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44) (44/232)

44화

샤를리즈의 귀에 헛된 말을 속삭이는 사람은 공작비가 데려온 시녀로 시작해 유모라는 직함을 갖게 된 여인이었다.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훌륭한 귀족으로 성장하시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던 유모는 기어코 진실을 토해 냈다.

“그럼 저 아이가 행복해져야 합니까? 건강하시던 아가씨께서 아이를 낳고 6년 만에 숨지셨는데! 그렇게 태어났는데 행복하게 사는 게 맞나요? 각하께서도 저 아이가 실은 밉고 증오스러우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눈감아 준 거지 않습니까!”

“그런 적 없다!”

모든 상황을 얇은 벽 뒤에서 전해 듣고 있던 샤를리즈는 생각했다.

글쎄.

내가 밉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일부러 모나게 굴었다.

언제까지 진심을 숨길 수 있는지 보자.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

위선자.

거짓말이 탄로 나는 순간 소리 높여 비웃을 것이라고.

세상에 싫은 건 많았다.

그중 첫 번째는 자신이었고, 두 번째는 거짓말이었다.

가늠하듯 바라보는 눈도 싫었고, 어설픈 동질감을 만들어 보려는 듯 구는 작자들은 뺨을 날려 볼 안이 제대로 터지게 만들었다.

칼릭스 엘루이든을 처음 만난 건 그런 열두 살의 여름. 제대로 인식한 건 열세 살의 겨울이다.

신년을 맞아 황성의 연회 홀은 북적였다.

온통 행복한 듯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표정한 건 저 홀로였다.

“공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는 키라…….”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아는 척하는 소년 소녀들에게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홀을 벗어나 근처에 놓인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몸이 점점 차갑게 굳는 걸 느끼면서도 고집스레 앉아 있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짜 재수 없지 않습니까?”

바닥에 침을 뱉는 소리가 천박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흘러온 미성에 조금 놀란 건 사실이다.

함께 자리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던 사람이라.

“무엇이?”

“샤를리즈 말이에요! 꼴에 공녀라고 어찌나 도도하게 구는지.”

소년이 이를 갈았다.

“그래 봤자 어미를 죽음으로 몰아가서 아버지에게 냉대당하는 신세 주제에. 조금만 더 크면 제 상황을 알고 주제 파악을 하게 되겠…….”

“주제 파악을 해야 하는 건 네 쪽 같은데.”

담담한 어조였다.

“공작이 진정 제 딸을 냉대하는지 아닌지도 판별하지 못하는 멍청한 머리는 어쩔 수 없지만,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입 간수는 제대로 하는 게 좋겠어.”

“대, 대공 전하.”

“조금만 더 크면 호되게 당할지도 모르잖아?”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급한 일이 생각나 가 보겠다며 소년이 허겁지겁 도망치듯 사라진 후, 나는 잠자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대로 그 뺨을 내리쳤다.

“뭘 안다고 말하고 다니는지 모르겠군.”

으르렁거리자, 칼릭스가 돌아간 고개를 바로 했다.

“이제 기분이 풀렸어?”

“아니, 하나도.”

“그럼 더 때려.”

그러며 칼릭스가 볼을 살짝 돌렸다. 붉게 달아오른 뺨은 무척 아파 보였다.

“그리고 오늘 일은 잊어.”

“너랑 친구 해 주는 사람한테 달려가 뭐라 할까 봐 아주 걱정되나 보네.”

“들었지 않아? 오늘부로 악연이야.”

“속셈이나 말해.”

“글쎄.”

단조롭기만 했던 목소리에 얕은 웃음기가 서렸다.

“나도 모르겠어.”

그 순간은 정말로 모든 걸 알 수 없었다.

마법등이 아주 야트막하게만 닿아 어스름한 사위 속에서 심연을 닮은 속눈썹이 팔랑이는 건 어떻게 볼 수 있었는지.

눈매를 약간 찌푸린 이유는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그냥……. 네가 걱정되나 봐.”

그리고 샤를리즈는 손을 들어 온 힘을 다해 제 뺨을 내리쳤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아직 몰라도 되는 세상의 면면을 겪은 소녀가 믿는 유일한 진리였다.

비천한 출생의 새파랗게 어린 대공이 하필 친구와 그녀가 있는 정원을 찾아오고, 하필 그녀를 헐뜯는 친구에게 쏘아붙이는 장면을 목격하고, 하필…….

“이걸로 없던 일로 해.”

놀라 조금 크게 뜨인 벽안에 고스란히 비치는 제 모습에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위로를 곱씹고, 곱씹다 보니 그 말을 한 사람을 기억하고, 기억하다 보니 시선이 닿았고, 시선이 닿다 보면 그만큼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다.

집착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둘 중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손에 넣고 싶다.

그것만은 같았으니까.

……단지 그뿐이었는데.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를 뒤덮은 때.

깨달았다.

“면책권을 사용하겠다. 무서운 일 겪을 일 없어. 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작이 아주 귀중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샤를리즈의 뺨을 매만졌다.

