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 내 턱관절.’
자주 안 쓰던 걸 갑자기 너무 써서 그런지 아릿했다.
‘아, 내 혀.’
하도 찼더니 얼얼한 느낌이다.
‘안 그래도 허약한데 더 골골거릴 수는 없다!’
길어질 이번 생을 알차게 살아가기 위해서 몸은 소중하니 한동안 말은 자제해야겠다.
다부지게 결심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꾹 감았다.
최고급으로만 이루어져 딱 좋게 푹신해서 도저히 벗어나고 싶어지지 않는 이 침대가 오늘따라 조금은 불편하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역시 빚 안 지우길 잘했어.’
나는 앞으로의 내 소중한 나날을 하루도 불편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 않다.
‘좋았어. 로단테는 이제 나한테 별로 안 고마울 거야.’
안 고마운데 고마워해야 해서 꼴 보기 싫은 인간이 되고 말련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재차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이튿날.
“우리 아가씨 가시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는지.”
‘또 온다니까, 집사.’
“마음이 벌써 헛헛하네요.”
‘날이 추워서 그래. 집사한테 몸 따뜻하게 하는 약 지어 놓으라고 말할게.’
“결혼은 아주, 아주아주 늦게 해야 한다. 알겠지? 응?”
‘아버지한테 등 비비며 살렵니다.’
“아가씨, 아이가 아가씨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나 봅니다.”
노아가 로단테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곧 갈 건데.’
로단테는 정말 내가 꼴 보기 싫은 것 같았다.
확실하게 가는 건 맞는지 제 방 커튼 뒤에 숨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기어코 삼인방 뒤에 몸을 은닉하기까지 했다.
‘못 본 척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었군.’
머뭇거리던 로단테가 내게 다가왔다.
“건강하세요.”
내키지 않는데 겨우 하는 듯 짧디짧았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불현듯 뻗어 나온 손이 내 손을 살짝 잡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몸이 뜨끈하네.’
다섯 명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엘루이든 대공저로 향했다.
* * *
나는 은밀하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구석진 그늘만 골라 이동했다.
“여깁니다, 공녀님.”
“왜 이리 일찍 도착했어.”
“어렵게 성사된 자리가 아닙니까.”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잽싸게 발을 놀렸다.
우리는 각각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대화를 나눴다.
“일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지?”
“아직 지지부진합니다.”
“저런.”
“그래도 그분께서 도와주신다면…….”
“그분은 워낙 바쁘시니 시간이 되실지 모르겠군.”
“역시 그렇겠지요?”
“리반의 몰골을 봐. 난 종종 리반을 숲에 풀어 줘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곤 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만.”
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뿔싸!’
오늘 사샤 곁을 지키는 사람은 제이였나 보다.
듣기 좋은 나직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웃지 마십시오! 왜 웃으십니까! 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리셨으면서!”
리반의 울부짖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아마 칼릭스가 보너스를 또 주기로 했나 보다.
“사샤 님의 탄신 파티 준비를 왜 이렇게 은밀하게 하시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도 그 추측에 힘을 실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기대보다 엄청나게 대단한 파티가 얼마나 추억이 되는데.”
“그럼요. 깜빡 잊어버린 것처럼 구는 건 창의력 없는 못된 종자나 하는 짓이니 제외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행여나 여리고 순수한 사샤 님께서 너무 깜짝 놀라실까 봐 걱정된단 말입니다.”
리반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얼굴로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로 칼릭스가 성큼 걸어 나왔다.
‘앗, 눈부셔.’
칼릭스가 금발이나 은발이 아니라 흑발인 이유는 분명 시력 보호를 위한 누군가의 은총임이 틀림없다.
그 은총은 이번에는 다른 방면으로도 내려졌다.
불시에 시선이 마주칠 뻔했는데, 눈을 감은 덕택에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어도 사샤를 위해서라면 만들어야지. 공녀가 구상한 내 역할을 말해 주겠어?”
나는 빠르게 눈을 흐렸다.
“그것이 말입니다.”
칼릭스는 진중한 얼굴로 내 말을 경청했다.
그러다 돌연 이런 질문을 했다.
“각자 준비한 선물을 말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때?”
‘엇, 그렇게 되면…….’
과연 나만 이 생각을 한 게 아닌지 집사와 리반도 견제하는 눈이다.
칼릭스가 피식 웃었다.
“집무실로 가는 게 좋겠군. 선물을 종이에 적고 한 번에 공개해야 할 테니 말이야.”
‘얼마나 대단한 선물을 생각했기에 저리도 여유로운 거지…….’
저 생각은 이 자리에서 나만 했을 리 없다고, 내 점심도 걸 수 있다.
* * *
“…….”
“…….”
“…….”
칼릭스가 단조롭게 평했다.
“참담하군.”
