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마치 투명한 물체가 있기라도 한 듯 약하게 주먹 쥔 손이 가지런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서러운 적 없었을 것만 같은 오연한 기세가 사라진 눈은 그저 무심했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네 얼굴, 생각보다는 저렴하네.]
샤를리즈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고 싶을 때마다 네게 적선이라도 할걸 그랬지.]
[극독을 구매한 것이 사실인가.]
그녀에게 독을 판매한 업자의 입을 찢어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극소수만 알고 있다더라.
그 극소수에 저 남자가 속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런 넌 네 연인에게 내가 독이라도 쓸까 봐 지레 겁먹고 달려온 거로군.]
분노라도 가다듬었던 걸까.
잠시 침묵한 칼릭스가 불쑥 말했다.
[그래, 걱정돼 미칠 것만 같아서 달려왔어.]
보이지 않도록 주먹을 꾹 쥔 샤를리즈가 칼릭스를 쏘아봤다.
칼릭스 역시 샤를리즈를 가만히 응시했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기류를 끊은 건, 놀랍게도 늘 이 관계의 주도권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충고 하나 하지. 그 독약을 사용하지 마.]
[자꾸 이러니까 더 쓰고 싶어지는데.]
[공녀.]
[죽는 상상만으로도 얼굴 구겨질 만큼 소중하면 알아서 잘 지켜. 괜한 사람 잡지 말고.]
[이리안을 위해서만이 아니야. 공녀가―.]
[당신 정말 최악이네.]
시종 꾹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내가 네게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지 잘 알겠어. 걱정하는 척 한번 말만 흘려도 약병을 깨부술 머저리쯤으로 보였겠군.]
그다음 말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결코 들을 수 없을 만큼 자그마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너무 티 내지는 마.]
* * *
어쩐지 묘한 감상에 젖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쉽게 감상적으로 되진 않지.
이번에는 잊지 않고 티를 내며 살짝살짝 눈을 떴는데,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누가 기다리고 있어 줄 줄 알았다니 조금 부끄럽다.
멍 때리며 천장을 바라보길 잠시.
우선 이불부터 차고 시작했다.
‘세상아.’
신님, 저는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요.
미남의 안경 쓴 버전 보고 기절한 건지, 아니면 저한테 진짜 문제가 있는 건지 너무 헷갈립니다.
침대에 손바닥을 대고 좌절하고 있는데, 내 존엄성이 화드득 외쳤다.
‘저번에 기절했을 때도 원작에서 못 본 것 같은 장면을 봤잖아! 지금처럼! 이건 안경 보고 기절한 게 아니야! 그랬으면 보였겠냐!’
아주 몹시 매우 그럴듯했다.
금세 침착해져 침대 헤드에 부스럭부스럭 등을 기댔다.
어떻게 본 거지. 두 번의 이상 현상 중 공통점이 무엇이었지.
그러나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왜 보여 주는 겁니까.’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 같잖아.
인상을 빡 쓰고 돌이켜보던 중, 걸리는 점이 있었다.
[충고 하나 하지. 그 독약을 사용하지 마.]
어쩌면 그저 단순히 이리안에게 독약을 사용할까 봐 염려돼 겁주느라 한 말일 수도 있었다.
내가 본 장면의 샤를리즈가 생각한 그대로 말이다.
‘그런데 충고라고 한 게 걸린단 말이야.’
독약에 관해 샤를리즈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흠.”
나는 위화감을 잊지 않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 뒤 생각을 접어 간직하기로 했다.
칼릭스를 앉혀 두고 ‘튜베롯으로 독을 만들 수 있다는데 전하께서도 아십니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하는 게 아니면 당장은 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아는 지금 하는 일이 많다. 끝내는 거 없이 얹기만 해 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다.
‘마음만 심란해지겠지, 뭐.’
노아는 두 번째 주군이 악덕 상관이라서 심란할 테고, 나는 조사 결과가 언제쯤 나오나 싶어 심란해질 테고.
일단은 페르난 백작 건부터 해결하는 게 옳았다.
‘그러면서 튜베롯 독약에 관해 알게 됐다고 하고 대공을 떠봐야겠군.’
자, 그럼 체력을 비축해 볼까.
주섬주섬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뜨니 보인 것은.
“……샤, 샤를 님.”
물기가 흥건한 벽안이었다.
* * *
소중히 품에 안은 꽃을 사샤는 힐끔 내려다보았다.
정원사 할아버지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
‘샤를 님도 마음에 들어 하실까?’
서투르게 미소 지은 아이가 입술을 꾹 눌렀다.
차가운 바람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들뜬 기색이 번졌다.
‘그러셨으면 좋겠다.’
팔에 힘이 빠져 조금 아래로 내려간 꽃을 재차 추슬러 단단히 안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건 로비를 지났을 때였다.
저택이 묘하게 어수선했다.
이 시간에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기 어려운 사람까지 보이자 사샤는 눈을 깜빡였다.
“리반?”
“아, 사샤 님.”
당황한 기색은 금세 사라졌다.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리반이 계단을 서둘러 내려와 사샤 앞에 당도했다.
“꽃을 꺾으셨습니까? 날이 추운데 하인을 시키시지요.”
