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내가 공작을 좀만 더 닮았으면 놀라서 기절하느라 뒤로 넘어갔을 거다.
“다녀왔습니다.”
“샤를, 잠시 산책을 하겠느냐?”
추운데…….
그래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말 그대로 산책만 하려는 듯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기만 하던 공작이 멈춰 섰다.
“샤를.”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만큼의 눈으로 공작이 나를 응시했다.
“너는 분명 엘루이든 대공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게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으니 진실이었을 테지.”
아버지 눈치 보며 산 적 없다는 말을 들으니 양심이 아팠다.
“그런데 이번은 네가 먼저 대공과 약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혹,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애정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걱정이 높았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도무지 그럴듯한 거짓을 지어내고 싶지 않았다.
“알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약혼이 필요합니다.”
공작의 눈이 깊어졌다.
차라리 대공을 사랑해 매달리는 거라는 말을 하는 게 나았을까 싶을 만큼.
얼마간의 침묵 후, 공작이 잠긴 목소리를 내었다.
“어떤 일이든 너를 내던지지 않겠다고 약속해다오.”
부녀지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애정 어린 관심 때문일까.
공작은 때때로 한순간도 딸과 헤어져 있던 적이 없는, 깊은 유대감을 가진 아버지 같았다.
샤를리즈를 아주 잘 알았다.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독약을 마시는 일 같은 거, 하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그제야 공작의 굳은 어깨가 안도한 듯 조금 풀렸다.
* * *
예상대로 오늘 본 미래의 편린은 실시간이었다.
‘라베트한테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봐야겠다…….’
황후는 누군가와 대화할 때 곁에 그 누구도 두지 않는다.
황후의 도구들은 황후가 그들을 마음 깊이 믿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분명 대화는 독대로 진행되었을 테니 아무리 노아라도 알아내는 건 무리다.
“그리고 로나터스 후작이 집사와 페르난 백작가와의 합착 관계를 확신했습니다.”
소중한 막내딸에게 체벌을 가하듯 회초리질을 했단 것까지 알아내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고마워. 급한 변동 사항 있으면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바로 알려 줘.”
“예, 주인님.”
“아, 그리고 나 당분간 대공저에서 지낼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곧 통신용 마도구 사서 보낼게. 다뤄 본 적 있지?”
눈을 깜빡인 노아가 다소 늦게 긍정의 대답을 했다.
‘졸린가 보다.’
왜냐면 나도 졸려서 조금 멍했다.
“하나, 주인님. 제가 시종이나 호위 기사로 변장하여 대공저로 함께 가는 편이 아무래도 수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사들이랑 훈련받는 거 좋아하잖아. 급한 일 생기면 마도구 쓰면 되지 뭐.”
“…….”
“그리고 나 돈 들어갈 일 사라져서 엄청 남았어.”
물론 대관비보다 마도구가 더 비싸지만 대관비가 결코 저렴하지는 않다.
‘역시 내가 내야 했나.’
뒤늦게 씁 숨을 들이마시고 있을 때였다.
“주인님은, 참 좋은 분 같으십니다.”
상대방 의사도 안 묻고 내 맘대로 비싸게 대관한 값 안 치르고 기분만 낸 인간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틀려. 전혀 아닌데?”
“아니요, 좋은 분이십니다.”
노아가 기쁘게 웃었다.
반박할 의지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미소였다.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
하긴 황후 다음 주군으로 날 선택했을 때부터 예상가긴 했다.
나는 힘내라는 뜻을 담아 노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감히 리엔타의 기사를 등쳐 먹으려는 인간은 없을 테니, 그건 다행이었다.
* * *
‘한동안 체력 단련도 무리이겠구나.’
아침저녁마다 연병장을 기웃거리기에 기사단이란 예민한 문제였다.
규모를 짐작하고, 검법을 훔쳐보기 위함이라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혐의 벗었는데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전투적으로 아침밥을 해치우고 방으로 올라와 생각을 전개했다.
어제 슬쩍 물어본 결과, 공작은 사샤의 생일이 한 달이나 더 남았다고 했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로단테도 만나야 하는데.’
칼릭스와는 다른 시점으로 볼 수 있어 아주 좋았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마를 한 대 빠악 때렸다.
“나빴다, 방금.”
로단테는 비록 모르고 있지만,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으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도와줄 것 없으려나.’
흐으음.
돈은 상단 보수로 지급되니까 일단 패스, 집은 어린애가 혼자 사는 게 더 문제니까 패스.
끙끙 고민하고 있자니 생각났다.
‘동생이 죽는댔지.’
여기서 왠지 ‘이랬다가 원작이 바뀌면 어떡하지?’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미 원작은 망한 지 오래라서 원작 관련해서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근데 노아는 이미 하고 있는 일이 많아서 더 얹기에는 너무 악덕 상관인데.’
