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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67) (67/232)

67화

흑마법은 대가를 바쳐야만 발동되는 사술이다.

말인즉, 시전자 고유의 마나가 기본이 되는 마법은 시전자가 죽지 않는 한 계속 남지만, 흑마법은 단발성이기 때문에 흔적이 남지 않아 시전자 추적이 불가하다.

‘그래서 음지에서 횡행했던 거고.’

나는 음울하게 어제 일을 반추했다. 물 떠 놓고 빌었더니 신수가 버럭 소리치며 나타났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란 말이다! 이 몸은 영혼이 아니라고!

―뭐, 반대되는 특성이니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잔재가 남을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사술이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하거라.

―아이가 도마뱀을 좋아한다고? 흠흠. 흠흠흠.

‘진짜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픈 거고.’

목걸이 줄에 끼워 둔 반지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침울해져 있던 것도 잠깐이었다.

“노아, 어서 가. 흑마법이라면 거리를 두고 하는 것일 테니까.”

‘비겁한 타이밍……!’

말하느라 잠시 긴장 풀린 사이에 예리한 고통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표정 관리를 순간 못 했다.

“주군!”

기겁한 와중에도 노아가 낮게 소리쳤다.

나는 잘했다며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가 나서 그런지 그 부위가 뜨끈하다. 어지럽다고 하더니 나도 그렇게 되나 보다.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나는 노아에게 가 보라며 손짓했다.

노아는 머뭇거리며 아픈 얼굴을 했지만, 무사히 내 말을 따라 주었다.

‘이대로 테라스에 짱 박혀 있는다.’

그때였다.

[그대가 다치길 바란 적 없어.]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해 줘.]

[제발.]

그건 더는 활자가 아니었다.

알고 있는 목소리에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금세라도 넘칠 것만 같던 감정은 기어코 넘실거렸다.

마치 쏟아지는 거센 폭우를 맞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

숨을 쉬기 어려웠다.

나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누군가 나를 돌려세운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샤를리즈.”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걸로 끝나는 게 낫지, 대공이 부상 입은 것보다는 낫잖아. 내가 사샤 또래 아이들 부르자고 했는데, 애들이 그런 모습 보는 것도 교육상 안 좋고. 그렇게 안 아팠어. 이건 그냥 미래가 이상하게 보여서 이런 거야…….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할 것 없다고.

제대로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저 아래 깊은 무저갱으로 빨려 들 듯 나는 눈을 감았다.

* * *

리반은 무거운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연회 중에 들이닥친 불길한 기류는 확실했으나 짧았다.

[이런, 내 조카님께서 건강하게 자랄 모양이야.]

[하하, 그렇습니다. 추운 날 태어난 아이는 강골로 자라난다는 격언이 있지요.]

칼릭스의 말로 분위기는 금세 본래 궤도를 찾았다.

어느 귀족과의 대화를 노련하게 끊어 내고 칼릭스는 테라스 석으로 향했다.

‘어쩐지 이상해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길 다행이었지.’

[고, 공녀님이 아니십니까?]

[샤를리즈가 많이 피곤했나 봐. 어제 사샤의 생일 파티를 챙겨 주느라 고생하긴 했는데.]

칼릭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에 귀족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바람 한 점 새어 들까 두렵다는 듯 칼릭스의 겉옷이 샤를리즈에게 걸쳐져 있었다.

비공식 생일 파티에도 참석하고, 파티를 주도하기까지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이 스치듯 지나가는 말에도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도 부디 즐겁게 지내다 가길 바라.]

두 주요 인물이 빠졌지만, 연회는 침체되지 않았다.

당장 그들이 방금 봤던 광경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데다, 사샤의 가치가 한층 더 올라간 덕택이었다.

제이와 시선을 교환한 리반은 은밀히 연회 홀을 빠져나왔다.

“리반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고풍스러운 공간은 의무적으로 꾸며 두기만 한 대공비의 침실이었다.

샤를리즈는 혈색 없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 지혈할 때도 앓는 소리 한번 없더군.”

칼릭스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추적한 장소에 흑마법사는 이미 없었을 테고, 연회장에서 이탈한 이도 없었겠지.”

휘어지는 눈매로 감춰 보아도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위압감이 선명했다.

갈무리하지 않은 분노가 새파란 눈동자를 드리웠다.

“그래도 성물로 역추적하는 방법도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정보는 무릇 시간과 돈 두 가지 모두로 손에 쥘 수 있는 법.

젊은 대공이 정보전에 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 맹점을 이용해 칼릭스는 덫을 쳤다.

촘촘한 그물은 필요 없는 것들도 걸려 선별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놓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려나.”

무심히 중얼거린 칼릭스가 불현듯 얼굴을 살짝 기울였다.

