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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47) (47/232)

47화

‘샤를리즈가 줄곧 밀어냈던 원작에서도 그토록 슬퍼했다고.’

“……네.”

‘계속 너무 단답으로 했나?’

라베트는 착해서 모략질하지 않을 뿐, 객관적으로는 사교계에 군림하는 영애다.

대화가 길어지면 이쪽만 탈탈 털릴 느낌이라 말 아낀다는 게 싸가지만 말아 먹고 말았다.

“혹시 약 같은 거 필요하면 말해. 리엔타가 자주 취급하거든.”

눈을 몇 번 깜빡인 라베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 계셨군요. 도련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에리히 놈이 왔다.

* * *

‘다 이긴 판이었는데!’

저번 일로 대대적인 망신을 당하고 기분 전환을 하고자 외출한 길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공녀가 방문할 건 뭐란 말인가.

“무슨 생각이지?”

에리히가 다리를 달달 떨며 엄지손톱을 잘근거렸다.

[오라버니께서 잘못하신 게 맞아요. 앞으로는 로나터스를 생각하시어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훈계하듯 말하던 동생까지 떠오르니 기분이 한층 저조해졌다.

역시나 끝까지 모르는 척 클럽에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에리히는 혀를 찼…….

“뺨 대.”

차려다가, 뜬금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인사를 안 하려던 게 아닙니다!”

“지금도 안 하고 있잖아.”

“……로나터스의 에리히가 리엔타 공녀를 뵙습니다.”

마치 인사 집착광처럼 굴어 댄 게 언제냐는 듯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샤를리즈가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런데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십니까?”

“영애가 저택 구경시켜 줬어.”

“라베트. 너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괜히 하고 그래!”

“맞아. 영애가 내게 그날 일도 대신 사과하더군.”

“예예? 아, 네. 들었습니다. 라베트가 원래 가문의 일을 챙기고는 합니다.”

가문 대 가문으로 명명하여 불편한 화두가 떠오르는 것을 피하려는 얍삽한 시도였다.

공녀도 가문의 일로 커진다면 피차 불편할 테니.

“그래…….”

에리히가 슬쩍 덧그려진 미소를 헛기침하며 애써 감췄다.

“공녀님.”

라베트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 일은 가문 간의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실수라고 하기 송구스러우나, 에리히 오라버니께서 실수로 성물의 특성을 착각하시어 일어난 일에 불과합니다.”

다 되어 가는 일에 초를 친 동생을 에리히가 흘겨보았다.

“라베트가 천지 분간 못 하고 끼어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전의 말은 없던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럼 로나터스는 신성한 사냥제에서 불확실한 성물까지 동원해 리엔타를 공격하려던 거로군.”

“……예?”

이쯤에서 샤를리즈는 에리히와 더 대화할 의욕을 잃어버렸다.

“아,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라베트의 말이 맞습니다.”

“귀찮게 말 여러 번 하게 해.”

짓씹듯 중얼거린 샤를리즈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바짓단 걷어.”

“예?”

“그럼 뺨 맞을래?”

허겁지겁 제 뺨을 가린 에리히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공녀도 내 부친께서 쓰러져 계신다고 우리를 괄시하는 것입니까? 다른 가문에서는 이러지 못할 거면서!”

‘……얘가 왜 이래.’

아니, 이 정도면 그 무례를 엄청나게 봐주고 있는 거였다.

심지어 실제로 때리지도 않았다!

샤를리즈는 그저 얼이 빠져 멍하니 있던 것뿐이지만, 겉으로 보자면 그저 차갑게 굳은 얼굴이었다.

서러워진 에리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 오라버니의 추태를 모두 목격한 라베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많이 당황스러우셨지요? 제가 오라버니께…….”

“영애.”

“네?”

“생각해 봐도 도저히 모르겠거든. 앞으로 또 영식이 뛰쳐나가면 곤란해질 테니 알아 두고 싶기도 하고.”

샤를리즈가 서늘하게 말했다.

“영식이 과민 반응한 이유는 내가 종아리를 보여 달라고 했기 때문일까?”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라베트가 느리게 얼굴에 표정을 그려 넣었다.

“그건…… 죄송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남매라고 해도 오라버니의 생각을 제가 모두 알지는 못하니까요.”

“영애의 말이 맞아.”

선선히 수긍한 샤를리즈가 시간을 흘깃 확인했다.

“너무 오래 있었군. 이만 돌아가 보겠어.”

“예. 조심히 돌아가세요, 공녀님.”

퍽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싶던 샤를리즈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렸다.

* * *

나는 귀가하자마자 노아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훈련하느라 피곤할 텐데 불쑥 불러서 미안해.”

