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39) (39/232)

39화

“그래야지.”

리반도 당연히 따라가려고 하던 때였다.

“눈을 붙이고 있어.”

‘공녀님, 감사합니다!’

거멓게 죽은 눈을 번쩍 빛낸 리반은 마음에도 없는 너스레를 떠는 대신 헤죽거리며 웃었다.

칼릭스가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드는 얼굴이 오랜만에 평온했다.

* * *

마차를 타고 오며 한 고민은 쓸모없었다.

칼릭스가 이미 저 성물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칸드 백작이 쉽게 줄 인물은 아닌데 고생 많았겠어, 공녀.”

심지어 출처도 말이다!

그럼 왜 적기에 구하지 못했던 걸까, 라는 의문은 그럼에도 들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예정대로라면 며칠 전, 바이에르 공자가 죽고 그 배후로 지목되었을 상황이니 정예 기사들을 밖으로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이에르 공작가와 관련된 일도 그렇고, 매번 도움만 받아 미안해.”

‘이거 거의 다 전하 통해서 본 건데요.’

“이렇게 받기만 하기는 미안한데…….”

나 참.

구질구질한 과거를 읊을 때가 또 왔나 보다.

참회하는 심정으로 입을 떼려는데,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과거는 모두 과거니 그건 상관하지 않기로 했잖아.”

‘……아, 양심이.’

이번에 고마운 일 했으니 예전 사건 하나 탕감. 이런 식으로 했다면 마음 편해졌을 텐데 이렇게 천사 같으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다음에 공녀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꼭 말해 줘. 무엇이든 반드시 하겠어.”

나른한 기미가 감돌던 공기가 일순 팽팽해졌다.

항상 가볍게 미소 짓고 있던 얼굴에서 미소가 걷히자 이목구비가 더 선명해진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던 답 없는 얼빠는 또다시 참회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계속 거절하기도 뭐하다.

그래서 약속했다.

이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주님을 위해 쓰겠습니다.

* * *

시간은 차곡차곡 흘렀다.

그사이, 나는 사샤의 열이 진정되었다는 희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확인하니 안도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바이에르 공작으로부터 보상을 말해 달라는 소식도 들어왔다.

“흠.”

이건 아껴 둬야겠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준 건데 또 거절할 필요는 없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내가 뭘.”

“히죽하고 성격 나빠 보이게 웃으셨잖아요.”

“로제타, 공녀님은 성격 좋으셔!”

“‘그래 보이게’라고 했거든?”

아이고, 내 귀 터진다.

영혼의 절친이 되는 둘이 만났으니 이제 나는 까맣게 잊을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나를 중간에 끼우고 다녔다.

‘아직 어색해서 그런가.’

이리저리 휘둘리며 도착한 곳은 사냥터였다.

초대 황제의 용맹함을 기리기 위해 매년 사냥제가 개최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역시나 무슨 이벤트가 발생하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이리안과 사샤가 하하 호호 하며 산책하는 게 끝이었다.

‘그래서 불참하고 싶었는데 이건 안 된다니…….’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사냥보다는 차라리 대결이 좋은데.”

나는 불필요한 피를 보는 건 사실 언제나 질색이었단 말이다.

“여, 역시!”

뭐냐. 큰 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어느 이름 모를 놈이 어깨를 파득 떨더니 시선을 피했다.

“뭐야.”

“공녀님, 참으세요.”

“쉬이이. 괜찮아요. 그냥 가요.”

나 화낼 일 있었어……?

어리벙벙하게 끌려간 끝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것저것 주워 먹으며 이리안과 로제타의 한담을 듣고, 황제의 축사 동안 몰래 과자를 까먹은 사이.

뿌우우―

뿔 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며 마침내 사냥제가 시작됐다.

* * *

열 손가락 가득한 꽃반지를 멍하니 구경하며 생각했다.

‘사샤도 왔겠지?’

최소 백작가, 다섯 살 이상 전원 참석이 암묵적인 법칙이다 보니 분명 참석했을 텐데 안 보였다.