텅 빈 눈과 빼빼 마른 몸의 악독한 쓰레기를 금지옥엽 바라보듯 응시한다.

그리고 그 밤.

샤를리즈는 이리안에게 사용하려다 실패한 극독을 희석시키지도 않고 곧바로 삼켰다.

* * *

그렇게 죽었다.

‘또 착각해서 되풀이하는 건 학습 능력이 없는 거지.’

이럴 땐 이곳이 소설 속이라는 게 아쉬웠다.

‘남자 주인공보다 잘생긴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단 말이다.’

끙끙거리며 이마를 꾹꾹 누르던 중, 나는 돌연 깨달았다.

이전 생에서도 더 잘생긴 얼굴 본 적 없긴 한데……?

‘에효.’

안타까운 한숨을 속으로 푹푹 내쉰 후, 나는 장점 한 가지를 찾아냈다.

바로 타이밍 좋게 칼릭스가 찾아온 덕택에 이 커다란 저택을 걸어 다니느라 뚝뚝 닳을 체력을 아꼈다는 것이다.

“공작저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마차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음.

너무 염치없는 발언이었나.

칼릭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슬그머니 비굴하게 덧붙이려던 때, 칼릭스가 문득 웃었다.

“방금 깨어났다고 들었어. 조금 더 쉬는 게 좋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그냥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걸요.”

“그래…….”

무슨 일인지 나는 그가 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대로 빗나갔다.

“채비해 두라고 이르지.”

‘그렇지. 저게 맞지.’

지긋지긋한 인간이 제 발로 나간다는데 기쁘지 않을 사람 어디 있겠는가.

“예, 일주일하고도 이틀간 감사했습니다.”

“아주 철저한 인사, 감사히 받았어.”

피식 웃은 칼릭스가 몸을 일으켰다.

‘어어?’

그제야 나는 무려 대공 전하께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어 나와 대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눈높이가 맞더라!’

그런데 미래는 보이지 않았었다.

설마 사라진 건가 식겁해 고개를 번쩍 쳐든 순간이었다.

“필요한 건 이쪽에 있어. 그럼 준비가 완료되면 다시 찾아오지.”

이상한 능력은 사라진 게 아니다.

그저, 칼릭스가 나를 바라보지 않아 눈이 마주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 * *

시간을 되감아 이틀 전.

핏기 없는 얼굴이 창백했다.

신전에서 먼저 보낸 기사가 말을 전한 덕에 준비를 마친 의사가 샤를리즈의 상태를 살폈다.

“주군, 집무실로 가시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반이 속삭였다.

후일 의사로부터 상태를 보고받으면 끝나는 일이다.

함께 있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으며, 시간 낭비만 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먼저 가 있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본 적 있었던가.

은색 머리카락과 연녹색 눈동자. 색소가 옅은 외모지만 흐릿한 인상으로 기억되지 않은 이유는 매 순간 강렬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창백한 안색은 단 한 번 목격했더라도 쉽게 잊을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손에 금세라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 같았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

고작 그 정도의 위화감 이상을 파헤치고 싶어졌다.

그랬는데.

“공작저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마차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미처 준비할 새 없이 맞닿은 시선이 마치 형체라도 있는 듯했다.

* * *

“끄우으으으.”

“…….”

“끄으으.”

난 사람이 진짜로 끙끙 소리를 내며 앓는 걸 처음 본다.

문제는 저 사람이 내 아버지다.

“긴장이 풀리시면서 몸살감기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허어.”

몸이 약한 건 내가 아니라 공작 같다.

“약 한 첩 더 짓자.”

“안 그래도 미리 주문해 두었습니다.”

역시 집사다.

‘그나저나 저렇게 아프시다니 로나터스 놈 족치기는 좀 미뤄야겠네.’

“집사가 고생 많았어.”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고생했을 게 뻔한데.

집사도 심약한데 더 심약한 공작 챙기느라 맘고생 많이 했을 거다.

고생 많았다는 뜻을 담아 나는 집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가씨…….”

집사가 코를 훌쩍였다.

나는 어른스럽게 못 본 척해 주며 대공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을 향했다.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창문 너머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이었다.

“죄송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건강 문제로 현재 침상을 벗어나기 힘드신지라 인사드리기 어렵겠습니다.”

후후.

미래의 조각을 목격한 것도 벌써 한 손으로 세지 못할 횟수를 넘었다.

초보처럼 말을 하다 뚝 멈춰 의아함을 자아내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보자, 보자.’

연이은 폭음이 빗발쳤다.

타깃이 명확히 정해진 공격이었다.

“이거 놔라!”

“각하, 침착하십시오!”

벨리악이 저를 간절하게 붙드는 손들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샤를, 샤를!”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벨리악은 절절하게 후회했다. 차라리 대공저에 아이의 신병을 보름만이라도 더 부탁할걸 그랬다고.

엘루이든이라면 공격 마법을 무효로 만드는 마법진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최소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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