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58) (58/232)

58화

‘이거 혹시…….’

더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갔다.

* * *

대공저 시녀로 오래 일한 레아에게는 요즈음 고민이 생겼다.

또래 사이에서의 따돌림, 불합리한 상사의 명령과 같은 이유는 아니다.

[레아, 리엔타 공녀님의 전담 시녀는 네가 좋겠구나.]

시녀로서 치명적인 결점. 숫기가 없는 레아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이 저택에서 알아서 나가라는 축객령으로도 들렸다.

오늘도 밤잠을 못 이루며 한숨을 폭 쉬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텅 빈 복도를 울리는 의문스러운 발소리 같은 친절한 예고는 없었다.

화들짝 놀라 레아가 외쳤다.

“누, 누구세요?”

“가만히.”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의외로 들어 본 목소리가 대꾸했다.

‘……리엔타 공녀님?’

커튼 틈새를 기어코 비집어 흘러온 달빛이 아스라이 시야를 밝혔다.

멍하니 올려다보던 시선이 아래로 점차 내려가다가 마구 흔들리기까지는 금세였다.

“고, 공녀님?”

레아가 아주 작게 울먹였다.

대체 왜 제 옆에 누우시는 거예요……!

“눕고 눈 감아, 레아. 자는 사람처럼.”

숙련된 사용인인 레아는 착실히 말을 따랐다.

이 의문스러운 명은 이번에도 금세 해결됐다.

“흐, 흐읍.”

적막한 밤의 사위를 가르는 요란한 파열음에 레아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 때문에 손마디가 희게 불거지도록 침구를 꼭 쥐었으면서도 레아는 기어코 눈을 떴다.

‘위험 상황, 위험 상황.’

모시는 분을 보호해야만 한다.

샤를리즈가 있을 위치를 침구 아래로 더듬더듬 막던 손이 뚝 멎었다.

레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샤를리즈가 직전까지 있던 자리를 보호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공녀는 웬 남자를 제압한 채였다.

* * *

이 비열한 놈!

못난 놈!

업계의 수치 같은 놈!

“실례합니다. 커다란 소리가 들려……. ……아가씨?”

“그대? 여기는 어떻게 바로 왔지?”

“부끄럽지만 지지부진한 실력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 저택 순찰을 하고 있었습니다.”

“흠. 알겠어. 일단 이 남자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잡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군.”

“예, 아가씨.”

‘훌륭했어, 노아!’

‘주군께서는 완벽하셨습니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노아가 시기적절하게 들어왔다.

이번에는 시간이 촉박해 사전에 뭘 할 수도 없이 급조한 대화였지만, 썩 그럴듯했다.

신뢰의 눈빛을 서로 주고받은 우리는 각자 할 일을 하러 등을 돌렸다.

“창밖으로 수상한 게 보여서 혹시나 싶어 와 봤는데 그러길 다행이었네.”

그리고 나는 흠칫했다.

‘너무 놀란 것 같은데!’

주춤주춤 옆걸음질 쳐 종을 울리려다가 말았다.

‘시간이 없어도 뜨거운 맹물은 좀 그렇지.’

찻잎을 조금 집었다.

“아, 공녀님! 제가 하겠습니다.”

“그냥 앉아 있어.”

대충 차 맛이 날 정도로만 우리고 빠르게 찻잔에 담아 내밀었다.

“마셔.”

“가,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레아가 찻잔을 꼭 쥐었다.

앞에 버티고 서 있으면 안 그래도 어색한 사이에 체할 수도 있겠다.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며 시간을 때웠다.

곁눈으로 레아가 차를 다 마신 걸 확인하고 나는 일어났다.

“여기서는 잘 수 없겠어. 일어나. 내 침실로 가자.”

“네에.”

‘오?’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괜찮다며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레아는 선선히 일어났다.

하긴, 의례상 거절이 의미 없을 만큼 창문이 뻥 뚫려 너무 춥다.

우리는 겨울잠을 앞두고 동굴을 찾아가는 곰처럼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자, 저기서 자면 돼.”

“제가 어떻게 공녀님과 한 침대를…….”

쪼개지 않아 한 개일 뿐.

잠버릇이 한 방향으로 미친 듯이 구르는 게 아닌 이상 서로 부딪히는 일 없을 크기였다.

나는 별수 없이 입을 뗐다.

“피곤하다.”

“네에.”

레아가 또 울먹이는지 목소리 끝이 떨렸다.

‘겁주고 말았다.’

나는 한 마리 애벌레처럼 씁쓸하게 레아를 등지고 누웠다.

한편 그 시각.

만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모두에게 들린다면, 샤를리즈가 당장 주치의를 호출했을 만큼 레아의 심장은 쿵쾅쾅쾅 마구 박동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서워! 멋있어! 무서워! 멋있어! 무서워!’

두 가지가 겹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레아가 확실하게 잠들었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나는 조심조심 침실을 빠져나왔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아가씨는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그다지.”

가족이 고작 두 명인 덕택에 빈방은 넘쳐났다.

우리가 훈훈한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암살자는 1초도 빼놓지 않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어쩐지 결연한 빛이 감도는 것도 같다.

요컨대 절대로 배후를 말하지 않겠다, 하는 다짐 따위 말이다.

‘흠.’

무릇 모든 길드에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기 마련이다.

