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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62) (62/232)

62화

‘…….’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 이유는 돌아 버린 적중률 때문이 분명하다.

이번에도 내게 필요한 미래 부분이 콕 집어 펼쳐졌다.

‘쓸모 있는 부분 위주로 보인 게 언제부터였더라.’

고심하던 것도 잠깐.

이건 혼자 있을 때 찬찬히 생각하기로 했다.

“황후 폐하께서 오늘 알현에서 후계를 가졌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때문인지 황후 폐하와 관련된 사안이 보였습니다.”

손을 잽싸게 빼고 장갑을 꼼꼼하게 착용했다.

칼릭스가 빙긋 웃었다.

“방계에서 소식이 닿았나 보네.”

“혹 황후 폐하께서 잉태하지 않으셨다고 퍼뜨릴 생각이시라면,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내가 진짜로 본 미래는 칼릭스에겐 도움이 될 리 없는 것이었다.

‘사실은 나한테도 도움 되는 부분인지 모르겠지만.’

“황후가 약에 능통하지.”

‘뭐, 뭐야.’

나는 흠칫했다.

‘왜 이렇게 다 알고 있는……?’

수도 제일의 정보 길드보다도 대공 산하의 정보부가 대단하다더니 과장 하나 없는 진실이었다.

‘사샤 찾는 일이 더뎠던 건 설정 오류 수준이잖아!’

“놀랐나?”

“예, 조금.”

소심하게 덧붙였다.

“많이 알고 계시네요.”

“알고 싶은 게 있었거든.”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흐트러진 자세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짐짓 가벼웠으나, 색채 짙어진 눈동자는 감춰지지 않았다.

“너무 알고 싶어서, 하나하나 확인하게 되었어. 그러다 보니 원하지 않았는데도 들어온 정보가 많아졌지.”

‘분위기에 휩쓸려서 너무 자세히 알게 되면 나중에 손해 보게 되던데.’

눈치를 겸비한 재원으로서 되묻지 않았다.

“비밀로 해 줘.”

칼릭스가 눙치듯 사르르 웃었다.

주먹을 꾹 쥐어 견뎌 낸 나는 똘똘하게 질문했다.

“대가는 무엇인지요?”

“우리 사이가 이리도 계산적이었다니.”

왠지 뒷말이 들리는 기분이다.

역시 나도 일이 모두 끝나면 공녀를 제거하는 게 좋겠어.

‘제, 젠장. 너무 나댔나.’

바로 입을 열면 염소 울음소리가 튀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애써 진정하고자 노력하던 때였다.

“냉철한 면모에 순간 떨렸어.”

‘주먹이 떨렸다는 의미인가?’

슬쩍 확인했는데 그건 아닌 듯했다.

‘……이 위기감 없는 사람.’

이러다 내가 거하게 착각해서 반하면 어떡하려고 이러는지.

칼릭스가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물론 칼릭스 본인에게 말이다.

만약 다른 영식들만큼만 했더라도 과거의 나에 필적하는 악명을 쌓고도 남았을 테니까.

‘잠깐. 그럼 나는 더 심했겠군.’

칼릭스를 마음에 품은 영애들의 머리채를 흔들고 다니고도 남을 성질머리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여러 의미로 제도 사교계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대가를 말하는 것보다는 공녀가 말하는 게 낫지 않겠어? 원하는 게 있는 듯한데.”

“예, 있습니다.”

칼릭스가 느슨히 웃었다. 무엇을 말하든 모두 가능하다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하긴 반역도 내키지 않아 안 할 뿐이지, 원한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지.’

“적립하겠습니다. 나중에 한꺼번에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나는 지금 시방 한 마리 하이에나다.

농담조로 흘리듯 한 말을 놓치지 않고 냉큼 주워 먹었다.

하이에나란 말이다.

……순조롭게 간이 떨리는 하이에나가 되었다.

정작 칼릭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큰 것을 말할지 기대하고 있을게.”

* * *

늦은 밤.

기절한 척 감고 있던 눈꺼풀이 조용히 올라갔다.

‘너무 쉽게 당했어.’

초조해진 마음이 기어코 화를 불렀다.

노예 상인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외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로단테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도 고객과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다.

고객은 다양하고, 그들의 신상을 상세히 알 수는 없으니까.

로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지난 일을 돌이켜 볼 때가 아니었다.

‘아직 수도인 것 같아.’

정돈된 길을 달리는 듯 마차는 부드럽게 나아갔다.

로단테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손과 발은 결박되지 않은 채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본 외관처럼 마차 내부도 고급스러웠다.

‘어디를 가고 있는 걸까.’

벽에 귀를 대고 아무리 기다려도 작은 말소리 하나 흘러들지 않았다.

시야가 흔들리는 건 움직이는 마차에 타고 있기 때문일 게 분명한데, 그런데.

투둑.

기어코 떨어진 물방울이 허벅지에 추락해 점점이 번졌다.

바랐다.

동생과 안전한 집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잠깐의 기쁨을 맞으며 때로는 동생과 아옹다옹하고 싶었다.

‘신님, 제게는 저것도 허락해 주실 수 없던 건가요.’

누구의 흥미도 사지 못할 흔해 빠진 이야기다.

부친은 영지의 왕처럼 군림하는 난봉꾼이었다.

