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편하게 하도록 해.”
그렇다니 본론부터 투척하기로 했다.
“약혼식은 미룰 수 있을까요?”
칼릭스가 나를 짧게 응시했다.
“공녀가 본 미래를 저지하기 위해서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래…….”
말을 끌던 칼릭스가 문득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이상하군.”
나는 긴장했다.
‘무엇이요!’
공녀를 살려 두려고 했던 내가 이상해―라면 당장 튀어 나가겠다.
“꼭 소박당한 기분이야.”
‘예?’
“누가 전하를 소박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눈썹을 꺾으며 사뭇 진지해졌다.
“그런 사람 있으면 데려오십시오.”
“왜, 혼내 줄 건가?”
“아니요.”
그냥 보고만 싶습니다.
대공 전하 다음에 만나게 되는 사람은 누구일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그 사람은 얼마나 잘생겼을까.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런 생각은 한 적 없는 선량한 사람처럼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다.
“음.”
칼릭스가 가늘게 웃었다.
“그래도 조금은 혼내 줘.”
뭐, 그렇게 원한다면야.
“그러겠습니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칼릭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이렇게 오늘 대화가 마무리되나 싶은 순간.
“시간은 이때로 정하는 게 좋겠지? 아니면 공녀가 원하는 시간대를 말해도 좋아.”
‘뭐가요?’의 의미를 담아 칼릭스가 쳐다봤다.
“만나는 시간 말이야.”
그러며 칼릭스가 잘 조형된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어…….’
이 김에 자주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기대는 안 했다.
대공저 사람들과 손을 잡아 미래 보는 건 가주 입장에서 아무래도 찝찝할 테니 리엔타의 사용인 한 명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진짜로 자주 보게 됐잖아?’
나로서는 좋은 제안이었다.
마음 변할까 싶어 서둘러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미려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걸리고, 조금 장난스럽고도 살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주 보게 되었네. 잘 부탁해, 공녀.”
칼릭스 엘루이든에게서 내 취향 아닌 부분.
그 첫 번째.
잘 재단돼 무기질적인 다정함.
‘이, 이, 이, 이런……!’
곧 정신 차렸다. 괜찮다.
아직 여덟 개나 남았으니까!
* * *
동일한 작위라도 위상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나터스는 같은 후작가들과는 궤가 달랐다.
그랬기에 ‘그’ 후작가를 손에 넣고 주무른다는 데에 희열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후우.”
깊은숨을 내쉬며 로나터스 남매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불쾌하군요.]
제 부친이 의식을 차리자마자 이쪽을 깔봤던 라베트를 떠올리는 얼굴이 불그죽죽해졌다.
[제가 알겠습니까? 달랐던 점? 글쎄……. 아.]
“리엔타 공녀가 로나터스를 자주 찾았다고.”
심지어 오늘, 라베트 로나터스와 은밀한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래 봤자 이쪽의 정보로 알아냈지만 말이다.
[그대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모르겠군.]
지나가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들의 주군은 의미 없는 말은 하지 않는 분이셨다.
혈색이 빠져 희다 못해 퍼렇게 질린 얼굴로 페르난 백작이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반드시 이 실패를 만회해야만 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만회할 수 있단 말인가?
한껏 일그러져 있던 낯에 일순 찾아온 기묘한 깨달음이 번졌다.
‘몇 년 동안 단서 하나 알아채지 못했던 라베트 로나터스가 갑자기 해결했을 리는 없지.’
그렇다면 유일한 변수가 그 해답일 가능성이 컸다.
심정적으로 몰린 기분이 아니었더라면, 페르난 백작은 다른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도 백작은 미약하게 주저하고 있었다.
일개 가문도 아닌, 공작가.
해가 뜨기 전, 백작은 마음을 정했다.
몸을 한껏 낮춰 때를 기다리고만 있기에는 심증이 샤를리즈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공녀를 칠 수는 없는 노릇.
이성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으나, 애초에 페르난 백작은 온전히 이성적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굵직한 일을 맡아 그분의 총애를 받는 자신을 시기하던 이들이 주제도 모르고 얼마나 희희낙락하고 있는가!
그건 바로 샤를리즈 리엔타 때문이었다.
“가만, 공녀가 선황자를 끼고돈다고.”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선황자를 공격할 때 공녀가 아주 방해가 되겠어.”
공녀가 죽는다면 딸을 그렇게 사랑하는 양반이 면책권까지 가진 이상 저돌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 공녀가 잠시만 의식을 잃도록 만드는 것이다. 선황자 곁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도록.
이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으로 도출된 결정이었다.
* * *
달도 잠든 늦은 밤.
유독 어두운 밤하늘은 마치 좋은 꿈을 예감하며 닫는 시야처럼 포근했다.
그건 곁에 느껴지는 온기 덕분인지도 몰랐다.
“아기 용사님을 찾는 여정에서 용감한 왕녀님은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왕녀님…….”