암살을 주업으로 하는 길드는 일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소속 길드원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그에 속했다.

‘뭐, 너희 길드 마스터는 돈에 흔들리지 않는 신의 넘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

“이봐.”

노아가 단단하게 고정한 하관을 쥐어 당겼다.

“널 고용한 자에게 가서 전해. 샤를리즈 리엔타가 이 일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페르난 백작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령 아니더라도 어차피 곧 알게 될 터다.

혹시 모르니 준비한 쪽지를 손바닥에 두고 주먹을 쥐도록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주었다.

“읍, 읍!”

“어떡할까요?”

어금니에 숨겨 두었을 독을 터뜨려 죽을 생각이라면 애초에 내 말대로 길드에 복귀하지도 않을 것이다.

“풀어 줘.”

노아는 빠르게 천을 풀었다.

놈이 원체 벼르고 있기도 해서, 용건은 금세 듣게 됐다.

“오늘의 자만을 뼈저리게 후회해라.”

글쎄.

후회는 이미 실컷 해 봐서.

* * *

슬금슬금 침대로 기어들어 오고 몇 시간 뒤.

나는 눈을 반만 뜬 채 세수했다.

오늘 이 집을 얼마간 또 떠나 있는데 아침에 부친 얼굴 안 보고 자고나 있기는 양심에 찔렸다.

“암살자가 들었다고?”

맛있는 아침 식사와 달콤한 후식을 먹고 쌉싸름한 차까지 마신 덕택인지, 고단할 업무 일정을 뒤로하고 노곤노곤 풀려 있던 공작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는데.”

“기사를 탓하지는 말아 주세요. 제가 아버지의 수면을 방해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샤를…….”

이 정도면 무조건 반사 수준이다. 찡한 눈빛으로 나를 본 공작의 입매가 문득 굳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아, 마침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뭐, 머, 뭐?”

숨을 들이마시고 연습한 대로 1.8배속으로 후다닥 말을 발사했다.

“대공저의 시녀가 목표였던 모양이에요. 마침 저택을 순찰하던 기사가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신속하게 대응해 피해는 없었습니다.”

됐다. 기절하시지 않았어!

“조치를 취하고 지하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공작의 얼굴에 언뜻 쓸쓸한 빛이 스치는 듯했다.

“지금 가서 확인해 보시죠.”

“그러자꾸나.”

그리고 지하 감옥은 당연하게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푹 떨궜다.

조금 혼나는 건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상황이 이어졌다.

“괜찮다. 괜찮아.”

공작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암살자는 내가 반드시 잡을 테니 마음 쓸 것 없어.”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 배후까지 샅샅이 파헤치겠다.”

“누구인지 제게도 반드시 알려 주십시오.”

요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인성을 하도 탈부착한 부작용 같다.

명령조로 나간 탓에 나는 재깍 덧붙였다.

“저는 아버지께서 알려 주시지 않는다면 알 수 없을 테니까요. 부탁드립니다.”

“원, 녀석.”

이때까지 나는 ‘원작의 샤를리즈가 그렇게까지 안하무인이었던 데는 역시 집안 환경이 제일…….’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여튼 아직도 아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 아직도 어리구나.”

“……?”

그리고 암만 생각해도 공작이 일할 때 까먹는 것 같은 사탕을 얻어먹었다.

* * *

그렇게 나는 대공저에 도착했다.

“레아, 미안한데 암살자 건은 비밀에 부쳐줄 수 있겠니? 이건 입 막으려는 건 아니고, 위로금이야. 일주일 쉬도록 해.”

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시중은 어떡할 거냐고 말할 것 같은 기색이라 나는 알아서 덧붙였다.

“시녀는 대공저에 많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그래도 공녀님의 전담 시녀는 저인데요…….”

이 프로 정신 투철한 시녀 같으니라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면서 이런 말을 하다니 기특했다.

“뭐, 그렇긴 한데.”

“…….”

“전담 시녀는 바꿀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정 싫으면 시녀장 찾아가라고 슬쩍 돌려 말했다.

레아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입을 조금 벌렸다.

“네에, 그렇네요.”

“그치. 그렇다니까.”

“저는 그럼 쉬어야만 하는 건가요?”

“그래야지. 많이 놀랐는데.”

이렇게 재확인까지 하다니.

내 인성이 문제다.

이 악명이 요긴하긴 하나, 아무래도 수습은 해야 할 모양이다.

‘위협할 때 좀 번거로워지겠지만 주변 사람이 괜히 겁먹고 움츠러드는 거 보려니 미안하네.’

이래서 내가 이번 생에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날 수 있었나 보다.

흠흠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칼릭스를 마주친 건 그 길목에서였다.

“공녀, 마침 잘 만났어.”

나는 저 말은 안 좋은 의미로밖에 안 해 봤는데, 대공은 좋은 의미로만 한 사람 같았다.

“시간, 괜찮을까?”

“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차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올라탈 줄은 몰랐다!

“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음.”

칼릭스가 빙긋 웃었다.

동시에 나는 보고야 말았다.

리반은 혀를 내둘렀다.

칼릭스의 체력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샤를리즈도 만만치 않았다.

“하기야 그 다양하고도 폭넓은 악명을 쌓아 올리려면 이곳저곳 돌아다니셨을 테니 체력이 좋을 수밖에 없으시겠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