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다만, 내 뒤에 서 있는 노아를 굳은 얼굴로 보기는 했다.
“응접실에 저 시종도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니.”
“하면 어째서 시종을 대동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 짐을 내가 들 수는 없잖아?”
집사에게는 아깝게 됐다.
이 기회에 응접실에 들어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볼 생각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노아를 문 옆에 세워 두고 응접실에 들어서자, 의자 근처에 서 있던 라베트가 얼른 다가왔다.
“이른 시간에 죄송해요, 공녀님.”
“미안할 필요 없어. 그보다 어서 가지.”
“네, 3층은 사용인들이 다니지 못하도록 미리 말을 해 두었습니다.”
가주의 침실이 있어 힘들었을 텐데 용케 했다.
“공녀님이 편하게 쉬고 싶다고 하셨다고 하니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어요.”
‘이 박살 난 평판,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역시 놓치기 아까워.’
그래도 혹시 모르니 3층 복도에서 노아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지를 봐 주기로 했다.
열쇠를 돌리자 철컥하며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라베트가 문을 열었다.
“아버지.”
깡마른 손을 라베트가 소중히 맞잡았다.
“다른 가문의 일원은 오랜만에 만나시죠? 리엔타 공작가의 샤를리즈 공녀님이세요.”
“처음 뵙습니다, 로나터스 후작 각하.”
라베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예법에 맞춰 인사했다.
“리엔타의 샤를리즈입니다.”
라베트는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손을 꼭 잡고 이것저것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오늘은 햇빛이 어느 정도로 따사로웠는지부터 시작해서, 제법 굵직한 소식도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가주의 침실이니 분명 온갖 가구들과 장식품들이 있었을 터.
그러나 지금은 침대와 옆의 협탁, 그리고 한 명이 앉을 수 있을 작은 의자 말고는 별다른 가구가 없었다.
하물며 햇살을 가리는 커튼조차도.
‘라베트가 고생 많이 했겠는데.’
라베트도 이 방 안에 심약한 환자에게 해로운 물건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눈치다.
하나하나 빼낼 때마다 기대하고, 실망했겠지.
나는 휑한 방을 보는 건 그만두고 후작의 얼굴과 드러난 팔을 살폈다.
그는 그저 긴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튜베롯으로 만든 독은 죽음 직전까지 검출되지 않습니다. 외관상의 변화도 없지요.]
‘다만 한 가지, 유념할 건 꽃잎 끝이 갈색으로 시든 튜베롯을 목표물의 근처에 두면 안 된다고 했지.’
그게 이 독의 유일한 해독 방법이니까.
‘……정말로 티가 하나도 안 나.’
어떡하지.
외관상 변화가 하나도 없는 이 상황에서 콕 집어 말했다가는 라베트가 분명 의심할 거다.
‘둘러댈 거라도 없으려나.’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데, 문득 후작의 머리카락에 시선이 닿았다.
“라베트. 각하의 머리카락 색에 원래 푸른빛이 돌았어?”
“아? 아니요. 본래는 에리히 오라버니와 같은 고동색이셨어요.”
그러고 보니 에리히 놈의 머리 색이 꽤 짙었다.
“독을 중화하는 약이 너무 강한 탓에 머리카락 색이 옅어지는 거라고 의사가 설명했답니다.”
오랜 시간 조금씩 복용한 독 때문인지 아니면 생기 잃어 옅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 말로 알 수 있는 건 있었다.
‘중화시킬 수 있는 것에 독을 섞어 먹여 왔던 거로군.’
튜베롯은 극독이다.
한 번에 왕창 먹이고 3년간 끌고 올 수 없을 만큼.
“라베트, 이건 해독제 때문이 아니야.”
노아가 들고 있을 마도구 방해 장치가 혹시 모르는 상황에서 이 말도 가려 주고 있을 것이다.
“후작 각하의 상태가 나빠졌던 적, 있지 않았어?”
“그걸 공녀님이 어떻게…….”
라베트가 가주의 침실 내부를 이렇게 비울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화분 같은 거에 부어 보기라도 했으면 바로 알았을 테니.’
일부러 어느 정도 풀어 줬던 거다.
‘나쁜 놈들.’
나는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꽃을 꺼냈다.
혹시 해 되는 것 같은 거 보이면 문질러 보려고 슬쩍 가져오기를 잘했다.
“로나터스 정원에도 꽃 많은 거 아는데, 갑자기 꺾으면 이상하게 볼 테니까 이거 줄게. 해독제 받으면 거기 이 꽃을 넣어 봐.”
라베트가 흔들리는 눈으로 꽃을 받아 갔다.
* * *
“아가씨, 저녁 식사는 하지 않으시어요?”
“응, 점심에 공녀님을 뵀더니 아직도 긴장된 것 같아.”
“아가씨…….”
안쓰럽다는 듯 바라본 시녀가 더 묻지 않고 물러났다.
탁.
