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 여자보다 내가 먼저 당신을 사랑했어.]
이 장면을 원작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어느 순간인지만큼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칼릭스와 이리안이 결혼 발표했을 때.’
소설 결말 부분. 샤를리즈가 칼릭스에게 경어를 내려놓았을 즈음이다.
세분화하자면 악녀가 여주 독살을 시도하기 바로 직전 에피소드였다.
[나를. 날…….]
타인의 입장이 되어 듣는 건 처음이기 때문일까.
조금 낯설게 들리는 목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파열음처럼 상념을 예리하게 갈랐다.
칼릭스의 셔츠를 두 손으로 감아쥔 샤를리즈의 음성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다분히 위협조였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걸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랑해 줘.]
칼릭스는 아무런 대처도 취하지 않았다.
대답도, 한숨도, 샤를리즈의 팔을 치워 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었다. 마치 감내해야 하는 순간을 맞은 사람처럼.
이때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마치 어린아이가 검은 크레파스로 마구 칠한 것처럼 표정은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그래서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이만하면 너를 많이 참아 줬다.]
[처음부터 그러지 말지 그랬어!]
외치는 목소리가 심연의 것처럼 아득했다.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자들 특유의 처절함이 배어 있었다.
[이럴 거였으면…….]
옷깃을 잡고 고개 숙인 얼굴을 기다란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가렸다.
작은 어깨가 간헐적으로 흔들린다.
필사적으로 참아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지는 않았으나 분명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샤를리즈만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초상화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그 손이다.
모양 좋고 섬세한 손이 샤를리즈의 어깨를 향했다. 그러나 미처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멎었다.
샤를리즈가 씹어뱉듯 뇌까렸다.
[너를 증오해.]
[그래.]
주먹을 그러쥐고 아래로 떨어지는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해.]
* * *
서서히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 세상이 희뿌옇다.
‘아주 푹신하군.’
이 쿠션감, 이 향기, 이 훈기.
‘……어디냐.’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어련히 괜찮은 데 있겠나 싶어 다시 눈을 감았다.
어차피 뜨고 있어 봤자 혼탁해서 안 보였다.
똑똑. 자그마하게 문을 두드리고 조심조심 들어오는 걸음이 느껴졌다.
대강 근처까지 왔을 때, 나는 눈꺼풀을 번쩍 올렸다.
“아직도 의식이……. 끼야아아아악!”
습관은 고치기 어려웠다.
‘한 번에 잘 일어난다며 시녀장이 칭찬해 줘서 일부러 이러기도 했었는데…….’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서는 슬쩍슬쩍 올려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가슴께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내쉬는 시녀를 면구스럽게 바라보고는 그 뒤를 살폈다.
‘대공저구나.’
며칠 머물렀다고 썩 익숙한 풍경이었다.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그사이 시녀가 잽싸게 사라졌다.
그녀가 들고 왔던 세안 물로 혼자 세수를 마치고 수건으로 얼굴도 싹싹 닦았을 무렵.
‘어라?’
돌아온 사람 수는 둘이 아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사샤가 숨을 헐떡였다.
시선을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지자 조그만 입술이 들썩였다.
“이틀이었어요.”
설명하라는 듯 의사를 보자 그가 한번 침을 삼키고는 말문을 열었다.
“신전에서 정신을 잃으신 후 이틀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내 소중한 인생에서 이틀이나 증발돼 버렸다.
‘아, 뒷골.’
목뒤가 뻐근해져 눈을 질끈 감자 사샤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또 아프신 거예요?”
“예?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아니.”
그냥 조금 열이 받았을 뿐이야.
“게일이 샤를 님께서 건강하시다고 했는데.”
“건강해.”
“정말이지요?”
“그럼.”
다행이라는 듯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말랑한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고, 나는 시녀에게 아이를 데려가라고 부탁했다.
“아침 먹고 와, 사샤.”
“그렇지만…….”
“메뉴가 뭔지 궁금하단 말이야.”
옹골차게 주먹 쥔 아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맡겨 주세요.”
“…….”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음.’
휘휘 고개를 털었다. 그보다는.
“게일이라고 했지.”
뚜둑 손을 꺾었다.
“순 사기꾼이네.”
이 몸이 얼마나 비루먹었는지 내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른다.
“딸꾹!”
얼굴이 시뻘게질 때까지 숨을 참아 딸꾹질을 자가 치유한 의사가 내 눈치를 살살 살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사람 이름이 게일이란 거 알고 한 짓이라 미안하진 않았다.
“더 상세하게 말해 봐.”
“제가 딸꾹질을 해 공녀님의 귀를 더럽히다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바닥에 이마라도 찧을 기세였다.
‘괜히 여러 말 했네.’
겁줄 필요가 애초에 없었군.
“내 몸 상태에 관해서 말이야.”
“아, 그거라면 말입니다.”
