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52) (52/232)

52화

아무튼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해낸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제국 수도의 2거리 중 목 좋은 곳에 위치한 레스토랑, 아르펠스.

평민들은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 콧대 높은 레스토랑은 손님들의 급을 세세하게 나눠 받기로 유별났다.

누군가는 승률 낮은 도박이라 했고, 누군가는 허영심을 자극하는 좋은 작전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후자의 압도적 승리였다.

귀족들의 허영심에 맛 들인 소유주가 책정한 하룻밤 대관 비용은 엄청났지만, 간간이 결제하는 손님들이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대관하는 손님들은 늘 재력가였으나, 이번은 단연 달랐다.

“무려 공녀님께서 방문하시니만큼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레스토랑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지배인에게 맡기고 인생을 즐기던 소유주가 후다닥 달려 나와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것만 해도 그랬다.

그리고 그들은 곧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엘루이든 대공 전하께서도 오시면 오신다고 말을 해 줘야 할 것 아냐……!’

특히 소유주는 얼굴이 허옇게 질려 누가 본다면 곧 가게가 망한다고 생각하고 말 것이었다.

그런 경악 어린 분위기 속에서 대공과 공녀는 자리에 앉았다.

오케스트라 악단은 공녀가 거절한 탓에 마도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운율이 공간을 맴돌았다.

서버 대신 지배인이 직접 나가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은 수석 주방장이 직접 내어 갔다.

별문제 없이 식사가 끝나나 싶을 때였다.

갑자기 공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

“!!!!!”

소리 없는 경악이 공간을 맴도는 와중이었다.

“아차.”

대수롭지 않은 투로 중얼거린 공녀가 자세를 바꿔 한쪽 무릎만 바닥에 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으니 일어나, 공녀.”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공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

“!!!!!”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지배인과 소유주는 흔들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저거 설마……?’

‘더 보지 말자.’

‘그게 좋겠지요?’

‘공녀라면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우리의 기억을 지우겠다며 머리를 후려칠지도 모른다고!’

소유주의 얼굴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한층 희게 질렸다.

‘눈알도 잃고 싶지 않아!’

‘저도 아직 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그들은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갔다.

한편, 그 시각.

샤를리즈는 칼릭스에게 보이도록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오십 년 후 결혼을 전제로 약혼을 청합니다.”

“…….”

여기는 책 속 세상이니 소설을 참고하기로 했다.

단기간에 다 읽기는 무리.

때문에 샤를리즈는 달인을 찾았다.

바로 연애 소설을 몰래 읽으며 혼자 온갖 표정 짓는 취미―알고 싶었던 적은 없는데, 원작에 나오는 바람에 알게 됐다―를 가진 로제타였다.

[약혼? 아, 계약 약혼이요?]

‘로제타는 아주 좋은 스승이었다.’

[그거 말만 계약이지 다 결혼하게 돼요. 계약 약혼이라는 말 나오면 무조건 결혼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면 되는걸요.]

그것도 모르고 하마터면 계약 약혼하자고 말할 뻔했던 샤를리즈가 몸을 오소소 떨었다.

칼릭스도 몰랐던 게 틀림없다.

그 역시 앞에 ‘계약’을 붙였었으니까!

이곳은 이젠 그녀에게도 현실이 된 세상이지만, 엄연히 책 속이니 소설의 법칙을 피하는 게 심신 안정에 좋을 것 같았다.

“……소원으로 왜 저녁 식사를 말하는지 궁금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

“예.”

“소원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명색에 약혼인데 이런 거 없이 하자고 하기는 그렇잖아요.”

“공녀의 기준은…… 정말 모르겠어.”

반지 케이스를 자연스럽게 빼낸 칼릭스가 크기가 더 작은 반지를 빼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손가락에 와 닿는 금속성의 촉감이 선명했다.

빙긋 웃은 칼릭스는 샤를리즈의 왼손을 가볍게 잡고 약지 끝까지 반지를 밀어 넣었다.

