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걸로 없던 일로 해.]
신관에게 보이지도 않았는지 샤를리즈의 뺨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
[전하가 신경 쓰여요.]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새파랗게 빛나던 녹색 눈은 오래전의 한순간에 불과한데도 유난히 뚜렷해지고는 했다.
[월반까지 해서 쫓아오다니 정말 징그럽기도 하지. 괜찮으십니까?]
[이러다 향후 전하의 혼약자에게 크게 해코지를 하면 어찌한답니까.]
[제 동생은 공녀의 악담과 폭력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아이입니다.]
[제 동생도 만만치 않게 현숙한 성정입니다!]
그런 말들은 귀담아들은 적 없다.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고는 하나, 속내는 모를 일이다. 칼릭스는 리엔타를 낱낱이 조사했다.
어설픈 동질감은 느끼지 않았다.
공작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독녀와 그는 처지가 달랐다.
원하는 모든 걸 손에 넣을 수 있는 공녀가 유일하게 갖지 못한 것. 그 마음에 부응하지 않아 오기로 그런 것일 터다.
그러면 샤를리즈가 착각했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도록 어울려 줬으면 되는 일이었다.
샤를리즈는 무도회에서 그의 파트너가 그 누구도 되지 못하도록 손을 썼다.
목적이 같은 사람을 찾아 연인인 척 굴었으면 되는 일이다.
[차라리 내가 싫다고 말해! 끔찍하다고 해! 그러면 다시는 네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을 테니까.]
[그것 봐, 너도 나를 사랑하잖아.]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 겪는 일은 없으실 테니 잘 곱씹으세요. 그거 보기 드문 겁니다.]
한 가지 단어로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 몰아닥쳤다.
흠뻑 젖을 걸 알면서도 맞는 비였다. 멀어지고 싶지 않은 불꽃이었다.
[나는 네가 걱정돼.]
그건, 나도 그랬어.
* * *
깊이 가라앉았던 의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직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악몽 꿨죠?”
느른하게 풀어진 눈이 샤를리즈를 응시했다.
“이럴 때 이마 박치기하면 금방 잊어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제대로 박아…….”
“응, 샤를리즈.”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보드라운 손에 볼을 깊이 괴었다.
“지독한 악몽을 꿨어.”
이윽고 다시 드러난 눈은 더는 흐릿하지 않았다.
* * *
착각. 한때는 그런 것을 하던 시절도 있었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엇……?’
그런데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칼릭스잖아?’
왜 여기 있지? 의아한 동시에 깨달았다.
옆구리에 가까운 하복부가 쑤셨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모양이다. 새카만 밤하늘은 여명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잠깐. 마도구 잘 숨겼었나?’
후다닥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쪼그라들었다.
고아함. 웅장함. 화려함.
어울리지 않는 셋을 돈이라는 매개로 잘 뭉쳐 만든 것 같은 방이었다.
‘가주의 침실인가?’
슬쩍 일어나려고 했는데, 나는 그만 칼릭스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섬세한 이목구비는 그저 무표정했다.
흘러나온 말소리를 포착하지 못했더라면 이대로 소리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라비아.”
선황후가 머무른 궁의 하녀이자, 친우가 된 인물.
그녀가 난산 끝에 사망하자 기꺼이 사샤의 친모 역할을 떠맡은 사람의 이름이었다.
‘기억하는구나.’
그녀는 원작에 등장한 적 없었다.
칼릭스도 끝내 행적을 찾지 못했으니 아마 오래전 사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엄청 꼭꼭 숨어서 살았었나 봐.’
하긴. 선황자를 죽은 척 가장하고 몰래 키웠으니 변경의 아주 작은 산골에서 살았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때, 검은 속눈썹이 미동했다.
“정신이 드세요?”
아닌가 보네.
초점이 흐릿했다.
칼릭스의 양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려다가, 나는 손을 조금 더 내려 옷깃을 쥐었다.
결코 멱살잡이하지 않았다!
“악몽 꿨죠?”
맞는 것 같다.
원하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악몽 전문이 되어 버렸다.
“이럴 때 이마 박치기하면 금방 잊어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제대로 박아…….”
“응, 샤를리즈.”
칼릭스가 내 손바닥에 볼을 깊이 묻었다.
나는 움찔거리지 않았다. 사샤로 단련된 덕택이었다.
“지독한 악몽을 꿨어.”
아직 악몽에서 제대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목소리가 유난히 나긋했다.
웃음기도 조금 배어 있어서, 나는 제발 그 악몽에 내가 나오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조언은 고맙지만, 이마는 소중히 하는 게 좋겠군.”
모양 좋은 손이 내 이마를 텁 덮었다.
“열이 많이 내려서 다행이야.”
눈이 마주쳐도 미래가 전개되지 않아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예, 저는 건강합니다.”
“이런 일, 다시는 하지 마.”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느낌이…….’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자. 공녀는 공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거야.”
“…….”
“샤를리즈?”
아, 깨달았다.
‘테라스에서 들려온 말이랑 비슷한 듯 달라.’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싫다면요.”
눈을 들어 칼릭스를 직시했다.