“예상보다도 더 출혈이 멎지 않더군.”

“…….”

“많이 아팠을 테지.”

그런데 왜.

샤를리즈는 흑마법이 도래한 순간을 목격했던 것이 틀림없다.

사샤에게 전하지 않고 집무실에 두었던 다른 한 쌍의 반지가 샤를리즈에게 있던 이유는, 그것 말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전하가, 염려되신 게 아니었을지요.”

리반이 어렵게 입을 뗐다.

그는 스스로도 샤를리즈를 옹호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랬기에 이런, 굳이 필요 없는 서두를 붙이게 됐다.

“사랑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셨지 않습니까.”

“이상하지.”

칼릭스가 짧게 웃었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버리고 가는 게 사람인데, 공녀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를 걱정해.”

한없이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마른침을 삼킨 리반은 짧게 묵례하고 침실을 나섰다.

오직 둘만 남은 공간은 분명 작은 목소리도 울릴까 걱정될 만큼 커다란데도, 칼릭스는 문득 이 장소가 무척이나 협소하다고 느꼈다.

빈틈없이 조여 매고 있던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어야 할 정도로.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구름이 이동하고, 달이 기울었다.

불현듯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새하얀 달빛을 받은 샤를리즈는 금세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보다 더 우스운 것은 정말로 두려워 샤를리즈의 손을 쥐고 말았다는 것이다.

“공녀, 어서 일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는 거야.

다시는 이런 위험한 일, 하지 않겠다고.

그러다 칼릭스가 문득 중얼거렸다.

“공녀가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를 일은 없으니 이건 소용이 없겠군. 그럼 어떡하면 좋지…….”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신자처럼 샤를리즈의 손등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해도 버리고 가는 게 사람인데, 공녀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를 걱정해.]

“……그렇다면, 공녀가 차라리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 * *

그들 부친의 여성 편력은 유명했다.

혹자는 지고한 권력자란 무릇 호색한이기 마련이라고 했고, 혹자는 그래도 정도가 있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후계가 셋밖에 되지 않은 것은, 이 제국을 수호하는 신수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방증인지도 몰랐다.

“칼릭스, 저 넓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즐거운 일이 있단다.”

그의 모친은 늘 쾌활했다.

무희로 자유롭게 살았던 그녀의 발목에 단단히 물린 족쇄에게도 따뜻한 미소 한 자락을 내비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네게 꼭 보여 주고 싶어.”

그녀는 사랑하는 게 많았다.

아들을 사랑했고, 노란색 꽃에 하얀 나비가 내려앉는 장면을 사랑했고, 노을 지는 하늘을 사랑했고, 자유를 사랑했다.

“칼릭스 너를 사랑해. 이것만큼은 진심이야.”

황제는 무희를 다시 찾지 않았다. 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시종장의 일일 테니 이미 새카맣게 잊은 지 오래인지도 모른다.

“너를 절대로 잊지 않을게.”

이마에 닿은 따스한 흔적이 마치 낙인 같았다.

아이는 때로 생각하곤 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더라면, 사랑을 갈망하며 살아갈 수라도 있었을 텐데.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할 수 없었다. 아이는 모친이 자유롭게 살기를 소원했다.

탈출 시도는 비극적으로 끝났다.

유폐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활한 이름 없는 황비의 얼굴을 기억하는 기사는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침입자를 도주하기 전 사살했다는 보고에 황제는 무슨 변덕인지 직접 행차해 얼굴을 확인했다.

“아름답잖아.”

안타깝다는 듯 황제가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절반은 황실, 절반은 귀족 가문의 피가 흐르는 자식은 둘이나 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황성이 소란스러워지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황제가 심장 마비로 드디어 죽은 것이다.

“모두 미안하다. 미안해…….”

열다섯부터 스물여덟이 되도록 변경을 전전한 새로운 황제가 제 허리에도 닿지 않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저보다 뛰어난 아들이 두려워 죽어서 돌아오라며 전쟁터로 보냈다던 1황자.

그의 이복형이었다.

이상한 사람.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

그런 형이 죽었다. 이번에는 독살이었다.

“사샤를 부탁한다, 내 동생.”

황제의 입매가 떨렸다. 일견 잔혹한 말이었으나 소년은 알았다.

유언. 유지. 아니, 그보다는 염원.

그의 이복형은 칼릭스에게 살아갈 의미를 만들어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소년을 사랑해 하는 말이었다.

마치 조롱하듯 황가의 푸른색으로 변색된 형의 머리카락 끝을 보았다.

그 이후로 칼릭스는 푸른 장미 정원을 자주 찾곤 했다.

그럴 때.

가끔, 아주 가끔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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