사파이어 브로치.
사파이어가 박힌 연회용 장갑.
제련한 사파이어 덩어리.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아기 용사님과 씩씩한 왕녀님의 작가가 오직 사샤만을 위해 집필한 동화책이라니.’
심지어 그 동화책 표지에 사파이어를 박지 않을 것이라고 칼릭스는 공언했다.
“이럴 것 같았지.”
칼릭스가 이마를 짚었다.
내가 한다면 두통에 시달리는 환자 같을 텐데, 그가 하니 그저 잘생기고 우아했다.
“불꽃놀이는 좋아. 하지만 사샤의 얼굴이 그려지는 건 기각이야.”
“어째서!”
나는 절규했다.
여전히 이마를 짚고 있는 섬세한 손가락 아래, 그보다 더 섬세한 눈매가 나를 향했다.
‘이런.’
그래도 대화하고 있던 도중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번 미래의 조각은 짧았으면 좋겠네.’
그 생각을 끝으로…….
‘???’
……나는 기절했다.
* * *
[꼭 아주 비밀스러운 온실 정원의 열쇠 같지 않니?]
혈색 없는 얼굴로 짓궂게 웃는 얼굴은, 사실은 흐릿했다.
흐릿해질까 봐 두려워 자주 꺼내 보지도 않았는데.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두었는데도.
[이건 실은 네 아버지의 것이야. 샤를을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며 매일매일 쓴 일기장의 열쇠거든.]
세상 가장 귀중한 것을 매만지듯 보드라운 손길이 이어졌다.
그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던가.
[그 일기장을 우리 집 어딘가에 숨겨 뒀단다. 이 놀이에는 규칙이 있어. 사용인들에게 부탁해 찾으면 안 돼. 알겠지?]
‘어머니.’
그 일기장은 온실 정원의 커다란 나무 밑에서 발견했다.
발견한 즉시 불태워 버렸다.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는데,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던 그 일기장이 문득 떠올랐다.
[면책권을 사용하겠다. 무서운 일 겪을 일 없어. 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친의 발목을 잡고, 끝내 가문의 숨통까지 죄는구나.
[이리안과 내가 영지로 내려가겠어. 황제가 부르지 않는 한 수도로 올라오지 않도록 하지. 그러니 공녀는 수도에서 계속 살아가.]
맞아.
나 이렇게 죽었었는데.
* * *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더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야 하는데.’
휘청거리며 침대를 벗어났다.
내딛는 걸음이 뗄수록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달리고 있었다.
무작정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계단을 마구 밟아 내려가던 도중이었다.
다급한 걸음이 계단을 벗어나 추락하기 전, 누군가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공녀, 어디를…….”
“이거 놔. 아버지를, 아버지에게…….”
“알겠어. 마차를 준비할 테니 일단은 올라와. 계단은 위험해.”
왜 자꾸 성가시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거칠게 팔을 빼냈다.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제야 시선 끝에 있는 남자가 명확하게 인식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전부터 내 팔을 잡은 사람이 칼릭스란 걸 알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미안해, 공녀. 내가 성급했어.”
칼릭스가 나를 부드럽게 당겼다. 계단가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조급한 빛이 서려 있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무신경한 표정으로 완벽한 단절을 고했던 그 사람이었다.
“이대로 가면 발을 다치겠어. 실례하지.”
가볍게 나를 안아 들었다. 무심코 바라본 발에는 실내화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발톱이 깨졌는지 피가 배어났다.
멍하기만 했던 머리가 그 순간 뒤늦게 작동했다.
‘잠깐. 나 현실이랑 헷갈렸어?’
어린애도 아니고 이 무슨!
얼굴이 홧홧해졌다.
나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전하, 저 정신 차렸습니다.”
내딛던 걸음이 멈췄다.
정면을 직시하고 있던 칼릭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악몽을 꿨는데, 그게 너무 실감 나서요.”
정말로 맹세코 진실이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갑자기 말 놓고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려고 했는데 자세가 자세인지라 고개를 까딱하는 건방진 인간이 되고 말았다.
‘내려서 다시 해야겠다.’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야.”
“예에.”
다리를 아래로 내리려고 했는데, 팔이 꿈쩍도 안 했다.
“저 걸어가겠습니다.”
“공녀, 봐줘. 내가 의외로 추위를 많이 타.”
눈웃음치는 얼굴을 이 각도로 보니 새롭고 짜릿했다.
“맨발로 걷는다면 감기에 걸려서 앓을지도 몰라.”
“제가 맨발로 걷겠습니다. 저는 튼튼하거든요.”
“그대가?”
순진무구한 공격의 위력은 대단했다.
억울하다.
난 정말로 한 튼튼했던 인간이었는데.
그러다 번뜩 뇌리를 스친 생각에 나는 쩌적 굳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