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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59) (59/232)

59화

시작은 의상실이었다.

‘사샤 옷을 사러 왔나 보다.’

마침 칼릭스가 마차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황후 폐하께서 사샤를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시더군. 공녀도 함께 말이야.]

어째 한동안 잠잠했지.

나는 묵묵히 짐꾼으로서의 마음을 다지며 카탈로그를 살폈다.

‘오, 이거 귀엽다.’

칼릭스랑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의상실 문을 걸어 닫고, 있던 손님도 내보내서 그런지 마담이 재깍 다가왔다.

“공녀님의 심미안을 만족한 의상이 있으십니까?”

나는 손을 떨었다.

‘악명, 수습하고 만다.’

이런 말 들으면서 살 수는 없다.

“이걸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대공도 마음에 든 의상이 있나 보다.

‘같은 거면 재밌겠다.’

두 개 다 가져가서 사샤한테 보여 주고 뭐가 더 마음에 드느냐고 해서 선택받지 못하면 섭섭한 척해야지.

그러다 얼굴을 굳혔다.

‘이거, 악독한가?’

그렇다면 이것도 인성 탈부착의 후유증이 틀림없다.

그러고 있는데,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마담이 상냥하게 웃었다.

“공녀님께 귀한 걸음을 부탁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탈의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

칼릭스가 빙긋 웃었다.

나는 저 미소가 마차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임을 직감했다.

“샤를이 지칠까 봐 걱정이거든.”

쿨럭.

“샤를, 겉옷은 입고 가는 게 좋겠어.”

“사레…….”

“사례도 필요 없어. 우리 사이에.”

칼릭스가 샐쭉 눈웃음쳤다.

리반이 직원에게 묻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시일은 얼마나 소요될 예정입니까?”

“두 달, 아니 한 달. 아니, 아니.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가봉은 엘루이든 대공저에서 하겠습니다.”

“예? 예, 예에.”

저 멀리 직원이 나를 힐끔거리다가 황급히 눈을 깔았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요즘 한참 인기라는 커피 하우스에서 나는 완연한 졸부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직원만 바꿔 반복했다는 이야기다.

‘뭘 잘못했더라.’

내가 무언가 잘못한 건 확실하다.

문제는 잘못했을 후보군이 너무 많다.

차가운 음료를 때려 부어 머리를 식혀도 이거다 짚이는 게 없었다.

침울하게 있는데, 문득 칼릭스가 입술을 열었다.

“오늘 즐거웠어.”

“예에.”

내부가 몹시도 고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건 그때였다.

타인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자 그제야 느껴진 것이다.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그랬지만, 요즘은 유독 그래.”

제가 요즘 유독 뭘 잘못했던가요…….

요즈음이라는 힌트를 얻었다.

다시 맹렬히 머리를 굴리려던 때였다.

“이 시간이 계속될지 알 수 없어 더 소중한가 봐.”

“예?”

내가 원작에서 그렇게 살아도 내 목숨 노리진 않았잖아요.

“재촉하려던 건 아니야. 대답은, 공녀가 원할 때 해 줘.”

‘……어어?’

“그래도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건 허락해 줄 수 있을까?”

“예, 뭐.”

저 얼굴로 하는 질문에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사람이면 그럴 순 없다.

“고마워.”

칼릭스가 눈을 휘어 웃었다.

“그것만으로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어.”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아 올리며 주시하는 시선이 짙었다.

손끝이 순간 움찔 떨리고, 접촉이 깊어졌다.

날렵한 콧대가 손등을 스쳤다.

사방에서 막힌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들의 눈에는 칼릭스가 내 약지에 입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단 한 번도 대답의 주어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말로 하는 것보다도 더 직설적인 것이었다.

‘소문 쫙 퍼지겠구나.’

저택에서 뭐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왜 굳이 나왔나 의아했더니 이래서였나 보다.

뜻밖의 시간은 즐거웠다. 재밌었다. 친구가 없어서 이런 건 처음이라서 설렜던 것 같기도 했다.

‘머쓱하다.’

이제 그만 놓아줘도 될 것 같다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칼릭스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연인이 밀어를 속살거리는 것처럼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오늘 즐거웠다는 건 거짓이 아니야.”

칼릭스가 고개를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다.

이지러진 벽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처럼 빛났다. 그래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이었는데도 즐겁기만 할 수 있던 건, 공녀와 함께했기 때문이겠지.”

우아한 눈매 속 눈동자가 자못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 * *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이 있다.

개구리는 나고, 돌멩이는 칼릭스 얼굴이었다.

커다란 일을 겪었을 때 사람은 저마다 깨달음을 얻는다.

죽을 위기를 넘긴 개구리에게도 그분이 찾아왔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절대로 안 되겠지만, 만약 내가 칼릭스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원작의 샤를리즈처럼 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칼릭스가 그렇게 생각할 리가…….’

사랑에 빠진 샤를리즈의 눈빛이라면 지겹도록 봤을 테니 어쩌면 나보다도 더 일찍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럼 다시는 나 안 보려고 하겠지.

그러면 미래를 볼 수 없게 된다.

‘페르난 백작 일을 마무리하고 로단테를 한 번 더 찾아가 봐야겠어.’

모쪼록 백작이 빨리 행동해 주면 좋겠다.

‘끙.’

안 그러면 내가 먼저 쳐들어가야 하는 판국이란 말이다!

그리고 백작은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의 주군이 명령했으니까.

* * *

“며칠 전, 엘루이든에서 두 가지 신성력이 발현되었다. 그중 하나는 당연하게도 성물이었고. 그 비루한 꼬마가 정녕 선황제의 자식이 맞는 모양이지.”

페르난 백작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 내용만 듣자면 응당 분노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듯하건만, 오히려 흥미로운 빛이 서려 있었다.

“대공은 조카를 황제로 세우고 뒤에서 실세로 군림할 계획이겠지.”

비단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 귀족들은 그런 예측을 했다.

“그렇다면 설령 황위를 찬탈하더라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 줘야지 않겠어.”

백작이 눈을 약삭빠르게 굴렸다.

“공녀를 죽여. 아니,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쪽이 좋겠군. 그편이 공작이 분노를 곱씹기 좋을 테니.”

그가 웃었다.

페르난 백작은 어색하게 따라 웃는 대신 안도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고, 백작은 다짐했다.

‘그 암살자는 시녀 하나 처리하는 것도 제대로 못 했으니 다른 길드를 알아보는 게 좋겠지.’

막상 공녀를 건드리려니 걱정이 앞서 측근 시녀로 겁을 주려고 했더니만 그것조차 실패했다.

못마땅한 심정으로 회상하느라, 그는 모시는 주군이 웃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공작은 딸을 건드린 배후를 반드시 파헤쳐 알아내고 말 터. 그러니 저자가 제격이지.’

로나터스 후작 사안은 그저 연관된 가문이라 손쉽게 접근할 수 있어 페르난 백작에게 맡겼을 뿐.

애초에 일을 제대로 해낼 줄 아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황자를 제거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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