쯤에서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레이엄 데칸드라고 하오. 우연히 공녀가 얼마나 귀한 그림을 얻었는지 듣게 되었소. 혹, 얼마나 귀한 그림을 얻은 것인지, 이 늙은이에게도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백작이 사람 좋게 웃었다.
나는 백작을 훑어보고는 툭 말했다.
“작은 그림이라서 여기저기 들고 다니기는 어렵겠습니다.”
“내가 미술품에 관심이 워낙 많아서 그렇소만. 이야기해 주는 것도 어렵겠소?”
나는 망설이는 척했다.
백작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너무 쉽게 넘어가면 이상하다.
이 순간, 손자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했을 때 백작이 의아함을 가지면 안 된다.
“아니면 이건 어떻겠는가? 공녀는 이전부터 미술에 조예가 깊었지. 내가 가진 애장품을 보여 주겠네.”
나는 조금 혹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내가 가져갈 물품은 하나고, 백작은 여럿이니 제가 백작의 저택으로 가겠습니다.”
휴, 길고 길었다.
마차에서 나는 땀이 나지도 않은 이마를 손등으로 괜히 닦았다.
사교계의 모든 인사를 존경하는 바다.
* * *
데칸드 백작이 초조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석 달을 기다렸는데, 이 며칠이 왜 이토록 힘든지.
공녀와 대화한 그날 바로 공작저로 찾아가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이 있으니 참아야 했다.
[일주일 후에 찾아뵙죠.]
그 정도는 절대로 기다릴 수가 없었다.
‘금세 죽을 노인네’라고 백작이 말하고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공녀는 사흘로 줄였다.
“가주님! 리엔타의 마차가 대문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백작이 벌떡 일어났다.
대문까지 나가는 건 도가 지나치다.
하지만 그간 그가 미술품 수집을 하며 쌓은 이미지대로라면 현관은 이상하지 않았다.
서둘러 달려간 백작은 마차에서 내리는 인영을 발견했다.
“뜬금없이 아이를 데려와 미안합니다. 이 꼬마가 제 품이 아니면 계속 우는 탓에.”
솔직히 말하건대 샤를리즈의 말은 귓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온몸에 힘이 풀려 버티고 서 있는 것도 고작이었다.
동아줄처럼 쥐고 있던 지팡이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공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반응했다.
“후으.”
눈이 마주친 순간, 일그러지는 얼굴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낡은 인형을 다른 팔로 꼭 껴안고 있던 아이의 눈이 뒤늦게 커졌다.
“하, 하우!”
그 순간 백작은 무너졌다. 허겁지겁 품에 안은 아이만을 놓치지 않을 기세로 껴안았다.
“아가, 내가 너를, 내가 널…….”
이 순간 그는 황제의 시종장을 했던 인물이자 한 가문을 이끄는 수장 같지 않았다.
그저 잃었던 아이를 아주 오랜만에 만난 조부의 얼굴을 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 * *
나는 머쓱하게 차를 마셨다.
극적인 재회를 보고 오늘은 이만 빠져 주겠다고 했는데 백작이 나를 붙잡은 거다.
“이 감사를 어찌 표해야 할지 모르겠소. 원하는 건 없는가?”
그러다 백작이 뒤늦게 웃었다.
“리엔타 공녀에게 필요한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니 말일세.”
그럼요, 있습니다.
“저는…….”
나는 그러며 흘깃 아이를 바라보았다.
‘……너는 왜 아직도 내 품에 안겨 있는 거니.’
“공녀가 후원한 기탁금으로 아이가 수도 보육원에 지낼 수 있었다고 들었소. 공녀의 선의, 절대로 잊지 않겠네.”
내가 아이를 보고 있자 백작이 아이의 몸값을 이쪽에서 갚겠다고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
내 평판을 알 만하다.
그러니 ‘아이가 가족을 찾은 것만으로도 기쁜 일입니다.’ 하며 감동을 주고, 이 꼬맹이가 나를 보고 싶어 하고, 자주 찾아오고, 그 김에 성물을 우연히 보게 되어 저걸 갖고 싶다고 하는 스토리는 불가하다…….
그래서 나는 마차를 타고 오며 정리했던 본 계획대로 성물만 가져가기로 했다.
“외람되지만 백작께서 유물을 수집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유물들을 구경해도 될까요?”
“그걸로 되겠나? 그중 원한다면 몇 개는 가져가도 좋소.”
백작이 도리를 아는 자라 다행이다.
구경만 가능하다고 했다면 백작의 수집품들이 오밤중에 털릴 뻔했다.
나는 이것저것 구경하는 척하며 세 가지를 골랐다.
“얼마든지 선물할 수 있으니 또 방문해도 좋소. 공녀에게는 몹시, 정말로 몹시도 고마워.”
“우, 우으.”
이별을 직감했는지 손을 뻗는 아이에게 나는 다가갔다.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입 밖으로 내었던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
어쩌면 기억하지도 못할 어린 시절의 상처. 하지만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든 남는다.
아픈 과거가 그보다 더 포근한 현재로 늘 뒤덮이기를 기도하겠다고.
내 기운을 나눠 주마.
자그만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 * *
대공저 집무실의 밤에 새벽빛이 일 무렵에 찾아온 지는 제법 됐다.
그 여파로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온 초췌한 안색의 리반이 보고했다.
“성물이 데칸드 백작저로 흘러들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눈가가 살짝 붉어져 나른한 기색으로 칼릭스가 웃었다.
“이제야 리반의 너구리처럼 퀭한 안색이 괜찮아지겠어.”
“너, 너너, 너구…….”
충격으로 말을 더듬던 리반이 반격하려고 했지만, 외모로 흠잡기에는 너무도 대단한 얼굴이었다.
이전에 어떻게 똑같이 밤을 새우는데도 이렇게 다를 수 있겠냐며 투덜거리자 칼릭스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글쎄, 내성이 생긴 걸까.]
똑똑. 문을 두드린 집사가 조금 난처한 목소리로 고한 건 그때였다.
“리엔타 공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저녁 다섯 시.
이전이라면 ‘저녁 식사를 하고자 딱 이 시간에 맞춰 왔겠군’ 하며 혀를 찼을 만큼 공교로운 시간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일부러 이 시간을 피해 올 사람임을 알았다.
그야 마주칠 때마다 ‘나 대공 전하 안 좋아해’ 하고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말하는 샤를리즈 때문이었다.
‘그 말을 왜 나한테 하시냐고!’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나쳤다.
스며들어 ‘이미 알고 있습니다’의 단계에 진입해 있는 상태였다.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