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혹시 이거…… 카타리나 황후 만났을 때 그건가?’
[비록 친동생은 아니지만 잘 부탁한단다.]
나는 얌전히 코코아를 마시는 아이를 머뭇머뭇 쳐다봤다.
“사샤는 보육원에서 형님이었던 적 있지?”
“네.”
“귀찮지 않았어?”
고민하듯 눈을 깜빡거린 사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안 귀찮았어요. 모두 내일도 보고 싶었어요.”
코코아가 든 컵을 꼭 쥔 손에서 결의가 느껴졌다.
“사촌이라는 관계가 된다고 리반이 말해 주었어요. 좋은 형님이 될 거예요.”
“응, 사샤는 좋은 형님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무엇이에요?”
“행복한 사샤가 되는 거야. 알았지?”
“네에.”
사샤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거리며 묻는다.
“샤를 님, 결혼은 언제 하실 거예요?”
이렇게 갑자기?
어리둥절했지만 착실하게 대답했다.
“대략 오십 년쯤 후를 예상하고 있어.”
“오십 일이요?”
사샤가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었다.
“어, 얼마 안 남았어요.”
“아니. 오십 년.”
“오, 오십 년이요?”
푸른 눈동자가 떨렸다.
나는 손수건을 들어 사샤의 수염을 슥슥 닦아 주었다.
“오십 년 뒤엔 형님이 아니라 할아버지인데…….”
어딘가 시무룩한 기색으로 무어라 작게 중얼거린 사샤는 꼬물꼬물 일어나 배꼽 인사를 했다.
“공부하러 갈게요. 즐거웠습니다, 샤를 님.”
열심히 공부한다는 애를 잡을 수도 없고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함께 인사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칼릭스의 집무실이 위치한 3층에 도달했다.
‘역시나 저기 있군.’
오늘도 느릿느릿 걷는 리반의 얼굴은 혼이 빠진 듯 창백했다.
이제 저 얼굴, 믿지 않는다!
“리반!”
나는 돌진하는 들소처럼 단숨에 리반과 거리를 좁혔다.
“잠시 나랑 얘기 좀 하지.”
“예? 저랑요?”
“복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저기로 가는 게 좋겠군.”
“예? 저를요?”
‘뭐야, 왜 이래.’
하지만 무릇 정신이 약간 빠져 있을 때 대화가 통하기 마련이지.
‘마침 잘됐군.’
나는 리반의 손목을 질질 끌고 아무 방에나 들어갔다.
문고리를 내린 채로 문을 닫고 조심조심 문고리를 손에서 놓았다.
달칵. 이 작은 소리만으로 화드득 정신 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사샤가 황후의 출산을 고대하고 있나 봐. 사촌에게 좋은 형님이 되고 싶다며 공부에 중독되어 버렸어!”
“……전자가 걱정입니까, 후자가 걱정입니까?”
“당연한 걸 뭘 물어? 둘 다지.”
나는 눈썹 끝을 밀어 올렸다.
“벌써 정신이 돌아왔군.”
“아카데미 월반을 학기 마무리처럼 했던 공녀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충격적이어서 말입니다.”
제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리반이 말했다.
문신 수준의 다크서클을 보유한 엘루이든 최고의 초췌한 안색을 가진 사람이 힘없이 비틀거리는 모습에서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리반, 그대는 얼굴값을 너무 심하게 해.”
“예? 그건 또 갑자기 무슨……. 아무튼 제가 얼굴값을 얼마나 하든 공녀님만 하겠습니까…….”
마른세수를 한 리반이 피곤함을 한결 씻어 낸 얼굴로 대답했다.
“사샤 님께서 사촌 동생에 관해 제게 질문하신 적은 있습니다. 황제 내외의 아이를 말씀하신 건지 여쭤보니 고개를 도리도리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게 저으시더군요.”
“……어?”
그럼 남은 후보는 하나뿐인데?
“사촌 동생은 언제 생기는 거냐고 물어보셔서, 결혼하면 생긴다고 답했습니다만.”
“……그래서 언제 결혼하느냐고 물었던 거로군.”
“무어라 답하셨는데요?”
“오십 년 후에 한다고.”
“예?”
리반이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결혼 미리 축하드립니다. 저는 그때 이 세상을 하직한 지 오래일 것 같거든요.”
“미리 조의를 표하진 않겠어. 나는 그날까지 살아 있을 거거든.”
“예에, 공녀님은 거뜬히 생존해 계실 것 같습니다…….”
훈훈한 분위기로 대화를 마치고, 나는 3층에 올라온 김에 칼릭스를 만나고 내 방으로 향했다.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금속성의 냉기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
문고리를 내리는 대신 방향을 바꿔 다시 걸어갔다.
