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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42) (42/232)

42화

‘망할 신이시여, 망하세요.’

나는 칼릭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앉은 채였다.

재깍 몸을 휙 떼고 속사포로 읊었다.

“결례를 끼쳤습니다. 다음부터는 마차 바닥에 눕혀 주시면 됩니다.”

“조언 새겨듣도록 하지.”

흘리듯 가벼운 어조로 대답한 칼릭스가 제 어깨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조금 더 쉬고 있어.”

“저는 딱딱한 게 편합니다.”

보란 듯 반대 방향에 찰싹 붙어 마차 내벽에 볼을 짓눌렀다.

“그럼 내가 공녀에게 결례를 저질렀군. 그대 침실의 침구를…….”

나는 손을 착 올려 내 볼과 마차 벽 사이에 끼웠다.

“이 정도가 딱 좋네요.”

“공녀가 그렇다면야.”

눈을 휘어 웃은 칼릭스가 미소를 천천히 지웠다.

“도착하면 의사에게 진찰받는 게 좋겠어. 혹시 무슨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이번에는 금세 의식을 찾았지만, 다음에는 위험할지도 모르고.”

“…….”

“당연히 의사는 공작에게 연락을 취해 리엔타의 주치의를 데려올 생각이야.”

저게 정론이기는 하다.

귀족가 2세들은 단 한 명, 후계를 제외하고 모두 가문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된다.

대부분이 타 귀족가와의 돈독한 결합을 위한 결혼 장사에 사용되니 건강은 특히 극비에 부쳐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내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이유는 저 때문이 아니다.

“저, 건강합니다.”

저번에 늦잠을 자 연병장에 늦게 향했다가 우연히 목격했던 에반스 경의 자세를 흉내 내 보였다.

한 번밖에 못 봐서 꼭 주먹으로 내 머리통을 노리는 것 같은 영 어설픈 자세가 되기는 했지만 의도가 전달됐으면 됐다.

“건강에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잠시 깊어지는가 싶던 눈이 샐쭉 휘어졌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보다, 전하.”

말하라는 듯 칼릭스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번에 데칸드 백작에게서 성물을 건네받을 때 세 개를 가져갔었습니다. 하나만 고르면 후일 이상하게 여길까 봐 말입니다.”

“훌륭하군.”

멋쩍은 표정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그냥 히히 웃었다.

“그런데 그 둘 중 하나도 성물이더군요.”

경청하고 있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딱 잘라 말했다.

“그냥 운입니다.”

선택에는 별 이유가 없었다.

기묘한 직감 같은 무슨 예감은 전혀 못 느꼈고, 그냥 나중에 돈 필요할 때 경매에 내면 가져다 붙일 수식어가 많을 것 같아 골랐을 뿐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전하.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 *

시간은 금세 흘렀다.

“공녀는 무슨 생각일까요…….”

단속하지 못한 잇새로 진심이 흘러나갔다.

뒤늦게 허겁지겁 입을 다물었지만 자리한 귀족들은 모두 들은 후였다.

그러나 헛기침 소리를 내며 눈치 주는 이들은 없었다.

애초에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랬다.

‘그러게, 공녀가 왜 굳이 이런 자리를 요청했을까?’

고작 일주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 대단한 성질머리에 목격자들의 얼굴을 확인해 기억해 두고 귀족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릴 생각은 아닌지……!

어깨를 바르르 떤 어느 귀족이 얼굴을 찌푸리다 바로 인상을 폈다.

‘드디어 왔어요.’

‘대공 전하와 동시에 도착한 거 맞죠?’

‘대공 전하께서 황자님을 리엔타로 가게 하지 않고 공녀를 저택에서 머무르게 했다던데요.’

저 철저하리만치 한 가지만 바라보는 집요한 목적의식에 귀족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것도 잠시였다.

황족의 등장을 알리는 나팔 소리 때문이었다.

“제국의 광영을 뵙습니다.”

일제히 기립한 귀족들은 황제 일가가 자리에 앉고서야 다시 착석했다.

“모두 참석해 주어 고맙네.”

영양가 없는 말은 인사치레로 지나가고, 마침내 본론이 시작됐다.

“리엔타 공녀와 피넛 남작 영식은 이리로 오게.”

일어나는 둘의 표정은 비슷한 듯 달랐다.

‘어차피 증명은 실패할 텐데 귀찮게.’

탐탁지 않은 눈초리로 샤를리즈를 바라보며 에리히는 마른침을 삼켰다.

샤를리즈는 오늘 목을 빈틈없이 가리고, 소매가 손등까지 닿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선 하나 허투루 흘리는 법 없는 오연한 성격은 뒤틀린 열등감을 자극했다.

‘공작의 딸일 뿐이지 저가 공작이 될 줄 알아?’

그는 장차 후작이 될 테지만, 그녀는 들여온 데릴사위의 부인이나 되고 말 터였다.

“영식은 성물을 꺼내 주십시오.”

라이넛이 저번처럼 두꺼운 천으로 감싼 함을 들었다.

“이제 공녀는 입증하십시오.”

샤를리즈가 좌중을 향해 돌아섰다.