긴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 “그래그래.” 하는 추임새를 넣어 가며 열심히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한 건 헛짓이었다.
“그러니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습니다.”
진짜 의사는 맞는 건가? 의심스레 바라보자 게일이 서둘러 항변했다.
“제 아버지도, 조부님도 모두 귀족가의 주치의로 지내셨습니다.”
“흠.”
“정말입니다. 원하신다면 제 아카데미 성적표도 보여 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었지?’
잠깐 의아했지만 금세 납득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악명을 들어 봤다면 안 저러는 게 대담한 거다.
‘그나저나 수월하네.’
눈 부라리거나 표독스럽게 행동하거나 자애로운 척, 상냥한 듯이 굴어서 구슬리는 과정을 거쳐야 술술 말하게 됐을 텐데.
‘이리안이 대공과 이어질 일이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니, 소문 그대로 두는 게 더 낫겠는데?’
소문 퇴치 계획에 황후가 갑자기 난입해서 유보하고 있었을 뿐인데 얼결에 쓰임새를 확인했다.
“공녀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에 나는 아차 하며 이만 가도 된다고 대꾸했다.
“예에, 필요하시면 설렁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숨 쉬지도 않고 후다닥 말한 게일이 방을 나갔다.
잠잠해진 걸 확신하고서야 슬쩍 말을 걸었다.
‘있어요?’
음?
“어이, 돌멩이.”
퍽 날아와 내 이마를 명중하고도 남을 성질머리에 참고 있을 리가 없다.
“진짜 없나 보네.”
다른 사람 손 타게 해서 열 뻗쳤나 보다.
“끙.”
벌떡 일어나 편지지를 꺼냈다.
그러고 깃펜을 든 채 미간을 모았다.
간단한 안부 이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편지를 끝마치는 건 평소 같으면 벌써 끝내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다.
“에효.”
대공저의 보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일.
‘공작도 직접 보는 게 좋을 것 같고.’
책상에 머리를 쿵 박았다.
얼마간 더 그러고 있다 고개를 틀었다. 찌그러진 볼에 차가운 감촉이 와 닿자 정신이 좀 들었다.
‘이제 일도 해결됐으니 가도 되겠지.’
생각해 보니 그렇다.
물론 절친한 사이면 또 쓰러질까 봐 걱정돼 따라오겠지만 그 발끝도 못 되는 관계다.
‘이틀 만에 깨어났다는 데도 잠잠하고.’
역시 보고만 받고 말았나 보다.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고 있다 보니 문득 정신을 잃은 후 꿨던 꿈이 떠올랐다.
……음, 그때 모습에 비하면 지금은 선녀로군.
‘그건 꿈이냐, 아니면 내가 기억 못 하는 부분이냐.’
그리고 얼굴은 왜 표정을 구분할 수 없도록 가려져 있던 걸까.
하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달리 있었다.
물었다.
너, 그렇게 비참하게 구걸할 만큼 그 사람을 사랑했느냐고.
활자로만 읽었던 애정은 깊었다. 그대로 가라앉아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자문해 봤지만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갔을 만큼 커다란 감정은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감정이란 건 단 한 번만 겪어 봐도 온통 물들어 버려, 비슷한 상황에서만도 기어코 되살아날 만큼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랑은 기억에만 새겨져 아무리 파헤쳐 봐도 잡히는 건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다행이다.
느낀 점이 많았다.
‘스스로를 잃고 자멸하는 엔딩은 책에서만으로 족하지.’
슬슬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
칼릭스 엘루이든의 발소리는 늘 규칙적이다.
늘 느긋하게 걷는다.
그래도 상관없을 만한 지위의 사람이니 한 번도 불규칙적이었던 적이 없을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언제부터였더라.
칼릭스 엘루이든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러나 기억하고 있는 남자와 달랐다.
그는 샤를리즈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는 샤를리즈와 말을 섞는 것도 싫어해 자리를 피한다. 그는.
“걱정했어.”
이렇게 다정한 염려를 들어 본 적 없다.
하지만 헷갈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샤를리즈가 칼릭스를 사랑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으니까.
* * *
리엔타 공작비는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돼 시한부 생을 선고받았다.
세간에는 지병 때문에 약한 몸으로 감행한 출산이 끝내 비극의 시초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비슷한 듯 다른 변명이었다.
“그러니까 아가씨께서는 리엔타로서 모든 일을 잘 해내셔야 합니다. 공작비 각하께서 제 생명이 닳을 것을 감안하고 얻은 아가씨가 아니십니까.”
“공작 각하께서는 당시 전쟁에 참전해 계셨기 때문에 공작비 각하의 결심을 말리지 못하셨습니다. 두 분이 얼마나 정다운 사이였는지 아가씨는 모르시겠지만 아주 돈독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때 공작 각하께서 계셨다면 분명 아이를 지우는 쪽을 선택하자고 하셨겠죠.”
“그러니 아가씨는 모든 일을 철저히 해내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