“반지까지 준비해 주고, 고마워.”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지요.”

“그런데, 리엔타 공께서는 이 약혼에 관해 알고 계신가?”

“말씀드렸습니다.”

샤를리즈의 낯빛이 오후 2시와 3시 햇빛의 차이 정도만큼 어두워졌다.

부모에게 말도 없이 약혼자를 데려오는 불효자식이 될 수 없어 결심하자마자 말했더니, 부친을 기절시킨 불효자식이 되었다.

[겨, 결혼까진 절대 안 할 테지, 샤를?]

죽었는데 살아났다.

그것도 읽어 본 책 속 악역 영애의 몸으로.

심지어 그 책의 남자 주인공과 눈이 마주치면 미래가 보였다.

이런 상황이니 미래에 대한 확답을 채근하는 질문에 대한 샤를리즈의 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인생사는 알 수 없어서…….]

[가, 각하! 각하―!]

‘하얀 거짓말을 해야 했나.’

부친을 속이는 게 나은가, 진실을 말해 기절시키는 게 나은가…….

그때, 시야에 곧게 뻗은 손가락이 불쑥 보였다.

손끝부터 거슬러 확인한 얼굴은 조금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서운한데.”

예, 분부대로 해야지요.

그 얼굴에 홀려 샤를리즈는 냉큼 오른손으로는 반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칼릭스의 왼손을 경건하게 받쳤다.

난 얼굴에 홀려 망하는 중이 아니다. 이건 서로의 합의하에 하는 명목상 약혼이며…….

“…….”

샤를리즈는 스스로에게 비겁한 변명은 그만두기로 했다.

네 손으로 끼라며 거절하기에는 취향마저 개조해 버릴 수준의 대단한 얼굴이었다.

* * *

지배인은 어디를 갔었는지 종을 울리고도 한참 뒤에야 슬금슬금 나타났다.

“좋……. 커흠흠, 맛있는 식사 하셨습니까?”

로제타의 예언대로 리엔타보다 훨씬 못한 맛이었지만, 여기서 말할 만큼 내 사회성이 파탄 나진 않았다.

“꽤 괜찮더군. 다음에 또 오겠어.”

이 말을 하니 내 거금이 정말로 날아갔다는 실감이 났다.

조금 촉촉해진 눈으로 내부를 괜히 한번 횡으로 훑어보는데, 기둥에 몸을 기댄 남자가 보였다.

‘뭐야.’

왜 저런 창백한 얼굴이지.

어리둥절해서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꽤 늦은 시간이었다.

‘퇴근 시간 가까워져서 기운 없나 보네.’

내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굳는 몸에서 나는 눈치껏 눈을 돌렸다.

“어어?”

계산도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새 칼릭스가 해 버렸다.

“내게 잊을 수 없을 저녁을 선물해 준 답례야.”

뭐, 나는 돈 굳어서 좋긴 했다.

건물을 나서는 칼릭스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나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마차 같이 타는 건가?’

맞나 보다.

달칵, 마차 문이 닫히고 나는 시선을 들었다.

“이제야 나를 봐 주네.”

칼릭스가 깊게 웃었다.

“다시 말해 보려무나.”

“얼굴 뵙고 인사드리는 게 순리라고 생각되어 찾아뵈었습니다. 라베트 로나터스, 저는 이제부터 평범한 영애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간 부족한 저를 살펴 주시어 감사했습니다.”

“하.”

어쩐지 후작이 깨어나자마자 알현을 신청해 이상했지.

카타리나가 상냥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내가 그동안 바쁘다고 알현 신청을 거부해 마음이 상했니?”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럼 왜 이런 말을 해.”

“폐하.”

“참으로 우습구나. 이제 와 그대가 평범한 영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샤를리즈 리엔타가 대공저를 수시로 드나들고, 심지어 대공과 식사까지 하니 상황 자체는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그런데, 이상한 위화감이 들어 기분이 절로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살살 구슬리며 넘어갈 수도 있는 이 상황이 몹시도 짜증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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