리반이 꼭꼭 잘 보호하고 있나 보다.

그러는 사이, 하늘에 번진 주홍빛 노을이 눈에 박혀 들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했는데 진짜로 안 일어난다니 다행이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 일찍 한 생각이었다.

* * *

‘이상하단 말이야.’

겉으로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카타리나는 얼마 전 샤를리즈와의 만남을 반추했다.

[바이에르 공작저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혹, 무슨 일이 있나?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군.]

[감사하지만 도와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이에르 공이 워낙 사교 활동이 적다 보니 무슨 일인지 걱정이 돼서 그런다네. 공녀 혼자 속을 끓이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지. 내겐 말해도 돼.]

[음…….]

잠시 고민하듯 눈을 깜빡인 샤를리즈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었다.

[성축일 당시 선황자 전하가 호수에 빠지셨을 때, 공자가 그 자리에 있었던 일로 대공 전하가 아직도 분노하였냐고, 그렇다면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랬군.]

[그런 부탁을 할 만큼 제가 대공 전하와 많이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나 봅니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축하하네.]

‘데칸드 백작 일은 이렇게 답했고.’

[어려운 보육원에 갑자기 큰돈을 기부하였으니 제대로 운용이 되는지 확인하러 갔습니다. 그때 유독 불쌍해 보이는 아이를 데려왔는데, 그 아이가 알고 보니 데칸드 백작이 잃어버린 손자더군요.]

[그대가 아이를?]

[불쌍해 보이면 지나치기 어려워졌습니다. 선황자 전하도 그렇게 만났으니까요.]

묘하게 말은 맞는데, 찝찝한 느낌이 여전했다.

그녀의 개는 바이에르에는 있지만 리엔타와 데칸드에는 없었다.

리엔타는 애초에 세작을 심기 어려운 곳이고, 데칸드는 두문불출하는 줄 떨어진 늙은이에게 낭비하기 아까웠던 터다.

‘데칸드는 손자를 찾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지금도 여전히 칩거하고 있지.’

바이에르에 있는 개로부터 전달받은 사항은 있지만 기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집사와 공작의 심복만이 공녀를 만났다고 했으니.’

만남 장소는 공자의 놀이방이었으나, 그곳이 응접실보다 보안이 강할 테니 아주 특이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공자가 아팠다는 것과 연관이 있나?’

하지만 그걸 샤를리즈가 무슨 수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카타리나가 짜증스레 검지와 엄지를 눌러 튕겼다. 결국 해소된 건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황제의 치하가 시작될 타이밍이었다.

* * *

“모두 참석해 주어 고맙네.”

황제가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저 속이 말이 아닐 것임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오른 황좌.

정통성 있는 후계의 등장.

그리고 그 뒷배는 무려 대공이다.

벌써부터 대공의 반기 시기를 짐작하는 겁대가리 상실한 이들도 있는 판국이다.

황제파는 곧 깨져 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유리판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심정이었다.

여타 귀족들은 이 묘한 분위기 속에서 대공을 저도 모르게라도 보지 않도록 주의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번 사냥제의 우승자는 이리로.”

라이넛 피넛이 몸을 일으켰다.

실력으로만 보면 단연 엘루이든 대공이지만, 그가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피넛의 라이넛, 제국의 광영께 인사드립니다.”

“내 대단한 기사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군. 이번 시상은 내 조카에게 부탁하고 싶네만.”

예상치 못한 선언에 귀족들이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사전에 합의한 사항이 아닌 것 같죠?’

‘황족이시라고는 해도 고작 일곱 살 된 어린애인데 갑자기…….’

“내 아우에게 조카를 맡기고 있어 마음이 불편했어. 엄연한 황가의 아이인데 아직 한 번도 황족으로서의 경험을 겪지 못하지 않았나. 아, 물론 아우님을 책망하는 건 아니야. 아우님께서는 할 수 없는 것이잖나.”

‘미친놈.’

이 되바라진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샤를리즈였다.

‘기 싸움 하려면 본인이 나서서 하든가 아이를 그 사이에 끼워?’