마치 모두의 면면을 기억할 기세로 찬찬히 바라보는 시선이 짙고도 명확했다.

그러다 문득 입술을 살짝 올려 미소 지은 것도 같았다.

“먼저, 입증하기 전 확실히 해 둘 것이 몇 가지 있겠습니다. 입증에 성공한다면 황가의 혈통 여부를 판별하는 마도구는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이며, 저를 반역도로 몰아세운 피넛 남작 영식을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자, 잠깐.”

라이넛이 당황해 저지했다.

“저는 그저 황족만 접촉할 수 있다는 성물을 가져왔을 뿐이지 리엔타를 반역도로 몬 적 없습니다!”

“그럼 황가에 분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이들을 달리 뭐라고 부르는지 영식은 아십니까?”

그 말을 샤를리즈는 에리히를 똑바로 쳐다보며 읊었다. 에리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까지 될 일은 아니었는데!’

그저 리엔타의 명예를 짓밟고 샤를리즈 리엔타를 지방 수도원으로 유폐 보낼 정도로 생각하고 동참한 일이 너무 커졌다.

‘마, 만약 공녀가 입증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정신적으로 몰리자 저도 모르는 새 눈동자가 어느 한쪽을 향했다가 재빨리 되돌아왔다.

‘괜찮다. 피넛 남작 영식이 한 일이니까. 그리고 혹여 나도 연루되어 있다고 공녀가 증거를 찾아내면 그때는 이걸 준 사람을 말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저게 거짓도 아니었다.

진짜로 성물을 받아 건넨 것밖에 그는 한 게 없으니 말이다.

“영식, 이 성물은 황족에게만 접촉을 허락하는 종류라고 했었지?”

라이엇이 초조한 내심은 애써 감추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렇군.”

샤를리즈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뚱한 얼굴이 잠시 앞을 보는가 싶었다.

그랬기에 이어지는 기행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탁. 탁탁. 탁탁타닥.

함에 손을 척 올려놓는 것도 모자라 툭툭 친 샤를리즈가 고개를 기울였다.

“멀쩡한데?”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라이엇은 정신을 다잡았다.

“리엔타는 건국 당시부터 실재한 가문이었으니, 황족의 피가 아주 연하게나마 공녀에게 흐르고 있나 봅니다. 아주 영광스럽게도.”

“흐음.”

샤를리즈가 다시 손을 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다 같이 얼이 빠져 있던 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파지직―

“!”

사샤가 만졌을 때와 동일한 반응이었다.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앞서 샤를리즈가 만졌을 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걸 몰랐더라면 말이다.

“영식, 이건 성물이 맞기는 맞아.”

샤를리즈가 함을 만지지 않은 다른 손을 가슴 정도 높이로 들어 올렸다.

아래를 향한 주먹을 위로 돌리고, 손을 펴자 그 안에 웬 돌멩이가 있었다.

“영식이 알고 있는 용도의 성물이 아니라 신성력에 반응하는 것일 뿐.”

그 순간, 카타리나 황후의 손이 아주 짧게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그, 그런.”

샤를리즈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못 믿겠으면 영식이 해 봐.”

“주, 주십시오.”

강탈하듯 신성력이 응집된 돌멩이를 왼손에 쥐고, 라이엇이 오른손을 함에 올렸다.

“으, 으악!”

고작 눈을 깜빡일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영식이 비명을 내지르며 기절했다.

“주, 죽은 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이 점차 커질 무렵, 마침 근처에 있던 라베트가 말했다.

“혼절하셨어요.”

“참을성이 없네.”

평소 크기로 중얼거린 목소리였으나,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음성이었기 때문에 귀를 뚫고 들어왔다.

샤를리즈가 라이엇을 질질 끌고 왔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도, 이렇게 다시 모인 귀족들에게도, 그리고 나한테도 사과해야지. 이만 일어나.”

나른한 목소리였으나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벌써 눈을 가리는 귀족도 있었다.

“바닥에 이마를 찧어 사과하다 보면 정신이 들려나?”

고개를 살짝 기울인 샤를리즈가 영식의 머리채를 휘어잡았을 때였다. 황제가 나섰다.

“공녀. 시시비비는 재판으로 가리는 게 어떻겠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샤를리즈는 영식의 머리카락을 툭 놓았다. 머리가 아래로 쿵 떨어졌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 후로 상황은 금세 마무리됐다.

* * *

드디어 마차가 보였다.

안도했기 때문인가.

간신히 걷고 있던 무릎이 기어코 꺾였다.

“고, 공녀님!”

소리가 갈수록 줄어들어 그 뒤의 말은 웅웅거리는 진동으로만 느껴질 뿐 인식되지 않았다.

오직 그 목소리 하나만 제외하고.

“샤를리즈.”

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지나 싶던 순간, 전혀 기대도 하지 않던 손이 다가왔다.

팔을 잡은 손에서 서둘러 힘이 빠져 품에 더 깊이 안기게 됐다.

짐작 가는 사람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고맙다고 웅얼거리고자 입을 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화려한 드레스보다 더 화려한 얼굴이 눈에 익었다.

[내가 먼저 만났어.]

그야 당연하다.

내 얼굴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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