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제기랄.
인생 난이도가 너무 험난해서 눈물이 다 났다.
찔끔 눈물을 훔치며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내 침대에 몸을 날렸다.
무슨 정신으로 대공을 배웅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먹으로 침대를 퍽퍽 구타하고는 돌아누워 이번엔 천장을 노려봤다.
‘생각해 보자.’
내 목숨을 노릴 만큼 나를 싫어하는 사람.
“……너무 많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일 마음을 갖는 건 꼭 그 사람이 싫어서만은 아니다.
나를 싫어하거나 내가 골골대면 이득이면서도 리엔타에 공격을 가할 수 있을 만한 사람.
‘황제, 황후, 에리히 로나터스, 입 근처에 점 난 남자, 그리고 ‘그’.’
“…….”
이것도 썩 범위가 좁혀진 것 같지는 않았다.
다시 침대를 퍽퍽 때리며 나는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살아남기 힘들군.”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말겠다.
불끈 주먹을 쥐어 의지를 다졌다.
‘그럼…….’
일단 잠부터 자자.
자고로 맑은 정신이어야 뭐든 할 수 있는 법이다.
* * *
이튿날.
“아가씨,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엉.”
문 근처에서 똥강아지처럼 빙빙 맴돌 때부터 비척비척 눈을 떠 겨우 앉았다.
“아가씨, 다름이 아니오라, 허억!”
“왜 그래.”
“흐윽, 아가씨이…….”
집사는 염소가 됐다.
“샤를, 어제는 내가……. ……샤르으으을.”
누가 사이좋은 관계 아니랄까 봐 공작도 같은 종족으로 변신했다.
“샤를, 이 아비는 그렇게 아프지 않다.”
“그렇습니다. 각하께서는 오늘도 아침 식사를 세 접시나 드셨습니다!”
“그래, 세 접시나 먹었단 말이다, 아가.”
“밤새 눈물 훔치시느라 얼마나 따가우셨을지…….”
촉촉하게 말한 집사는 마침 세숫물을 들고 오던 시녀에게 차가운 얼음을 천에 싸 가져오라고 명했다.
“갔다 와, 갔다 와.”
세안 시중을 들려는 시녀더러 가 보라고 하고는 또 혼자 벅벅 세수를 했다.
아저씨 둘의 주책을 교수의 강의처럼 들으며, 그냥 하도 자서 이런 거라는 변명은 하지 않았다.
마카롱 두 개를 달고 말하려니, 걱정 끼칠까 봐 염려돼 애써 아니라고 하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될 게 뻔히 그려진 탓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앞으로 공작이 건강관리에 힘쓴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이다.
“그나저나 다름이 아니오라 다음에 하려던 말은 뭐였어?”
“아! 다름이 아니오라,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설마 내 손님이냐고 검지로 나를 가리키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아주 의외의 손님이어서…….”
‘집사가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할 성격은 아닌데.’
고위 귀족 가문에서 오래 일한 인물답게도 두괄식으로 요점만 콕콕 집어 말하는 능력자였다.
‘흐음?’
얼굴을 닦던 수건을 내렸다.
수심 깊은 얼굴로 집사가 손님의 이름을 밝혔다.
“로나터스 후작 영애입니다.”
* * *
라베트는 침착한 얼굴로 정면을 직시했다.
광활하다는 표현이 적합한 커다란 응접실 내부에는 오직 그녀뿐임에도, 흐트러짐 없이 곧은 자태는 로나터스의 자랑이라는 애정 어린 별칭이 과찬이 아님을 가리켰다.
“아.”
문이 열리자 라베트가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하는 라베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담했다.
“됐어. 첫 만남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도 없고.”
샤를리즈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살구색 실내 드레스에 숄을 두른 단정한 차림새였지만, 찻잔이 아니라 술잔이 더 어울리는 특유의 느낌은 여전했다.
“긴 서두 나눌 것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건 해 줄 수 있겠지?”
라베트가 의자에서 일어나 샤를리즈의 근처까지 다가갔다.
“제 오라버니께서 짧은 식견으로 공녀님께 저지른 행태, 사죄드립니다.”
금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졌다.
샤를리즈가 고개 들라고 하지 않는다면 들지 않을 듯이 미동 없었다.