* * *
겨울의 그 순간에 갇혀 있던 로나터스에 드디어 시간이 흘렀다.
숙청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으나, 한 사람은 늘 그랬듯 여유로웠다.
에리히가 긴 의자에 누워 기지개를 쭉 켰다.
부친은 깨어났고, 후계자는 여동생이 되었으며, 그는 탱자탱자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네놈의 피가 그토록 진할 줄은 몰랐구나.]
집사가 혈연관계인 페르난 백작가와 내통했고, 백작이 로나터스의 실세라도 된 양 굴며 라베트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에 로나터스 후작은 크게 분노했다.
변방 귀족가의 자제가 겪었다고 해도 화제가 될 일. 그 정도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 피해자임에도 사교 활동을 하는 내도록 꼬리표로 따라붙을지도 모르는 사안이었다.
자식의 명예를 위해서는 결코 대외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마상 대회에서 페르난의 기사를 우리 기사가 이기는 것으로 만족하실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러실 줄이야.’
결벽적일 정도로 정도만 걷던 완고한 기사는 죽음의 경계에서 한참 헤매다 돌아온 후 많이 달라졌다.
가문의 정예 기사로 페르난 백작을 급습해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착각하고 있었다.]
에리히가 코밑을 슥 훔쳤다.
부친의 품은 생각했던 것만큼 커다랬고,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했다.
큼 헛기침한 에리히는 괜히 중얼거렸다.
“백작은 겁도 없지. 어떻게 리엔타 공녀에게 암살자를 보낼 생각을…….”
말하다 보니 오싹해졌다.
공녀는 암살자의 머리채를 질질 잡아끌어 수도의 페르난 백작저로 쳐들어갔다고 한다.
정보의 출처는 귀족 재판에 회부된 페르난 백작이 제출한 문건이었다.
여러 입을 거치며 과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대다수의 귀족은 백작이 재판에서 그 내용을 읊자, 충격받은 듯 몸을 떨었다.
에리히만이 평온했다.
그는 저 말이 진짜임을 의심치 않았다!
슬프게도 에리히의 몸은 샤를리즈 리엔타를 생각하기만 해도 바른 자세로 앉을 만큼 빠릿빠릿해졌기 때문이다…….
“에이씨.”
다시 벌렁 드러누우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 순간, 그것은 직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심장에 추가 매달리기라도 한 듯 쿵 내려앉았다.
“누, 누군데?”
“리엔타의 샤를리즈 공녀님이십니다.”
“…….”
“저어, 그리고 5분 내로 오지 않으면 재밌어질 거라고 하셨습니다.”
* * *
에리히는 끌려가는 죄수처럼, 그리고 동시에 기다리는 물건을 받으러 가는 사람처럼 느리고도 재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사실, 이동한 시간보다 응접실 문을 앞에 두고 망설인 시간이 더 길었을 터다.
시계를 끝의 끝까지 확인하며 주먹을 내리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리엔타 공녀를 뵙습니다.”
“그래.”
고개를 까딱인 샤를리즈가 문을 크게 열었다.
“경에게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어.”
“무엇입니까?”
샤를리즈가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깨갱하며 에리히는 말을 바꿨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사교 클럽에 가서 이야기 좀 듣고 와 줘.”
이건 결코 아버지를 살린 데 공녀가 공헌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밖에 나가서 한바탕 신나게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런 거 말이야. 영식들이 관심 두는 것도 좋고.”
“예?”
“취합해서 엘루이든으로 연락해. 나 간다.”
“자, 잠시만! 제가 공녀님 부하도 아닌데 이렇게 사람 부려 먹고…….”
무어라 중얼거리던 에리히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흘은 걸립니다.”
* * *
에리히는 ‘에이씽’ 하는 깜찍한 소리를 내더니 예법에 맞춰 인사하는 것도 모자라 나를 배웅하기까지 했다.
“뭐지. 철들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펜을 들었다.
‘서둘러야지. 빨리 파혼해야겠어.’
“그런데 원작에 서술되지 않는 사건도 많아서 문제란 말이지…….”
대부분은 잔잔한 것에 그치겠지만 로단테처럼 원작에 서술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할 만큼 커다란 사건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에리히 자식한테 사교 클럽 돌아다니며 동향을 조사해 보라고 시켰다.
깊이 파고들어 조사해야 하는 일도 아니니 저놈도 할 수는 있을 거다.
무엇보다도…….
‘에리히는 좀 멍청하니까 또 홀라당 낚으려고 할 것 같은데.’
에리히 로나터스. 단순 무식 여린 구석도 있는 온실 속 화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