“아닙니다, 주인님.”

기쁘게 웃은 노아가 용건을 물었다.

“로나터스 후작가의 실권자에 대한 조사를 부탁할게. 집사일 것 같기는 한데, 애매해서.”

사실, 라베트의 터진 입술을 보고 나는 가장 먼저 에리히를 떠올렸다.

발끈하는 놈이니 제 분에 못 이겨 손을 댔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십니까?]

[라베트. 너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괜히 하고 그래!]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에리히가 한 짓 같지는 않다.’

인성 파탄 난 놈은 성격대로 제 여동생 걱정도 저딴 식으로 했다.

‘종아리 맞아서 걷기 힘들었을 텐데. 몰랐다고는 해도 미안하네.’

원작에서 라베트가 처형당한 후.

로나터스 후작가는 빠르게 몰락해 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패륜을 저지른 로나터스란 신의를 기대할 수 없는 가문인데다, 카타리나 황후가 뒤에서 손까지 쓰니 막을 도리가 없던 거다.

그 와중에도 에리히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했다.

‘돌이켜 보면 그게 의외야.’

작위를 판다면 아주 큰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원작을 읽을 때는 별생각이 안 들었다.

주조연도 못 되는 조연이라 안중 밖이었던 데다, 워낙 말썽 많이 부린 놈이라서 평민 된 후 미래가 걱정되긴 했나 보지, 정도쯤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저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에리히의 선택은 부질없었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골목에서 결국 짧은 생을 마감했으니까.

“페르난 백작에 대한 조사와 병행할 수 있겠어?”

내가 생각에 잠긴 새, 함께 생각에 잠겼던 건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노아가 씩 웃었다.

“맡겨 주십시오.”

* * *

자그마한 손이 꽃잎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리반은 절로 헤벌쭉 웃고 말았다.

비록 몹시 치열한 전투였지만 최선을 다해 임하여 승리한 보람이 있었다!

“그 꽃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예뻐요.”

“꺾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꽃은 여기를 더 좋아할 거예요. 옆에 가족들이 있으니까요.”

말문이 막힌 리반의 표정은 미처 보지 못하고, 사샤는 자그마하게 웃었다.

“곧 샤를 님도 오시니까요. 함께 와서 보면 돼요.”

“아, 그렇지요.”

벌써 사흘이 흘렀다.

저 사흘 주기를 정한 건 공녀 쪽이었다.

사샤는 일주일을 말했었다.

누가 봐도 폐가 될까 봐 최대한 늘리고 늘린 주기에, 샤를리즈는 반박했다.

[사흘이 좋아. 만난 날은 만나서 기분 좋고, 이튿날은 만났던 거 생각해서 기분 좋고, 그다음 날은 내일 만날 거 생각해서 기분 좋으니까.]

……굉장히 빈약한 근거 같지만, 사실에 입각한 주장이었다.

정말로 사샤가 꼭 그랬다.

“곧 공녀님이 오시겠군요. 들어가시겠습니까?”

“네에.”

얌전하게 대꾸한 아이가 리반이 내민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아이는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착실히 배워 가고 있었다.

따뜻한 집. 다정한 가족. 상냥한 말씨. 절대로 돌변할 일 없는 사람들.

그런, 사소하고도 소중한 부분을.

* * *

타이밍이 잘 맞는 건지, 아니면 칼릭스가 외출을 잘 안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로서는 좋았다.

“얼마 전, 로나터스 후작저를 방문했습니다.”

사샤를 노리고 계획된 모략의 실행자는 로나터스 후작 영식이지만, 그는 그저 행동만 했을 뿐이라는 데에 칼릭스도 이견이 없었다.

“혹시 로나터스 후작도 동참한 건가 싶었는데, 의식이 돌아왔는지는 실제로 확인하지 못해 아쉽더군요.”

커다란 구름처럼 헝클어진 사샤의 머리를 애써 가라앉히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유혹에 약한 게 아니야.’

머리를 쓰다듬으면 행복하게 웃는 앳된 얼굴이 너무도 중독적일 뿐.

“신관이 후작저에 자주 출입하고는 있어.”

후작을 치료하는 것인지 아니면 라베트의 몸에 났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겠다만.

나는 대화가 정리될 무렵, 티 나지 않게 피하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이제 노하우가 생겼다고.’

처음에 바로 눈 마주치면 대화를 놓치기 쉬워서 이때쯤에 하는 게 낫다.

산란한 햇살의 파편이 박힌 듯 짙푸른 눈이 빛났다.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할 새도 없이, 곧바로 미래가 시작됐다.

얼굴을 구긴 리반이 침통하게 짓씹었다.

“사샤 님께서 결국 알아 버리고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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