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공녀, 그대가 설마.”
황제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황족 감별 마도구는 마도구다.
판별이 틀릴 확률이 희박하기는 하나,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황족을 가리는 성물이라며 피넛에서 가져온 물품이었다.
“신성한 황실을 능멸한 공녀를 당장 감옥에 가둬야 마땅합니다!”
빛기둥을 목격하고 놀라 뒷걸음질 치다 넘어진 라이넛이 어느새 일어나 외쳤다.
“거기 기사들 뭐 하고 있…….”
“내 딸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 누가 감히 데려가려고 하는가.”
남부의 실질적인 지배자.
제국의 금줄을 틀어쥔 사내.
건국 당시부터 건재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가히 명문가의 통솔자.
백년 전쟁의 승기를 되찾은 기사이자 황제의 목숨을 구해 하사받은 면책권의 주인.
벨리악 리엔타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찔끔한 라이넛은 순간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얼른 다시 눈을 돌리고는 그 기세에 압도되지 않은 척 애써 어깨를 폈다.
“이 일에 면책권이라도 사용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싸늘한 목소리였다.
제 부친이 저를 위해 성물을 의심하며 반기를 들었음에도 조금도 감흥이 일지 않은 것 같았다.
“영식은 내가 선황자님의 자리에 가짜를 데려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생각이 아닙니다. 성물이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과연 황제의 손이 닿았을 때는 아무런 이상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공녀가 입증해 보이게. 저 아이가…….”
“선황자님.”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부서지는 빛의 잔해 사이로 냉랭하게 빛났다.
샤를리즈가 이를 드러내 웃었다.
“피넛은 자식이 장성하도록 호칭 교육조차 제대로 못 하는 본데없는 가문이라고 소문낼 필요 없잖아?”
리엔타의 악몽으로부터 듣자니 몇 배로 더 열이 받는 말이었다.
이를 악문 라이넛이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짜냈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잘라 낸 것은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일주일. 그 이상의 시간은 주기 힘들어.”
카타리나 황후가 샤를리즈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이 정도도 많이 양보하는 것임을 그대가 알아주었으면 하네.”
앞뒤 가리지 않고 오만방자한 성격에 걸려들리라고 예상했고, 적중했다.
카타리나는 슬며시 번지는 미소를 가리는 대신, 눈매를 찌푸려 다른 의미의 미소로 둔갑시켰다.
“이번 사냥제는 이 정도로 마치지. 일단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가.”
황족이 자리를 나서고, 귀족들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일어났다.
칼릭스는 간파를 허용하지 않는 견고한 표정으로 황제 내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황실의 정통성이야 알 바 아니지만, 마도구는 어떻게 피할 요량인지 궁금하네.]
선뜻 마도구를 빌려주는 데에 속셈이 있으리라고는 짐작했다.
‘이래서였군.’
‘리닉스 방계로부터 자식을 봐 들여오기 전, 마도구를 의심하게 하려는 속셈도 있었겠어.’
날카로워지는 시선을 둥글게 휘어지는 눈매에 감추며, 칼릭스는 제게 와 닿는 시선을 마주 보았다.
[혹,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가만히 계셔 주세요.]
[제안인가?]
[아니요. 부탁입니다.]
* * *
마차의 작은 창문을 투과해 흘러온 노을빛이 아이의 얼굴에 고였다.
꼭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풀려 있는 얼굴과 온화한 햇살을 바라보던 샤를리즈는 문득 제 손을 펼쳐 아이의 얼굴을 가렸다.
“최악이네.”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단조로웠다.
황후가 무슨 일이든 할 것은, 당연히 짐작했다.
그 성격상 추락시키고 손을 내밀어 구원자 행세를 하려 들 테니 분명 자신까지 한 세트로 묶어 내리찍겠지.
가늠하듯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이 돌연 내려갔다.
“……하.”