저 저 저 천하에 쓸모없을 놈이 분명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으리라.

‘대공도 짐작했을 테고.’

슬쩍 그쪽으로 눈을 준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직전까지 무감각하기 짝이 없던 눈에 아주 야트막한 웃음기가 번졌다.

안도를 주려는 것이지 진정 즐거워 짓는 미소는 아니었다.

미래가 전개되기에는 너무도 짧은 눈 맞춤이 지나갔다.

“왜, 어렵겠나?”

칼릭스가 대답하지 않자 황제가 도발했다.

“예, 어렵겠습니다.”

“……뭐?”

“사샤가 아직 많이 어리지 않습니까.”

“칼릭스 너는 저 나이에 사냥감을 사냥도 하지 않았었니.”

“형님께서는 열 살에 하셨었고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칼릭스는 정작 느른한 얼굴이었다.

지킬 수 없다면 소중한 것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지킬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을 공표하는 쪽이 지키기 수월하다.

감히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도록.

‘감히 네가 짐을 조롱해.’

분개해 팔걸이를 움켜쥐는 손등에 닿는 보드라운 촉감이 있었다.

카타리나 황후가 빙긋이 웃었다.

“그럼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사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때, 아이가 우물쭈물하며 주변을 둘러봤더라면 그녀는 조금 더 압박해 아이의 형편없는 모습을 내비치는 것을 끝으로 물러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샤는 떨리는 눈을 들어 올려 카타리나를 마주 보았다.

명목상의 눈웃음만 남겨 둔 적안이 깊어졌다.

“아가. 황제 폐하께옵서 네가 황족으로서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친히 도와주시려는데, 정녕 싫으니?”

“……할게요.”

“이리 오렴.”

카타리나가 짙게 미소 지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선황자를 안내하지 않고.”

리반이 주먹을 꾹 쥐었다.

‘비겁하게!’

사용인들의 호의에 아직도 쑥스러워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이제 조금 익숙해지려나 싶었는데.

“사샤를 안내해.”

칼릭스가 입술을 열었다.

언뜻 들으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목소리였다.

그 표정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곁에서 오래 모신 리반은 그 순간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게 됐다.

“황제 내외께서 꼭 그러고 싶다고 하시지 않아.”

얼핏 휘어지는 눈매가 흥미로움과 맞닿아 있었다.

물론, 그 시선의 기저에 있는 감정까지 흥미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좌중은 숨소리조차 아끼며 침묵했다.

사샤는 계단을 올라 마침내 단상에 섰다.

제법 성격 좋은 숙부처럼 황제가 아이의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이제야 가까이에서 보는구나.”

이쪽이 차라리 아이에게 익숙한 종류의 눈이었다.

“이 함을 열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영식에게 전달해 주면 된다.”

눈짓하자, 시종이 두꺼운 천을 사이에 두고 함을 들고 왔다.

“영식이 아주 흥미로운 물건을 가지고 왔어. 황족이 아니면 저 함에 손이 닿는 즉시 변고가 일어난다더구나. 하나, 너는 걱정할 것 없다. 내 형님의 자식이 아니더냐.”

함을 툭툭 두드리던 황제의 손이 떨어지자, 시종이 자세를 낮춰 아이의 가슴께로 함을 내렸다.

그리고 아이의 손이 닿았다.

쩌저적―

권좌에 착석해 있던 황제는 몸을 일으키고, 황후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누군가가 그리 말한 순간이었다.

새하얀 빛기둥이 솟구쳤다.

‘진정한 의미의 황족이기 때문인가?’

그런 비슷한 감상을 품은 시선들이 재빠르게 움직인 바로 그 직후.

작은 몸이 떠밀리듯 뒤로 날아가 아래로 나가떨어졌다.

콰과광!

하늘을 모두 메운 흰색 빛이 분노하듯 울음을 토해 냈다.

“세, 세상에.”

이 같은 일이 가리키는 건 하나다.

경황없이 움직이던 시선들이 점차 한곳을 향했다.

종착지는 의식 잃은 아이를 품에 안은 샤를리즈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