“싫다면 강제하실 건가요?”
“음.”
칼릭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화난 건가. 생각한 순간, 듣기 좋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공녀를 졸졸 따라다닐 거야. 위험한 상황에서 위험할 틈이 없도록.”
“…….”
“그것도 나쁘진 않겠어.”
칼릭스가 진지하게 되뇌었다.
멍 때리고 있다 내게 여러모로 위험한 사람 붙이고 다니게 생겼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계약서를 수정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제 목숨이 제일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이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흐음.”
칼릭스가 묘하게 웃었다.
“좋아.”
“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건 내일 할게. 오늘은 푹 쉬어.”
“예!”
칼릭스가 나갔다.
……나갔다?
‘어어?’
잠시 고민하다가 나도 나갔다.
원래 금방 적응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공작저의 내 방 침대처럼 익숙해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그대가 다치길 바란 적 없어.]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약속해 줘.]
[제발.]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칼릭스가 고작 내가 다쳤다고 저렇게 굴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멋쩍어져 볼을 괜히 손끝으로 매만졌다.
“그럼 뭐지?”
혹시 눈 뜨고 꿈꾼 건가.
‘기각.’
내 창의력은 카타리나를 카나리아를 거쳐 종달새라고 하는 수준이다.
들어 본 적 없는 감정이 생생한 목소리, 창작해 낼 수 없다.
‘사실, 들리는 거라면 그 꿈들에서 그랬는데.’
이상한 꿈에 대해 나는 고심했었다.
결론은, 신성력을 겪고 칼릭스를 보면 원작에 서술되지 않았던 장면이 보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왜 하필 칼릭스냐는 의문은 안 가졌다. 애초에 나는 칼릭스를 통해 미래를 보고 있다.
‘애석하지만…… 신수는 신성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가 있었다.
‘신성력을 겪고 꿈 안 꾼 적 있다고.’
신전의 서고에서 책의 반출을 감시하는 성물이 그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다.
‘부상을 맞바꾸는 성물의 신성력이 약할 리가 없는데 이번에 꿈을 꾸지 않았어.’
잠깐 딴 길로 샌 생각은 기억해 두고 나는 다시 방향을 틀었다.
아무튼 눈 뜨고 꿈꿨다고 치면 더 이상해졌다.
‘원작에서 칼릭스가 왜 나한테 저런 말을 해?’
그러고 보니 ‘공녀’라고 나를 지칭한 부분은 없었다.
“이리안한테 하는 말이었나?”
이게 제일 이상했다!
‘위험한 상황을 겪은 여주에게 남주가 절절히 감정 쏟아 내는 장면이 소설에 안 나온다고……?’
소득 없이 끙끙거리다가 나는 문을 조심스레 걸어 잠그고 마도구를 집어 들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이번에도 침구를 머리끝까지 덮고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노아!”
―주군!
노아가 부지런히 걱정을 말했다. 나는 충실하게 답변했다.
“무사해. 건강해. 아프지도 않아.”
―다행입니다…….
노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속 썩이는 철부지가 된 기분이라 나는 눈치를 살폈다.
“미안한데, 내일 로단테를 데리고 대공저를 찾아 줄 수 있겠어? 대공 전하에게는 내가 설명해 둘게.”
―예, 알겠습니다.
“로단테 동생은 찾았어?”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주군. 저는…… 내일 리엔타로 귀환한 후 동생을 찾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야.”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내가 미리 동생을 찾아 두고 포섭했다고 로단테가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럼 내일 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안 되면 말아야지.’
나는 로단테에게 내 축복을 맡겨 둔 적이 없다.
“그래도 오늘 만나게 해 줘. 시간 외 수당은 잘 쳐 줄게.”
―……시간 외 수당이라니 그런 용어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혹시 엘루이든이 주군을 부려 먹고 있습니까?!
“아니야, 아냐.”
노아가 펄쩍 뛰었다.
나는 황급히 말했다.
“보너스 합쳐서 본래 봉급의 두 배는 넘게 받을 것 같은 보좌관이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어.”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노아는 리반의 비극에도 금세 침착해졌다.
‘걱정해 줬다.’
나는 작게 웃었다.
“뻔뻔한 말이지만 매번 말하지 못해도 잊지 마. 늘 고마워하고 있어.”
통신이 끊어졌나 싶은 무렵이었다.
물기 어린 숨이 가늘게 들렸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이어질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주군을 더 일찍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이.
“내가 내 명줄보다 6년 더 살아남을게.”
노아가 웃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완전 진심인데.’
아무튼 울적한 기분이 가셨다면 됐다.
통신을 끊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아도 리엔타의 사람들처럼 깡총 뛰게 되었으려나.’
다음에 만나면 유심히 지켜봐야지.
홀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이불 동굴에서 탈출했다.
* * *
늦은 시각이었다.
잿빛 머리카락의 기사가 로단테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께서 네 동생으로 추정되는 아이를 만나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구나.”
로단테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보육원에 후원을 여러 번 하셨는데, 그렇게 연이 닿았던 모양이야.”
수도의 보육원에 있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