팔꿈치의 타박상을 발견한 눈에 얼핏 비소가 스몄다.
사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사샤가 이미 겪었을, 그리고 앞으로 겪을 고난에 비하자면 살이 까진 것 정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소한 불행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고통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아프지 마.”
그러지 말자.
소설 속의 캐릭터가 성장을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단계가 네게는 없으면 했다.
그때 마차가 멈췄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던 시선이 느리게 이동했다.
“공녀.”
가장 먼저 보인 건 어스름한 사위 속에서 달빛을 받은 실루엣이었다.
“어째서 리엔타가 아닌 엘루이든에 도착했는지, 사정을 모두 이야기하겠어.”
많이 읽은 손이다.
손 따위를 작가가 친히 묘사해 줄 인물은 많아 봤자 둘 정도밖에 없다.
실력 있는 기사임에도 손마디가 불거지지 않은 사람. 기다랗고 쭉 뻗은 손은 마치 공예품을 닮아서.
“들어가자.”
그 손을 맞잡았다.
차가울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전 생의 그녀를 비웃듯 몹시도 뜨거웠다.
* * *
[피넛 남작 영식 뒤에 로나터스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지.]
[이쪽은 기껏 경어 쓰고 있는데 혼자 낮추는 건 어디서 배운 예법이지? 누가 보면 영식이 후작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말을 하다 보니 실수로.]
[이렇게 하자. 내가 입증에 성공하면, 너는 예법 틀릴 때마다 아야 하는 거야.]
[같은 말을 돌려주지.]
[그래, 그래.]
“제기랄!”
발에 차이는 건 모두 뻥뻥 차 대며 에리히가 분노했다.
사용인들은 혹여 책이라도 잡힐까 두려워 숨죽였다.
그러며 속으로 하는 생각은 모두 같았다.
‘아가씨, 부디 어서 귀택해 주세요!’
성별이 남성이기만 했더라면 장남을 제치고 후계로 발탁되었으리라고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인물.
그렇기에 장남이 추태를 부릴 때마다 더욱이 그 성별이 아쉬워지는 그들의 아가씨, 라베트의 귀환 말이다.
“에리히 오라버니.”
“……라베트.”
혀를 찬 에리히가 동생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었다고. 너도 그 계집이 시건방지게 하는 말을 듣지 않았어.”
“오라버니께서 경거망동하신 게 맞습니다.”
“하! 내 하나뿐인 동생은 정말이지 너무 곧다니까.”
라베트의 가라앉은 시선이 엉망이 된 로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여간 너는 헛똑똑이가 맞아.”
영지 시찰 중 불의의 사고로 중태에 빠진 로나터스 후작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
라베트가 황후의 충견 역할을 한층 더 잘 수행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부친의 암살을 사주한 작자를 알아내기 위하여.
저 모자란 것 같은 오라버니도 그 마음은 같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믿었다.
* * *
나는 흰자로 옆을 탐색했다.
‘화났나.’
내가 이전에 한 말 때문에 아이를 위험에 노출시켜 기회를 잡았다고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가 나동그라질 만큼 그렇게 구는 걸 두고 볼 만큼 내가 쓰레기는 아닌데.’
하지만 대공에게는 여전히 그런 모양이니 응접실 도착하면 변명해 봐야겠다.
오해가 안 풀리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풀어 볼 생각이었다.
‘아직 공작의 목을 노리는 인간 정체도 파악 못 했단 말이다…….’
그래서 의자에 앉고 대공이 하는 말 좀 듣다가 변명하려고 했는데.
“미안해, 공녀.”
정작 그가 처음 한 말이 이랬다.
‘설마, 더는 내가 살아 있는 꼴을 볼 수 없어 사과하는 건가……?’
소리 없이 절규하는 사이, 칼릭스가 말을 이어 갔다.
“사전에 말을 하지 않고 머무를 장소를 바꿔 버렸어. 황제 폐하께서는 공녀가 다른 생각을 할지 모르니 공작가에 자택 연금을 내릴 요량이라고 하셨거든.”
