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피넛 남작 영식을 제 평생의 뮤즈로 삼을 거예요.”
첫 만남 이후로 항상 다감한 빛이 감돌던 다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주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길이길이 최상의 상태로 보관돼 전해지도록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에, 에리히인데.
엉거주춤 손을 뻗으려다 나는 생각을 달리했다.
‘라이넛 놈 때문에 사샤가 나가떨어져서 상처가 난 건 맞지.’
게다가 목표가 있는 삶, 나쁘지 않아.
그 목표가 복수같이 스스로를 진창으로 끌어들이는 종류라면 허겁지겁 말렸겠지만, 저 정도는 원동력이 될 것 같았다.
“거두가 된 이리안의 모습, 기대할게.”
“예!”
이리안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로제타는 짜게 식은 눈을 하고 있으려나.’
어떤 눈을 하고 있든 로제타 마음이기는 한데, 이리안이 발견하지는 못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슬쩍 돌린 시선 끝에 로제타가 걸렸다.
그리고 로제타는…….
“얼마 전 문을 연 가게의 붓이 그렇게 괜찮다고 하더라!”
“정보 고마워!”
똑같이 눈에 화르르 불꽃을 심은 두 명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던 나는 뒤늦게 주먹 쥐며 동참했다.
“돈은 내가 댈 테니 걱정 마!”
……그렇게 휩쓸려 이렇고 저렇고 요렇고 그런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공작은 흐뭇한 얼굴로 빠져, 셋이 함께 저녁 식사도 먹었을 즈음 정신이 돌아왔다.
“…….”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로 묵묵하게 흰 빵을 밀어 넣었다.
“공녀님, 고기는 한 번도 안 드신 것 같아요?”
“별로 안 좋아해.”
“……예에에?”
로제타가 입을 떡 벌렸다.
‘놀랄 일인가?’
나는 흰 빵으로 숨통을 묵묵하게 틀어막았다.
이전 생에 고기는 질리도록 먹었다. 채소와 흰 빵만큼이나 고기도 비싸지만, 스테이크 썰 때 어색해 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주변을 샥샥 둘러본 이리안이 목소리를 낮춰 질문했다.
“체중 조절하라고 강요받으시는 거예요? 이렇게 날씬하신데요?”
“아냐.”
“하긴, 공녀님은 고기가 질릴 만하시겠어요.”
여전히 어두운 눈의 이리안과 달리 금세 납득한 로제타는 엄지손톱만 하게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꾹 눌러 찍었다.
‘그러고 보니 로제타는 숙부 족칠 생각 없는 건가.’
서명 날인 조작 건에 대한 배상은 미루고 있다고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도 3차까지 마치니 바깥은 어느새 어두웠다.
“괜찮으면 자고 가.”
“어머, 정말요?”
로제타는 당연히 빼지 않았고.
“저, 이런 거 꿈이었어요.”
이리안도 수줍게 웃었다.
“나도. 친구들이랑 같이 밤새워 놀고 싶었어.”
잠깐 눈을 깜빡인 이리안이 보조개가 폭 파이도록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입욕제 이리안에게도 줄게. 사용해 봐.”
시녀에게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얼른 유창한 말솜씨를 펼쳤다.
이리안은 홀린 듯이 따라갔다.
“제게도 주실 거지요?”
“원하면 집에 가져갈 것도 따로 줄게. 그전에 대화 좀 나누지.”
근처의 아무 방이나 열었다.
그리고 흠칫했다.
‘……안 들어오겠는데?’
리엔타는 사용하는 모든 방의 불은 켜 두는데, 이 방은 따로 용도가 없는지 어두웠다.
불부터 켜고 다시 열 생각으로 슬쩍 문을 닫으려던 때였다.
“이리안도 보내고 하실 얘기라면 하나겠네요. 숙부님 이야기지요?”
로제타가 문을 밀며 선뜻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엉.”
로제타가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하냐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갔다.
“로제타, 으슥한 곳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싫어하죠.”
“여긴 안 으슥해?”
“리엔타 공작저가 으슥하면 저희 집은 뒷골목이게요?”
“그런가.”
“그런가라고 하시니 기분 또 묘하네. 그나저나 하시려던 이야기가 뭐예요?”
“아, 그거.”
푹신한 소파에 기댄 등을 떼며 나는 손깍지를 꼈다.
“자작은 내버려 둘 생각인가? 배상금 받아내야지.”
“어머.”
로제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오리처럼 삐죽 내밀었다.
토라진 건가 싶었는데 슬며시 미소 짓느라 꿈틀거린 입꼬리를 포착했다.
‘뭐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로제타가 새침하게 말했다.
“조금 더 있다가 하려구요. 얼마나 나올지 벌벌 떠는 거, 일찍 끝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하.”
나는 깍지 낀 손에 턱을 괴며 씩 웃었다.
“그래도 너무 미루지는 마. 그랬다가는 그날이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니라서 실망할 수도 있거든.”
“꼭 참아 본 적 있는 분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러다 로제타가 돌연 얼굴을 구겼다.
“아, 이러려던 게 아닌데.”
작게 말해서 뭐라 말했는지 잘 안 들렸다.
