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
“……하실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있다 뿐일까 아주아주 많다!
‘이 상황 뭡니까.’
시선 끝에는 약간의 경계가 어린 눈만 있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라고는 조금도 없다.
금방이라도 털썩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었던 건 지난 눈물의 체력 단련 덕택이었다.
“아니, 없어.”
침울해졌지만 이내 털어 냈다.
‘한 번이라도 본 게 어디야.’
뭐, 딱히 도움은 안 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군.’
공작의 죽음을 바랄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찾는 신관이라니.
원작에 안 나왔다는 게 이상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 아닌가.
“아주 똘똘하게 잘하고 있습니다. 다행이지요.”
‘뭐야.’
갑자기 나타난 이름 모를 남자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꼬마, 돈을 벌면 하고 싶은 게 뭐냐?”
“저는…….”
로단테가 머뭇거렸다.
늘 매끄럽게 잘만 빠져나가던 애 입이 막히다니 어지간히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말을 돌릴 거리를 찾으려고 눈에 힘을 줘 주변을 둘러보던 차였다.
“……찾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부모인가?”
“아니요.”
“그럼 도와줄 수 있다. 네가 일을 열심히 잘한다면 말이야.”
흐르는 것은 구름이고, 이어지는 것은 대화로다.
로단테가 대화에 합류하는 걸 확인하고 별 관심 없이 하늘 구경을 하고 있던 나는 그만 남자의 뒤통수를 날릴 뻔했다.
‘이 사람이 남의 약점 가지고.’
실망이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
“가.”
“예? 예에, 알겠습니다.”
뒤통수를 문지르며 놈은 멀어져 갔다.
괜히 나타나서 사람 속만 헤집고 가다니.
나는 쭈뼛쭈뼛 말을 꺼냈다.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굳이 더 입증을 기다릴 것 있나.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이미 상단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는데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과연 신력을 가진 사람답다!
내가 이 세계 악역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는지 나와 더 얽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주 능력 있는 사제가 될 싹이 벌써 보인다.
“알겠어. 나중에 필요하면 엘루이든 대공저 쪽으로 연락해.”
“감사합니다.”
내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전혀 없나 보군.
지나치게 공손히 인사하는 동작에서는 오기까지 엿보였기 때문이다.
* * *
“공녀님, 도착한 편지는 일전에 말씀하신 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봉투 한 겹을 뚫고 느껴지는 그 선명한 두께감을 선물한 사람은 로제타였다.
어찌나 꾹꾹 눌러썼는지 입체감 있는 편지지 여섯 장을 모두 읽은 나는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내가 대공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졌다고 한다.
그러라고 레스토랑 빌린 거니 잘된 일이다.
‘대공 혼삿길 막긴 미안하잖아.’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다.
괜히 칼릭스가 먼저 나한테 청혼했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퍼진다면 파혼 후 새롭게 약혼하게 될 아가씨는 얼마나 마음 쓰이겠는가.
대공은 결혼을 해야만 하는 위치이니 애초에 혼삿길 막힌 내가 더 꽉 막히는 게 낫다.
침대에 벌러덩 누우며 나는 뒹굴 굴렀다.
‘일단 라베트를 만나기는 해야 하는데.’
사샤를 데리고 후작가로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내 집도 아닌 여기로 초대하기도 뭐하고.
“그렇다면 한 곳뿐이지.”
이튿날 오전, 나는 라베트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라베트를 만나고 대공저로 돌아온 그 오후.
노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 * *
붉게 물든 햇빛이 공간을 차근차근 집어삼킬 무렵.
안경 형태의 마도구 너머 푸른 벽안이 문득 다른 곳을 향했다.
마도구를 벗어 두고 몸을 일으켜 문으로 향하는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유려했다.
차가운 철제 문고리에 손이 닿은 순간, 그 목소리가 들렸다.
“샤를리즈입니다. 시간 길게 빼앗지 않겠습니다. 잠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동작을 그 말이 모두 끝난 후에야 하게 된 이유는 몰랐다.
칼릭스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짧은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응접실로 가지.”
찻물에 막 첫 김이 피어올랐을 때. 샤를리즈는 운을 뗐다.
“질답은 한 번에 할 테니 일단은 끝까지 들어주세요.”
“명심하지.”
“저는 미래를 간헐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 법한 이야기였다.
차로 목을 축이지도 않고 제법 긴 말을 이어 간 샤를리즈가 담담한 투로 말했다.