‘허.’
일주일은 두고 본다며! 두고 본다며!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집에 처박아 두고 감시하는데 뭘 할 수 있겠는가.
그 감시라면 내가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는지 보려는 용도이기도 할 테니 쉽게 사람을 움직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나를 속였을지도 모르는 공녀를 곁에 두고 감시하고 싶다고.”
“그러셨군요.”
“물론 사샤가 진짜 내 조카라는 걸 알아.”
‘헷갈렸다고 하면 실망할 뻔했다.’
“모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그리듯 잠시 깊어진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형님과 정말로 똑같아서.”
입매를 끌어 올려 웃은 남자가 무의식적이라는 듯 창문을 바라보았다.
“벌써 시간이 늦었군. 피곤할 텐데 오래 잡아 둬 미안해.”
“아닙니다.”
나는 눈치 빠르게 굴었다.
괜히 귀찮은 인사말 걸지 않고 재빨리 퇴장했다.
* * *
적막한 밤.
황성 깊은 곳에 자리한 황제궁.
그곳에서도 은밀한 장소, 황제의 침전은 소란스러웠다.
“감히, 비천한 무희 태생 주제에!”
황제의 분노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리던 시종은 덜덜 떨며 문 앞을 배회했다.
벌써 훈기가 사라진 그릇이 싸늘했다.
내심 안도하며 약을 데우고자 뒤돌아선 순간이었다.
“화, 황후 폐하!”
“쉬이. 약을 주게.”
시녀조차 대동하지 않고 찾아온 카타리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시종은 아연실색했다.
“폐하께는 내가 드리겠네.”
약을 건네받은 카타리나는 시종더러 문을 두드리라고 눈짓했다.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엉망이 된 광경에 카타리나는 고운 눈매를 찌푸렸다.
“폐하, 이리 화를 내시면 건강에 좋지 않으십니다.”
“어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겠소! 내가 아우라고 칭하기도 수치스러운 작자에게 치욕을 당했는데!”
“아니요. 치욕이 아니랍니다. 자승자박이겠지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황제는 카타리나가 건넨 약을 마셨다.
탁. 그릇을 내려 둔 황제가 금세라도 말을 쏟아 낼 듯 입을 연 동작 그대로 쓰러졌다.
부릅뜬 눈의 눈꺼풀을 손수 허리를 굽혀 내려 준 카타리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비천한 무희 태생이면 뭐 할까. 지금은 저리도 세가 막강한 것을.”
그러게 무시하는 대신 경계했으면 이렇게까지 될 일은 없었을 것 아니야.
짧게 혀를 찬 카타리나가 가늘어진 눈으로 과거를 되짚었다.
[제 조카님이 있어야 할 장소로 엘루이든 말고 다른 곳을, 폐하께서는 생각하고 계십니까?]
야외 회장에서 아무런 대응도 없던 것도, 저 도발도.
모두 그 아이를 철저히 도구로만 생각해 하는 것이리라.
‘귀찮게 됐어.’
매끈한 미간이 진심으로 찌푸려졌다.
일말의 진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번 일이 진정 타격이 되었을 터.
그래도 칼릭스가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진짜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이쪽의 성공이니.’
샤를리즈 리엔타가 진짜임을 입증해도 상관없다.
시일을 벌어 입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게 자신이니까.
진짜임을 입증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때는 대공가의 내부를 살피기 위해 공녀를 잠입시켜야 하는 일이 사라지니 이번 건은 리엔타를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전환하면 그만이다.
‘공작이라면 필경 면책권을 사용할 테지.’
도톰한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 * *
세상이 온통 어두웠다.
옅은 빛조차 없는 완벽한 암흑이 저까지 모두 삼켜 버리는 듯했다.
누군가 속삭였다.
「진짜라고 생각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