침실 문을 닫고 마침내 홀로 남은 라베트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스르륵 문을 타고 미끄러지는 몸이 조금씩 떨려 왔다.
‘……꽃이 녹았어.’
극독이 섞인 액체를 부친에게 더는 줄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버리기에는 3층 높이.
혹 지나가는 사용인에게 떨어지거나, 부친의 죽음을 설계하고 있는 이들에게 들킨다면 돌이킬 수 없어진다.
목이 아려 오는 이유는 독을 삼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울음을 애써 참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로나터스의 의사 역시 이 일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눈치채지 못한 새 빼앗긴 것들이 많았다.
숨을 헐떡인 라베트는 새벽녘이 밝아 올 때까지 그대로 웅크려 있다가, 시녀가 깨우러 오는 시간이 가까워지자 침대에 앉았다.
“어머, 아가씨. 벌써 일어나 계셨네요?”
“응, 햇빛이 눈부셔서.”
곱게 접히는 눈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 * *
라베트는 실행력이 빨랐다.
그럴 것 같아서 어제는 귀가하자마자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서 체력을 비축했다.
“공녀님께서는 늘 방문해 주시는데, 매번 편지로만 말씀드리기 죄송스러워서요.”
“상관없어. 대신 내 마차로 가지.”
그렇게 로나터스의 마차는 뒤를 따라오는 중이다.
푹신한 질감의 소파는 고된 여정에도 편안함을 선사할 테지만, 정작 내부 분위기는 결코 편안하지 않았다.
일단, 조곤조곤한 특유의 말투로 이야기를 끌어 나가던 라베트가 고요했다.
맞은편에 앉은 라베트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고만 있었다.
‘아이고.’
웬만하면 편안하게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싶었지만, 곧 후작저에 도착할 터였다.
노아를 또 데리고 들어가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할 테니, 이번에는 혈혈단신으로 찾아가는 길이라 깊은 대화는 여기서나 가능하다.
“……독이 맞았어요.”
라베트도 알고 있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독이라는 거, 공녀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예전에 찾아본 독의 증상을 후작 각하께서 보이더군.”
책에서 봐서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어젯밤 나는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 이야기 한 편을 만들었다.
“난 실은 영애를 죽이고 싶었거든.”
시작은 일단 혼을 쏙 빼놓기다.
“대공 전하의 약혼녀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은 라베트, 그대였다 보니.”
샤를리즈가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그녀가 대공의 약혼녀로 거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야, 당연하다.
황족의 피가 흐르는 대공과 막대한 부를 두른 공녀의 결합.
황실이 바보도 아니고 가만두고 볼 리가.
“하도 극비라고 신신당부를 하길래 도리어 찝찝해져 손을 뗐는데 다행이네. 내게만 정보를 푼다고 했는데 그게 더 이상해서 말이야.”
로나터스 후작저 정원에서 튜베롯을 발견하기 전만 해도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나는 현재 전혀 라베트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의미를 담은 눈빛을 발사했다.
“그럼…….”
라베트가 메마른 입술을 뗐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던 말에 끝내 절박함이 스몄다.
“해독 방법도 알고 계신 거지요?”
“그래. 저번에 봤던 튜베롯이야.”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정원에 심은 꽃은 조롱의 의미였을 테니까.
“대신 조금 시들어 꽃잎 끄트머리가 갈색이 된 꽃이어야 해.”
“숙지했습니다.”
“잘했어. 꽃은 미리 꺾어도 돼. 하지만 완전히 죽지 않도록 화병에 넣고 있는 게 좋겠지. 그 향기를 후작 각하가 깊이 마시도록 해.”
꽃을 꺾는다면 특별히 그 꽃을 관리했을지도 모르는 정원사가 곧장 알아챌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는 일이다.
알아챌 즈음에는 모두 끝나 있을 테니까.
“한 번. 단 한 번이면 돼.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의식을 차릴 테니.”
라베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영애도 맡아. 꽃 한 송이 아깝다고 부친에게 양보할 필요 없으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나는 라베트가 신경 쓰였다.
그건, 어쩌면 그녀로부터 가족을 사랑하던 샤를리즈를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랬을 것 같았어.”
라베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때, 마차가 멈췄다.
“표정 관리해야지, 라베트.”
……말하고 보니 뭔가 출세에만 눈먼 악덕 부모가 할 법한 대사였다.
라베트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식간에 얼굴을 정돈했다.
“공녀님, 감사해요.”
마차에서 먼저 내린 라베트가 내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긴장했는지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을 힘껏 쥐었다.
“이 은혜, 라베트 로나터스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 말은 각하께서 회복되고 하는 게 낫겠군.”
아직 제대로 해결된 거 하나 없는데 부담스럽단 말이다.
라베트가 부드럽게 웃었다.
* * *
“아, 아가씨?”
멜리사 부인이 얼른 뛰어왔다.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자세로 계셨던 거예요.”
무릎을 꿇고 양 손바닥을 침대에 대고 있던 나를 일으켜 세운 멜리사 부인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