“꼬질꼬질해진 용사님이 왕녀님의 상처투성이 손을 조심히 들어 울먹이며 꼭 껴안았을 때. 영롱한 아침 햇살처럼 눈을 빛낸 왕녀님은 씩씩하게 웃었습니다.”
주먹을 꼭 쥐고 동화책을 읽는 내내 몰입하고 있던 사샤가 안도의 숨을 흘렸다.
“다행이에요.”
“그러게.”
담담하게 대꾸한 샤를리즈가 책을 덮었다.
“3권도 어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나도.”
동화 작가가 돈맛을 보고 100탄까지 시리즈를 내면 좋을 텐데 말이다.
감명 깊게 읽었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세상의 때를 너무 탄 인생 2회차 어른은 몹시도 태평하게 세속적인 생각을 했다.
“이제 자자.”
“네에.”
처음에는 뻣뻣하게 정면으로 누워 눈만 돌리고 있더니,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안겨 온다.
답삭 안긴 자그마한 등을 쓸어도 뼈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맛집 돌아다닌 보람이 있다.’
뿌듯하게 생각한 샤를리즈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뒤.
사샤의 눈꺼풀이 조심조심 올라갔다. 한껏 고개를 올려 샤를리즈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첫날을 회상했다.
[가, 가, 같이요?]
[싫어?]
[아니요! ……좋아요.]
그러며 자리를 만들고자 슬쩍 옆으로 몸을 낑낑 당겼던 그때처럼 사샤가 볼을 붉혔다.
[난 여기서 잘게.]
[……소파에서 주무시게요?]
일견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인 샤를리즈가 들고 온 베개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가 품에 끌어안았다.
[작군.]
같이 자도 되는데. 그러면 좋은데.
그 말을 할지 몇 번이고 고민하는 사이, 샤를리즈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저대로 불편하게 주무실 생각인 게 틀림없다. 마음이 급해진 사샤가 주먹을 꾹 쥐고 외쳤다.
[저! 저는 소파에 누울 수 있어요.]
이게 아닌데.
꼭 자랑하는 것처럼 말이 나가고 말았다.
입을 뻐끔거리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아이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침대가 더 편할 텐데.]
[괜찮아요. 소파는 저한테 전혀 불편하지도 않고, 저는 원래 어디에서나 다 잘 자고요.]
조금 뿌듯해진 아이가 가슴을 살짝 폈다.
유일하게 듣던 칭찬이었다. 샤를리즈도 기껍게 생각할 것이다.
[배려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나는 사샤가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마무리하면 좋겠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눈을 가늘게 뜬 사샤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쭉 폈다.
[흠, 맞다. 동화책…….]
그 밤, 다섯 권의 동화책을 독파한 샤를리즈는 지쳐 스르르 잠들었다.
이후로 소년에게는 매일 저녁 즐거운 일과가 생겼다.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옆에 잔을 두 개 놓는 것이었다.
‘샤를 님…….’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온기에 조금만 더 고개를 묻었다.
한참을 주저하던 손은 끝내 얌전히 제 배 위에 놓였다.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용사님을 발견한 왕녀님은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혼자 동화책을 읽었을 때는 이해 가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 아이는 왕녀님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기쁜 순간이니까 나중에 돌이켜보았을 때 눈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온전히 기쁜 추억으로만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다정한 손길이 아이를 조금 더 가까이 당겨 안았을 때, 사샤는 눈을 감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 기분을 샤를리즈도 느낀다면 좋겠다.
‘앗.’
[좋은 꿈이 찾아올 테지.]
다정한 숙부가 선물해 준 오르골 형태의 성물이 우아한 선율과 함께 회전했다.
포근한 밤은 계속되고 있었다.
* * *
있는 듯 없는 듯한 고급 질감의 장갑도 이렇게나 불편하다.
레이스 장갑을 주로 착용하는 라베트를 존경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간지럽단 말이지.’
손바닥을 노려보며 걷다 보니 금세 도착했다.
‘눈부터 본다.’
우연히 리반도 함께 자리한 적이 있다.
지나가는 말로 슬쩍 떠보니 리반은 너구리처럼 눈을 떴다.
[예? 공녀님 그때 그런 생각하고 계셨던 겁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아주 음습한 생각을 품은 줄 알겠어. 그냥 대공 전하께서 아주 매우 몹시 잘생기셨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그런데 전하께서는 불쾌하실 수도 있으니까.]
[별로 안 불쾌해하실 것 같은데요…….]
평생토록 잘생긴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아무튼 저는 그때 공녀님을 보고 있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에라이.’
그래도 리반이 내가 미래의 조각을 볼 때 위화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나든 칼릭스든 눈에 띄게 이상한 기색은 없었나 보다.
‘그 정도면 해 볼 만해.’
처음에 해치우는 게 낫지, 손을 계속 잡는 건 내 심장에 못 할 짓이란 말이다.
고개를 결연하게 끄덕인 나는 문을 열었다.
‘안경……!’
그리고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