“하고 싶은 질문이 많으시겠죠. 하십시오.”
살짝 내린 채였던 눈꺼풀이 불시에 올라갔다. 그 아래 벽안이 마주한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는 듯싶었다.
탐색이라기에는 건조했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라기에는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침묵을 깨며 칼릭스가 조금 웃었다.
“고마워, 공녀.”
줄곧 무표정했던 얼굴이 살짝 기울어지는 것도 같았다.
* * *
칼릭스에게 갑자기 생긴 예지 능력을 숨기는 거야 어쩌면 당연했다.
‘관심 끌겠답시고 미래 보는 행세까지 하는 진상 취급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황후랑 합착 관계라고 오해해 주시 대상이 되지 않을까.
게다가 무엇보다도.
‘불쾌하잖아!’
눈이 마주치면 미래를 훔쳐볼 수 있다니.
굳이 말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대공과 계약하고자 패를 까야 하는 것도 아닌데, 그야말로 ‘굳이…….’였다.
시선이 맞닿는 모든 사람도 아니고 대공에게만 가능. 원하는 시점, 원하는 사람의 미래를 보는 것 불가능.
딱히 이용 가치도 없을 테고, 대공의 정보력 앞에 난 불유쾌한 존재에 불과할 터다.
그럼 쓱싹 당할까 봐 내심 간 떨렸단 말이다.
‘그런데 더는 숨길 수 없지.’
응, 그렇지. 그렇게 됐지…….
사샤가 아무리 원작에서 숱한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그중 하나일 뿐이라며 숨기기에는 좀.
‘이렇게 된 거 우리 자주 만납시다.’
그래서 나는 적당한 기회를 노리다가 집무실 문을 두드린 차였다.
……그랬는데 말입니다.
“고마워, 공녀.”
‘예?’
땀이 뻘뻘 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도대체 이다음에 어떤 본론을 꺼내려고 이렇게 두툼한 밑밥을 깔아 두는 거지!
“내가 의심하리라고 분명 생각했을 텐데도 사샤를 걱정해 말해 주었잖아.”
저기, 제가 그동안 입 꾹 닫고 있던 건 모두 잊으셨습니까?
사람 된 도리로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실토했다.
“저 여태 입 꾹 닫고 있었는데요.”
“잘했어.”
시간대를 잊게 할 만큼 환한 빛 아래, 벽안은 유달리 다정한 빛을 띠고 있진 않았으나 냉랭하지도 않았다.
“이런 거, 아무에게나 말하고 다니면 안 돼.”
“…….”
나는 눈을 굴리다가 가까스로 생각 한 가지를 잡아챘다.
그렇긴 하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데, 칼릭스가 문득 내 손을 바라봤다.
“그런데 신기하군. 공녀가 내게 접촉했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적이 제법 되다니 말이야.”
“제가 그런 쪽으로 손이 좀 빠릅니다.”
어쩐지 공작의 목소리로 ‘자랑이냐!’라는 우렁찬 외침이 들려오는 기분이지만, 아무튼.
그렇다.
나는 거짓부렁을 조금 섞었다.
[사람과 접촉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원하는 때로 지정하는 것은 불가하고, 항상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요.]
물리적 접촉으로만 발동한다면 장갑을 끼면 미래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라도 있지, 시선은 도저히 답이 없다.
이용만 당하다가 나중에 안전을 확보한 후 내 눈을 노리면…….
‘대공 전하에게 해되는 미래, 보게 되면 열심히 막아 보겠습니다.’
내뱉은 말은 절대로 비밀이 될 수 없다. 사람 간의 신의는 한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진실을 말할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나마 약속했다.
‘그래도 속인 당일에 미래를 보려니 생각만 해도 양심 쑤시네.’
아쉬워도 오늘은 넘어가려고 했는데.
“혹시 지금도 가능할까?”
이게 웬 빵이냐!
“물론 공녀가 괜찮아야 할 테지만.”
“저는 좋습니다.”
재깍 장갑을 벗고 칼릭스의 검지 끝에 내 검지를 신중히 가져다 대려던 찰나였다.
그건 서두름을 찾아볼 수 없는 동작이었다.
상대방을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한 매너의 일환으로 교육받았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마찰된 손바닥이 간지럽다고 생각했던가.
어느 순간 눈을 마주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펼쳐진 미래가 시야를 잠식했다.
은발에 녹색 눈.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
“잘 어울려, 샤를.”
가로로 긴 눈매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누가 봐도 오늘의 주인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