“못 들었어.”
“……고맙다고요.”
그렇게 말하는 귀가 붉었다.
저것보다 긴 말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되묻지 않았다.
* * *
이리안과 로제타의 체력은 대단했다.
장정 다섯 명이 굴러도 넉넉할 침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건 나였다.
자는 중간중간에도 둘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려와 감탄했던 감상이 희미한 기억 속에 뚜렷했다.
‘대단한 체력!’
누구는 아침저녁마다 연병장을 달려서 겨우 얻은 체력을 타고나다니.
인생이란 이렇게나 불공평하다.
“우리 아가씨, 오늘은 늦잠을 주무셨네요.”
멜리사 부인이 다정하게 웃으며 꼼꼼한 손길로 내 세안을 도왔다.
“두 영애님들은 아침 식사 중이세요. 아, 어쩌면 마치셨을 수도 있겠지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사람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는 감상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걸 나는 방금 배웠다.
그렇게 아침과 점심까지 먹여 보내고, 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죄송하지만 혹시 선약으로 방문하시는 길이십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마차 창문을 열었다.
“약속할 필요가 없는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마차의 인장을 확인하던 기사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돌연 결연한 눈을 했다.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어.”
그냥 들여보내 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냥 내 바람이었나 보다.
머쓱하게 앉아 있기를 잠시.
아무리 봐도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백합을 문 표범이 양각으로 장식된 은색 철제 대문이 열렸다.
* * *
“공녀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
“제가 최근에 가장 선호하는 찻잎이에요. 공녀님께도 소개해 드리고 싶었답니다.”
“…….”
“향이 꽤 좋아요.”
“얼음 넣고 차갑게 해서 먹고 싶어.”
잠시 눈을 깜빡인 라베트가 살짝 웃었다.
“그러시겠어요? 그럼 저도 그렇게 먹어 봐야겠네요.”
청명한 종소리가 울리는 동시에 문이 열렸다.
밖에서 바로 대기하고 있었나 보다.
‘라베트는 사랑받는 아가씨구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왜 입술이 터졌을까.
화장으로 잘 가렸지만 한때 내가 몸담았던 업계 쪽이라서 그냥 보였다.
[그 한 달 동안 나 말고 다른 사람, 그 누구도 만나지 마. 후작저에만 있어.]
그런 말까지 했다.
그럼 후작 영애인 라베트에게 손을 댈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최대 세 명으로 좁혀진다.
후작, 가문의 실권자, 그리고 오라비인 에리히.
엄밀히 말하면 나랑 관계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후작이 눈 감고만 있는 건지, 진짜 의식 잃은 건지만 확인하면 끝이니 말이다.
게다가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간섭은 그저 오지랖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른 말로 돌렸다.
“영식은 부재중인가?”
“예, 친우분들과 약속이 있어 클럽에 가셔서…….”
놀기로 약속한 거겠지.
내게는 마침 잘된 일이었다.
“연락을 취할까요?”
그러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에리히 놈이 올 때까지 머무를 이유가 생겼다.’
물론 그냥 있어도 되겠지만, 그럼 나중에 생각했을 때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는 문제였다.
왜 굳이 죽치고 앉아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얼마 전에는 비가 와서 정원을 복구하느라 난리 법석이었어요.”
라베트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하는 말은 다 재밌었지만, 나는 애써 흥미 없는 척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심심하네.”
“정원을 산책하시겠어요?”
창문으로 바깥을 확인한 라베트의 눈이 가라앉았다.
“날이 흐리더니 결국 비가 오네요.”
혹독한 일정으로 외출한 보람이 있었다.
“그럼…….”
잠시 고민한 라베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공작저에 비하면 소박한 크기지만, 로나터스도 역사가 제법 깊어 보실 거리가 많으실 거랍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택 구경을 도와 드려도 될까요?”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이 계속 저자세로 나오니 마음이 자꾸 쿡쿡 쑤셨다.
어떤 최후를 맞을지 알고 있으니 더 이런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심경으로 라베트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중이었다.
‘……어라.’
이 방문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여기는 저번에 봤는데.’ 정도의 말을 하여 가주의 침실이 위치한 층에 입성하기 위한 단계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성실한 라베트는 본인의 침실까지 내게 보여 주려나 보다.
“저기 암갈색 문이 제 침실 문이랍니다.”
“그럼 저 자주색은?”
“저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뗀다.
“제 부친이신 로나터스 후작 각하의 침실이에요.”
“가족과 사이가 좋나 보군. 가주와 같은 층을 사용하다니.”
“네.”
이어지는 질문은 진정 궁금해 한 것이 아니라 화제 전환을 위해 한 것에 불과했다.
“공녀님도 그러시죠?”
“아니.”
공작비가 사망하고, 공작이 참전으로 부재중이었던 때.
저택 내부 사정의 실권자나 마찬가지였던 유모가 내 침실을 한 층 내렸고, 그렇게 굳어졌다.
‘이전 생 기억하자마자 바로 공작령으로 튀었으니 방 옮길 새도 없었지.’
흠. 이대로가 낫겠다.
저번에 본 미래의 조각으로 짐작하건대 내 생사가 어찌 될지 모르니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