“으응, 아니…….”
“리히트 보좌님! 거기 계셨군요.”
난간 너머로 리반의 머리색만 대강 확인한 사용인이 미처 사샤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약을 사용하기에 앞서 공녀님께서 복용하시는 약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좌관님께서 리엔타 공작저로 바로 향하시라는 가주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꼭 껴안고 있던 꽃은 샤를리즈의 침실로 오는 사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텅 빈 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사샤는 얼른 움직였다.
“어, 어떡해!”
샤를리즈의 이마가 너무도 뜨거웠다.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폴짝 뛴 사샤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수건. 수건이 왜 없지.
부리처럼 내민 입술이 떨리다가 이에 짓눌릴 즈음.
‘손수건!’
주머니에서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욕실로 달려갔다. 물에 흠뻑 적시고 물기를 조금만 남기고 모두 짜내고는 다시 달려와 샤를리즈의 이마에 조심조심 올려 두었다.
꽁꽁 언 손은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느라 녹을 새 없이 줄곧 새빨갰다.
그것도 모르고 물기를 꼭꼭 짜 온 손수건을 쥐고 달려온 사샤는 문득 깨달았다.
광활한 침실을 새삼스레 멍하니 바라보는 뒷모습이 유독 작았다.
‘아무 데나 수건이 널려 있을 리가 없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애초에 보육원에서 보았던 그것은 수건이 아니라 걸레였을 것이다.
투둑. 깨닫기도 전에 눈물이 떨어졌다.
세상에는 대가 없이 친절한 사람이 있다. 사랑받는 기분은 아주아주 부드러운 깃털을 꿀꺽 삼킨 것만 같다. 안아 주는 품이 따뜻하다.
그걸 알려 준 사람이 있다.
그걸 겪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있었다.
“아프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어느새 헐떡이고 있었다.
옷감이 늘어날 정도로 꼭 붙잡고 아랫입술도 꾹 물고 있던 때였다.
사샤의 눈이 커졌다.
눈꺼풀 끝 속눈썹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한겨울에도 바래지 않는 녹음이 마침내 드러났다.
“……샤, 샤를 님.”
사샤는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가만히 서서 입술을 깨문 채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는 몰골은 분명 볼썽사나워 눈에 담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싼 건 그때였다.
“흐윽.”
그 품속에서 사샤는 생각했다.
외면하지 않아 주는 다정함이, 너무나도 좋다고.
그래서 아이도 샤를리즈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 * *
……뭔가 일이 이상하게 된 것 같다.
눈이 조금 부은 채 곤히 잠든 어린 얼굴을 나는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마도 시리고.’
정신 차리라고 누가 때리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공녀, 들어가도 될까?”
벌떡 몸을 일으켜 잽싸게 뛰어가 문을 열었다.
“들어오십시오.”
“환대 고맙군.”
칼릭스가 작게 웃었다.
“사샤를 찾으러 오신 거지요? 저기 주무시고 계십니다.”
“안전한 장소에 있을 사샤는 걱정되지 않았어. 그보다는.”
‘눈 마주치면 안 된다. 안 된다.’
마주 보되 눈은 마주치지 않도록.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
“공녀를 걱정했어.”
‘이건 거짓인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샤를리즈가 거짓된 걱정이라고 단언했던 순간, 칼릭스의 표정이 꼭 이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잖아.’
그럼 그 순간에, 칼릭스는 진짜로 샤를리즈를 걱정했던 걸까.
왜?
우리는 결코 그럴 만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가져다 붙일 이유야 많았다.
그냥 인간적으로 걱정할 수도 있지. 아무리 그래도 십 년을 넘게 보고 지낸 사이니까.
파멸로 달려가는 사람을 보며 드는 측은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샤를리즈가 아닌 아무 사람에게도 쉽게 흘릴 수 있는, 그 정도의 걱정.
그러나 나는 굳이 이유를 가져다 붙이지 않기로 했다.
무엇이든 의미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그래도 두 시간 만에 의식을 찾아 다행이야.”
‘맞아.’
이번에도 사흘이 날아갔다면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몸부림칠 자신이 있다.
“대공가의 의사가 아니라도 좋아. 누구든 실력 있는 의사에게서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어.”
“공작저에 내일 들르겠습니다…….”
쓰러지고 기이한 꿈을 꾸는 걸 보면 아무래도 건강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굳이 굳이 안 받겠다는 것도 모양이 이상하다.
“잘 생각했어.”
몇 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칼릭스는 침대에 금세 도달했다.
“사샤가 울었나 보네.”
“예에.”
주눅이 들었다.
원작에서 이리안과 함께할 때는 눈물 보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처음에 내가 너를 발견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자그마한 입이 부르튼 게 눈에 밟혔다.
“공녀에겐 미안한 일이 많아.”
감은 눈꺼풀에 닿은 머리카락을 기다란 손가락이 가만가만 넘겨 주었다.
“지나치지 못하고 도와주었을 뿐인데, 부담스럽겠지.”
“아닙니다.”
닿아 온 시선이 있었다.
아니라서 아니라고 대답했을 뿐인데 이유를 붙여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저도 사샤 님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