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나이도 괜찮군. 리엔타의 상단에서 마침 회계 일을 할 아이를 구하고 있어. 너는 어때?”
“저는…….”
잠시 고민한 로단테가 대답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모레부터 상단에 나오면 돼. 말을 해 둘 테니, 내가 소개해서 왔다고 이름을 밝히도록 해.”
“예, 공녀님.”
나는 로단테의 잔잔한 주홍색 눈을 문득 응시했다.
역시나 또 보이는 건 없었다.
* * *
반쯤 넋이 나간 채, 저택에 도착하자 집사가 서둘러 마중 나왔다.
“아가씨, 로나터스 후작 영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상 못 한 소식에 눈매를 좁히자 집사가 덧붙였다.
“두 시간 전에 오셨습니다.”
라베트는 예법 그 자체다.
그런 라베트가 미리 연락도 없이 무작정 와서 기다리고 있다니 이상했다.
‘일이 어그러진 건가.’
“보육원으로 연락은 왜 안 하고.”
“아가씨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셔서 연락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후작이 죽은 건 아닌가 보다.
어리둥절하게 응접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라베트, 무슨 일…….”
나풀거리는 금색 머리카락이 시야를 채우고, 힘이 꽤 들어간 팔이 내 목을 휘어 감았다.
떠밀려 뒤로 넘어갈 뻔한 몸이 제자리에서 겨우 버텼다.
“라베트?”
품에 갇힌 채 눈을 굴리자, 라베트가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깨어나셨어요.”
“아.”
“아주 오랫동안 의식 불명이셨는데, 그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하셔서. 그래서.”
젖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라베트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보인 얼굴은 물기 한 점 없이 건조했다.
“감사해요, 공녀님. 이 빚,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결연해질 거 없는데.
하지만, 저래서 라베트 본인 마음이 편해진다면 굳이 손사래 칠 것 없는 일이다.
……라고, 미래를 몰랐던 저 당시의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이튿날.
로나터스 후작이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은 제도에 급속도로 퍼졌다.
멍청한 에리히가 물려받아 순조롭게 내리막길로 치달을 거라고 예상해 로나터스를 벌써 홀대했던 이들은 얼굴이 희게 질려 후작가를 드나들고자 야단법석이라고 했다.
[로나터스 내부에서는 숙청이 시작됐습니다.]
노아로부터 들었던 보고의 회상을 마쳤을 즈음.
때마침 응접실 문이 열렸다.
달려와 안기는 아이를 훌쩍 들어 올려 쓰다듬으며, 이번에는 곧장 칼릭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투둑.
손 안에서 깨진 유리잔의 잔해 위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 계집이 선황자를 찾았다, 입증했다. 이번에는 한 번도 찾지 않던 로나터스를 대뜸 드나들더니 후작이 의식을 찾았다. 이것이 모두 우연이라고 보나?”
“대공을 쫓아다니는 데 혈안이 되어 손가락질도 마다치 않던 머저리가 아닙니까?”
“그래, 대공을 쫓아다니는 데 혈안이었지. 사랑한다던가.”
그가 소리 높여 비웃었다.
앞에 서 있던 남자도 눈치를 보며 따라서 하하 웃었다.
“역시 그 뒤에 있는 건 칼릭스인가.”
“샤를리즈 리엔타라면 그치가 죽으라고 해도 진짜 죽을 계집이지요.”
아무런 대답도 없는 모습에 남자는 슬쩍 화두를 던졌다.
“역시 본보기로 샤를리즈를 죽이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당사자도 아닌 다른 이를 본보기로 죽여야 하는 겁쟁이인가?”
“아, 아닙니다!”
뒤틀린 심사를 표출한 그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비천한 무희의 아들은 도대체 무엇을 설계하고 있는가.
고민하듯 움직이던 손가락이 휘어지는 입술을 매만졌다.
뭐, 무엇이든 알 것 없다.
“너무 풀어 줬지. 선황제가 죽었을 때 같이 황천길로 가야 했을 목숨인 것을.”
“하면…….”
“감히 어디까지 넘보려고.”
깨진 유리 파편이 샹들리에의 빛 아래에서 오색으로 빛났다.
그걸 내려다보던 그가 문득 웃었다.
“곧 그 선황자의 생일이라고 했지.”
“예.”
가장 화려한 순간 불시에 다가온 죽음을 맞는 모습이란 퍽 볼만한 꼴일 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조금 겁을 주자고.”
평범한 어느 순간 선사할 생각이었다. 일상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