두 손으로 세야 할 만큼 많은 사생아 중에서 로단테가 영지성에 입성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마님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로단테에게는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금색 머리카락이 있던 덕택이었다.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성을 유독 견딜 수 없어 도망치듯 외출한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동생을 만났다.

큰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고, 그래서 이 성을 벗어나고 싶었다.

목표 없던 삶에 목적을 불어넣어 주었다.

가정 교사의 수업 시간에는 딴짓만 하는 것처럼 굴고 매일 밤 홀로 공부했다.

[아카데미에 수석 입학하면 학비가 면제된대. 그때 너도 함께 데려갈 거야.]

시험을 한 달 앞둔 날.

동생이 실종됐다.

로단테는 언제나처럼 고상하게 웃는 마님의 얼굴에서 잔혹한 희열을 읽었다.

귀족은 나빠. 귀족은 믿을 수 없어. 귀족은…….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굳이 더 입증을 기다릴 것 있나.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때 부탁했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끼이익―

마차가 갑작스레 멈춘 건 그때였다.

좌석에 부딪힌 등이 욱신거렸지만, 로단테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부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 봐.’

소년은 곧장 창문에 덧대어진 널빤지에 손을 뻗었다.

‘제발, 제발.’

성인이 아니라고 방심한 덕택인지 손이 자유로웠다.

거친 나뭇결에 쓸린 손가락에 피가 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못이 아주 조금 헐거워졌을 때였다.

마차 문이 열렸다.

정면 돌파할 생각으로 들어 올린 시선 끝에 보인 얼굴은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어쩐지 이상했지.”

쿵, 가슴에서 무언가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내 보호 아래 있는 아이를 납치하고 겁박해?”

공녀가 고개를 틀어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 모습은 로단테를 걱정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영역을 침범당한 데서 오는 분노 때문인 것 같았다.

“누가 감히 나를 이리도 업신여겼는지 낱낱이 파헤쳐도 분이 풀리지 않을 지경이라고.”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가 선명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그저…….”

“그저?”

사납게 치켜뜬 눈이 매서웠다.

“나를 어디까지 모욕할 셈이지? 당장 말하지 않고 뭘 하고 있어.”

남자가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금세라도 큰소리가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에 로단테는 떨리는 손을 등 뒤에 감췄다.

“됐어. 네놈들이 언제까지 입을 닫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

공녀가 눈짓하자, 활짝 열려 있는 문으로 기사가 담요를 건넸다.

“업혀라.”

나지막한 목소리에 로단테는 공녀가 원하는 배역대로 행동했다.

힘없이 기사의 등에 고개를 묻자, 샤를리즈가 혀를 찼다.

“에반스 경, 그대는 저들을 맡아 줘. 나는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야겠어.”

“예, 아가씨.”

“아이는 어찌할까요?”

“하.”

샤를리즈가 다시 매섭게 남자를 노려보았다.

“제 말에 함께 태우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냥 내 마차에 넣어 놔.”

그 말을 끝으로 샤를리즈는 성큼성큼 걸음을 뗐다.

리엔타의 마차에 머뭇거리며 탑승할 때도 공녀는 로단테를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차가 출발하고도 얼마간, 조용한 정적만이 내부를 채웠다.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된 거리의 마법등으로 얼핏 보이는 샤를리즈의 얼굴은 그저 무심했다.

저 무관심에 기대 가만히 있어도 되었을 텐데, 입을 열고 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무엇이?”

기다란 손가락이 날렵한 턱을 쓸었다.

“너를 구한 것? 상단에 꽂아 준 것? 아니면 네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감아 준 것?”

“모두 다요.”

“그렇다면 참으로 편리하고도 성의 없는 인사로구나.”

모양 좋은 입술이 비틀렸다.

“말해 봐. 어째서 불법적인 행위를 반복했는지. 고마운 만큼 상세하게 서술하라고.”

“동생이 있어요.”

떨리는 입술을 윗니로 꾹 깨물었다.

“그 애를 찾으려면 돈이 많이 필요해서 그랬어요.”

“그럼 동생 찾으면 안 그럴 거라는 이야기네. 맞아?”

로단테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입 안을 맴도는 말이 너무도 많아서, 소년은 고개만 겨우 끄덕일 수 있었다.

“귀찮게.”

샤를리즈가 팔짱을 끼며 쿠션에 완전히 등을 묻었다.

“영 이상해서 뒷조사를 해 보니 불법을 심심찮게 저지르던 애가 갑자기 얌전하더군. 제 버릇 남 못 주고 일 칠까 봐 바로 보육원에 갔더니 너는 어디 가고 없어서 기사들을 얼마나 풀었는지 알아? 리엔타의 기사들이 능력 있어서 다행이지.”

때마침 들어온 불빛이 샤를리즈를 스쳐 지나갔다.

“네가 또 딴생각해서 불법 상행위 하지는 않을지 곁에 두고 감시해야겠어. 그것도 벌써 귀찮군. 그래도 네 동생을 얼른 찾을 테니 길지 않을 거라서 다행이지. 늦어진다면 기사들을 가만 안 두겠어. 내가 성가심을 감수하는 시간을 감히 늘리게 만든다면 모두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창문에 눈을 고정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이어 가던 공녀가 문득 그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건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는데.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녹안에 담겨 있는 자신은, 이상하게도 더는 추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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