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고귀한 영애님이 너를 아끼는 것, 이상하지 않았어?」
「네가 선황자라서 그런 거겠지. 선황자가 아닌 너는 가치 없으니까.」
‘샤를 님은 내 가족을 찾기 전에도 손을 잡아 주셨어.’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스산한 웃음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럼 네가 그것 말고 가치 있다고?」
「너도 네가 진짜 선황자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누군가 끌어 올리기라도 한 듯 번쩍 눈이 뜨였다. 그 바로 전,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아.”
숙부님이 선물해 주신 명도 낮은 별 모양 조명이 머리맡에서 반짝거렸다.
‘꿈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이는 자그마한 손을 뻗어 소중하게 간직한 작은 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성급하게 뻗은 손을 흠칫 물렸다.
손바닥에 배인 땀을 제 옷으로 열심히 닦고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삐죽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내가 진짜 선황자님이 아닌 걸까?’
황제 폐하의 손이 닿았을 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눈높이까지 올린 손을 보는 시선이 점차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면 제 운이 이렇게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진짜 선황자가 아니면.
다정한 숙부님, 언제나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리반.
그리고 그 손.
모두 진짜 선황자님의 것이 될 것이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던 아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은 그가 몹시 나빴다.
모두 선황자님의 것이니 선황자님의 것이 되는 게 당연하다.
한 가지만 빼고.
“샤를 님…….”
그건 그가 선황자가 되기 전의 추억이니까.
간직해도 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못된 행동이라고 해도…….
“죄송해요.”
그렇다면 나쁜 아이가 맞았다.
* * *
“좋은 아……. 공녀님! 사샤 님을 그렇게 안으시면 안 됩니다!”
나는 사샤를 옆구리에 대롱대롱 들고 있는 중이다.
분명 이 꼬마 사색가는 혼자 있으면 또 이런저런 생각 다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세를 잡아 줘.”
“품에 안으셔야지요.”
“이렇게?”
앞으로 안자 아이의 몸이 아래로 주욱 내려갔다.
이마를 짚은 리반이 내 손을 고쳐 줬다.
“엉덩이를 이렇게 하셔야지요!”
“리, 리반.”
“사샤가 부끄럽대.”
“그럼 제가 천을 들고 오겠습니다. 그건 괜찮으시겠지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
눈썹을 축 내린 사샤가 애절하게 말했다.
“저는 그냥 샤를 님이 하시는 방식이 좋아요.”
“머리에 피가 쏠리지 않으십니까?”
“네에.”
“사샤 님의 괜찮으시다는 말은 안 괜찮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또 자세를 잡아 주려고 했지만 리반은 급한 보고가 있어 어쩔 수 없다며 떠나갔다.
머리를 골똘히 맞댄 끝에 우리는 썩 좋은 자세를 찾아냈다.
“얼굴도 볼 수 있고 좋다, 그치?”
“네에.”
처음에는 어색해하는 것 같던 사샤도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두 번째 걸로 해도 될까요?”
“또 쭉 내려갈 텐데.”
“괜찮아요. 제가 꼭 잡을게요.”
그렇다면야 뭐.
나는 잠시 아이를 내려놓고 다시 안았다.
목에 감기는 온기도, 답삭 안긴 아이의 말랑 폭신한 볼의 감촉도 선명했다.
왜 이 자세를 하고 싶다고 했는지 알겠다.
체온을 온몸으로 마주 대고 있는 건, 꽤 좋은 기분이었다.
“너랑 처음 하며 배우는 게 많아.”
“저도요. 저도 그래요.”
“그러니까 만약 선황자님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선황자가 맞는다고 반드시 밝혀낼 계획이지만, 아이는 불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마음에도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때에는 리엔타로 살면 돼.”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놓쳤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아이가 대답했다.
나는 작은 몸을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우리, 더는 아무것도 잃지 말자고.
* * *
느지막한 오후.
약과 함께 기고문 수준의 절절한 편지를 보낸 공작에게 답신을 부치러 가는 김에 나는 칼릭스를 찾았다.
“그 물건은 성물이 맞기는 할 거야, 공녀.”
내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칼릭스는 여상하게 말했다.
“아이의 열이 발현열인지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겠지. 발현열은 신성력이 깃들기 전 앓는 것이니까.”
“그럼 로나터스에서도 이 일에 결탁했겠습니다.”
모르는 척 생각의 활로를 만들어 주고자 했는데, 헛짓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합착 관계야. 로나터스 영애가 황후와 긴밀한 사이거든. 물론 이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는지는 더 알아보아야 되겠지만.”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사람!’
나야 원작을 읽어서 아는 거지, 이쪽은 아닌데도 정보력이 상당했다.
그래도 내 편일 때 든든할 인물이었다.
……언제까지 내 편일지 알 수 없어 그게 문제일 뿐.
‘크흑.’
“그런데…….”
찻잔을 매만지던 손이 멎고, 수려한 얼굴이 기울어졌다.
“최근에는 공녀와 대화를 하는 건지, 부관과 대화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노력이 빛을 발했다.
벌써 눈치챌 정도로 내가 잘 해낸 것이다.
슬쩍 피어오르려는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지었다.
“비슷합니다. 대공 전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어째서?”
“그야…….”
뭐라고 말해야 없던 정이 털리지 않으려나.
과거를 되새기는 건 애써 묻어 둔 일을 파헤치는 것 같고, 애매하게 말하자니 권세 보고 빌붙는 부류 같고.
‘끄응.’
별수 없이 나는 약간 자포자기인 상태로 말했다.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요.”
도움이 되고 싶어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답니다…….
“그럼 그럴 필요는 없겠어. 이미 공녀는 아주 많은 도움을 주었거든.”
“…….”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황후 폐하도 너무하시지요. 일주일 안에 어떻게 선황자의 진위를 가릴 수 있을지. 이거 희망 고문만 되지 않겠습니까.”
점이 입가 주름에 파묻혀 가려질 만큼 남자는 크게 웃었다.
“그래, 그렇지. 멍청한 계집은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맞습니다. 절대로 판별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껄껄 소리 높여 웃은 남자가 은근하게 물었다.
“하면, 두고 보실 생각이신지요?”
“면책권은 회수해야 되지 않겠나.”
그가 입술을 늘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