어쩌면 이미 악덕 상관일 수도 있다.
“역시 만나 보기는 해야 하겠군.”
조금 뒤.
나는 공작과 멜리사 부인, 그리고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대공저로 향했다.
손톱보다 작아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든 나는 창문을 닫고 쿠션에 등을 기댔다.
“약혼했다고 왜 가냐고 하시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엄청 쾌남이셨다.”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곳을 가야지. 다만 편지는 자주 해다오. 기다리마.]
쾌남이라는 생각은…… 비련의 주인공처럼 털썩 주저앉은 현재의 공작을 몰라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엘루이든 대공저에 도착한 나는 반가운 기색으로 어깨를 움찔움찔하는 사샤를 달랑 안아 들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물론 그전에 확인할 건 확인했다.
“사샤, 아침 먹었지?”
“네에.”
“그럼 가자.”
“네에.”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던 사샤는 상기된 기색으로 바깥을 살폈다.
나는 그 옆에서 같이 구경하며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리엔타 상단으로 갈 거야.”
그렇다.
저게 끝이었다.
너무도 빈약하지만, 휘황찬란한 대공저에서 사는 아이에게 괜히 ‘재밌을걸! 신기한 게 많아.’ 해서 기대감만 심어 놨다가 푸시시 식으면 얼마나 마음 아프겠는가.
다행히 사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사이, 마차는 상단의 수도 본부에 도착했다.
마차에 리엔타의 문장이 새겨져 있어 그대로 통과했던 터라 더 순식간에 도착한 감이 있었다.
“내리자.”
“네, 샤를 님.”
내게 안길 자세로 준비를 완료한 사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나는 자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밖에서도 대롱대롱 들고 다니기는 그러니까.”
선황자님의 체면이란 게 있잖은가.
나를 올려다보던 사샤가 눈을 깜빡였다.
걸쳐 있는 정도였던 손이 내 손을 꼭 맞잡았다.
“아이고, 아가씨!”
체자레가 부랴부랴 달려왔다.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 선황자님을 뵙습니다. 리엔타 상단의 부단주, 체자레 윌럿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태세 전환으로 체자레가 완벽한 예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체자레. 사샤 러셀 알로페입니다.”
체자레 님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체자레라고 하다니.
칼릭스가 아이 교육에 많이 신경 쓰나 보다.
흐뭇해져 있던 나는 흠칫했다.
‘그럼 뒤에 님 붙이는 사람 나밖에 없는 거 아닌가?’
황제나 황후는 폐하라는 경칭이 있으니 말이다.
‘얼마 못 듣겠네.’
들을 수 있을 때 아껴 들어야지.
저번에 님 빼고 이름으로만 불러 달라고 했을 때 사샤는 이미 거절했다. 거절했는데 또 해 달라고 하는 건 좀 아닌 일이었다.
“샤를 님, 이렇게 인사드리는 게 맞나요?”
단번에 희소성 있는 호칭으로 급부상한 울림이 귀를 간질였다.
나는 엄지를 척 올렸다.
“아주 잘했어.”
체자레가 경악을 담은 눈을 홉뜬 채 삐걱삐걱 나를 보았다.
“아, 아가, 아가씨.”
나는 대강 설명했다.
“사샤가 이게 편하대.”
“정말…….”
반박할 듯 입을 연 체자레는 금세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그나저나 왜 오셨습니까?”
“저번에 내가 부탁한 꼬마를 만나러 왔어.”
“로단테를 불러와라.”
“예, 부단주.”
체자레의 명을 받은 근처를 지나가던 상단 사람이 달려갔다.
하필 이곳을 지나가고 있어 귀찮게 됐다.
“사실 아가씨께서 꽂아 넣은 낙하산이라서 그냥 놀면서 돈만 받아 갈 줄 알았는데, 일을 굉장히 열심히 합니다. 머리도 좋고요.”
“그래? 다행이네.”
그럴 것 같았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사샤에게 설명해 줬다.
“로단테는 저번에 보육원에 가서 만난 남자아이야. 올해로 열네 살이고…….”
더 아는 건 있는데 모두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애매하게 말이 끊긴 순간, 저 멀리 로단테가 보였다.
아이의 팔을 억세게 잡은 상단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서더니 팔을 잡은 손을 떼고 로단테의 등을 쳤다.
제법 억세게 쳤는지 잠시 휘청한 로단테가 달려왔다.
“공녀님, 저를 부르셨다고요.”
“응, 그랬어. 잘 지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다 괜찮아?”
“네, 모두 좋은 분들이세요.”
“모두 좋게 말해 줄 필요 없어. 뒷배 좋다는 게 뭐야? 너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말해.”
나는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주시하며 말했다.
잠시 멈칫한 로단테가 이윽고 감사하다며 형식상의 답을 했다.
‘감사한 건 이쪽인데.’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