“영애도 알고 있었군. 고개 들어. 영애가 사과할 일 아니야.”
“아니요. 제 가족이 저지른 일이니 마땅히 제 잘못이기도 합니다.”
라베트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이어 갔다.
“제 오라버니지만 현명한 분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쁜 심계로 공녀님을 몰아세우려던 속셈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저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 않았을 거예요.”
“영애.”
샤를리즈가 섬세한 눈매를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군. 왜 영식의 잘못을 영애가 사과하고 다니는 거지?”
“그야…….”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장차 로나터스 후작이 될 인물. 가문을 이끌어 갈 수장이 될 터였다.
부친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한 가문에 묻을 흠결은 최대한 막고 싶었다.
“공녀님, 배상금은 원하시는 대로 지불하겠습니다. 다만, 부디…….”
“배상금보다 다른 게 좋아.”
이 제의를 수락하겠다는 뜻이다. 라베트의 금안이 안도로 물들었다.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요?”
“너.”
샤를리즈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
전혀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예법을 모르던 어린 시절처럼 라베트는 당황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말았다.
동그래서 순한 인상의 눈을 한층 더 깊어 보이게 하는 풍성한 속눈썹이 마구 팔랑였다.
“평생을 저당 잡기에는 후작 영식이 그만큼의 가치가 없지.”
잠시 고민한 샤를리즈가 피식 웃었다.
“한 달로 하자. 그 한 달 동안 나 말고 다른 사람, 그 누구도 만나지 마. 후작저에만 있어. 내가 찾아가면 무조건 만나야 해.”
그건 굉장히…… 쓸모없는 예시들이었다.
“공녀님께서 하시는 질문에 제가 모두 대답하는 것도 포함일까요?”
샤를리즈가 무심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연 순간, 색이 옅은 녹안과 곧장 마주쳤다.
어쩌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되짚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베트는 이것만은 꼭 확인해야 했다.
“글쎄.”
놀랍게도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샤를리즈였다.
그러나 기세가 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흥미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라베트는 직감했다.
“그건 내키지 않는데.”
과연 그 예상이 맞았는지, 심드렁히 중얼거린 샤를리즈가 이만 가 보라며 성의 없는 축객을 내렸다.
* * *
라베트가 돌아가고, 나는 냉수 한 잔을 해치웠다.
타악―
유리잔이 테이블에 저 홀로 경쾌하게 부딪혔다.
“이 착해 빠진 바보!”
원작에서 카타리나 황후의 부하는 하나뿐이다.
테오도르 바나첼.
최종 악역의 편이 고작 한 명일 리가 없는데도 저런 이유는 간단하다.
카타리나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닌 도구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일단 노아만 해도 그렇다.
그리고 원작에서 노아의 다음 타자는 다름 아닌 라베트였다.
‘샤를리즈를 완전히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한 카타리나 황후에게 라베트는 더는 필요 없어졌으니까.’
대공의 약혼녀가 된 이리안보다 샤를리즈가 나은 건 타고난 지위뿐이다.
그 지위를 활용할 수 있는 방향은 사교계 정도다.
그러니 안 그래도 평판 나쁜 샤를리즈가 사교계를 손에 넣는 고난 길에, 샤를리즈의 대척점에 섰다며 칭송받는 라베트는 그저 방해물일 수밖에.
‘어떻게 처리했더라…….’
“아, 기억났다.”
고민한 게 무색하게도 바로 떠올랐다.
워낙 못된 방식이었던 탓이다.
후작을 방조하고 있다가, 끝내 죽이고 그걸 라베트에게 덮어씌운다.
모든 증거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어 처형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카타리나 황후는 샤를리즈의 비교 대상으로 추후 언급될 가능성이 높은 라베트를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제거해 버렸다.
“……차라리 계속 모르는 척하지.”
그랬으면 이 찝찝한 기분은 털어 낼 수 있었을 텐데.
책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은 이럴 때마다 참 별로였다.
누군가가 숨기고 싶은 과거와 누군가의 예정된 비극을 알고 있다는 게 말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나는 조금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일단은 후작저에 자주 드나들자.”
점이 입가 주름에 파묻혀 가려질 만큼 남자는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