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미안해.”
대뜸 그 말이 들렸다.
“내가 잘못했었어.”
루카스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과했다.
잠시 그 얼굴을 쳐다본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끝이야?”
“응.”
분명 사과를 했고, 용서한 상황인데도 마음이 찜찜했다.
입을 꼭 닫고 눈을 굴리던 루카스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건 사과를 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나 싫어해?”
루카스가 애써 눈물을 꾹 참으며 물었다. 목소리만 듣자면 그저 툴툴거리는 것만 같았다.
죽은 부친의 유약함을 닮았다며 가신들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어머니도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를 바라봐서 이런 건 이제 하나도 티 내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도련님. 선황자라며 나타난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게 어떠십니까?]
[가르침?]
[예. 황족도 도련님을 두려워한다고 보여 주십시오.]
[……어떻게?]
[곧 성축일이지 않습니까. 사람은 어두운 공간을 두려워하기 마련이지요. 가두십시오.]
[뭐? 그건 너무해.]
[하아. 도련님. 가주님께서 걱정이 크십니다.]
[…….]
[북부를 지탱하는 바이에르는 유약한 성정으로 다스리기 힘든 영지이니까요. 가주님께서 얼마나 많이 애정을 들이셨는데, 걱정이 되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알아.]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믿음직한 아들이 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랬는데.
[대, 대공 전하. 큰일 났어요. 사샤 님이, 사샤 님이요…….]
결국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일별했다.
이번에 엘루이든에 보낸 보석만 1년 예산에 버금가는 금액대라고 했다. 대공이 받지 않고 돌려보냈지만 그게 더 큰 문제라는 건 루카스도 알았다.
[아시겠지요, 도련님. 그러니 더 잘하셔야 합니다.]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온 건 맞다.
그래도 소년은 사실 사샤가 싫지 않아서, 그래서 정말 이상하게도 실은 서운했다.
“안 싫어해.”
그런데 왜 그러냐고, 루카스는 생각했다.
속으로만 물은 질문을 마치 들은 것처럼 사샤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는 말, 처음 들어 봤어.”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샤를리즈의 상냥함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게만 보여 준 것이니까, 그만 알고 싶었다.
“뭐? 처음 듣는다고?”
루카스가 얼굴을 구겼다.
“그럼 너한테 잘못한 애들 다 입 씻은 거야?”
“입을 씻어?”
사샤가 무심결에 손바닥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게 아니라 사과도 안 했냐고!”
“응.”
“너 바보 맞구나.”
여전히 허공에 떠서 하관을 가리는 손을 잡아끌어 루카스가 제 멱살을 쥐게 했다.
“그럴 때는 이렇게 하고, ‘야! 당장 사과해!’라고 하는 거야.”
“…….”
“해 보라니까?”
“야. 당장 사과해…….”
“그래. 그렇게!”
그리고 루카스가 종알거렸다.
“……미안해.”
사샤는 눈을 깜빡였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옷깃에 자국이 남을 만큼 꼭 잡고 말았다.
“응.”
“…….”
“알았어.”
루카스가 눈을 빛냈다.
“그럼 우리 이제 화해한 거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사샤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응.”
루카스는 들떴다.
‘용서해 줬어!’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를 움찔하다가 당황해 눈을 굴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데, 이걸로 왜 기분이 좋은 건데?’
소년은 곧 답을 찾아냈다.
‘그래, 이건 쟤랑 친해져야만 하니까 그런 거야. 일단 첫 번째 목표를 이뤄서 기분 좋은 거라고!’
그때였다.
“뭐야.”
리엔타의 그 공녀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저 멀리 있었으니 분명 달려온 것일 텐데, 숨이 찬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머리카락도 방금까지 손질한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루카스는 완벽한 사람이 싫었다.
몽실몽실한 마음은 금세 걷혀서, 루카스가 눈을 세모나게 떴다.
“샤를 님, 이건…….”
사샤가 손을 떼고, 창백한 얼굴로 얼른 말을 하다가 멈췄다.
‘저 바보.’
루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제 멱살 잡으라고 했어요. 사샤 님이 잘못한 거 없어요.”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애는 아무한테나 멱살 안 잡거든.”
샤를리즈 공녀가 몹시도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사샤가 잘못했으리라고 생각조차 한 적 없다는 듯.
그 믿음을 받는 사샤가, 루카스는 문득 부러워졌다.
샤를리즈가 뚱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런데 사샤가 네 멱살은 왜 잡게 한 건데?”
“……예전 일, 사과하고 싶어서요.”
“엄청 늦긴 했지만 좋은 자세로군.”
무뚝뚝하게 대꾸한 샤를리즈가 사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느라 올라간 바짓단을 내려 주고, 머리카락도 슥슥 정돈했다.
“…….”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멀리 던졌다.
엘루이든 대공과 대화를 나누던 어머니는 시선을 느낀 듯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짧았다.
길가의 꽃을 봐도 이보다 더 오래 쳐다봤을 것이다.
‘내가 더 훌륭한 후계가 되면 그땐 돌아봐 주실 거야. 내가 더 잘하면 돼.’
뜨거운 말을 삼키는 건 이제 아주 쉬운 일이 되었는데, 오늘따라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어려웠다.
루카스는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다음에 만나.”
대충 말하고 휙 몸을 돌렸다.
* * *
나는 멀어져 가는 작은 등을 보며 생각했다.
‘꼭 아기 고양이 같다.’
아기 고양이 시절의 이리안이 떠오르는 깜찍한 성질머리였다.
“집에 먼저 돌아가 있을래, 사샤?”
“같이 돌아갈래요.”
‘지금 같이 가고 싶다.’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일단은 여기 너무 귀찮았다!
‘그래도 단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힘내 보자.’
울적한 기분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나저나 지켜보는 기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자녀의 안전이 걱정이라면 애초에 데려오지 않는 게 옳겠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사교계 데뷔 전 친목을 다지는 일은 알음알음 아는 관계에서만 가능하니까 다수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소중하지.’
사샤는 꽃을 더 보겠다며 쪼그려 앉았다.
나는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은 후, 자리를 떴다. 로단테가 오든 안 오든 오늘 내 신변 이상은 확정이다.
아이랑 떨어져 있는 게 맞았다.
‘그럼 칼릭스랑도 잘 떨어져 있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얼굴이 보일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바이에르 공작과 대화를 나누는 칼릭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인기척을 느낀 듯 칼릭스가 심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눈을 휘어 웃었다.
“내 말이 맞았지, 공녀?”
이상한 일이다.
그 순간,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파져 왔다.
[안 돼. 아가. 안 돼!]
[제발, 제발 내게서 너를 앗아 가지 말아다오.]
[궁금해한 것 모두 이야기해 줄게. 일어나기만 한다면 모두 말해 주마. 정말로 모두……. 그럴 수 있다. 제발. 그러니, 제발.]
아버지.
[네가 막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와 주었을 때. 교황이 나를 찾았었다.]
“샤를리즈!”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샤를 님!”
멀리서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화살처럼 나를 꿰뚫었다. 혀를 마구잡이로 짓씹으며 고통을 감내했다.
“어, 어떡해. 무슨 일이에요? 숙부님. 샤를 님이 왜…….”
자그마한 손이 내 손가락을 절박하게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콰과광!
“무슨 일이지?”
바이에르 공작이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그사이 고통이 진정됐다. 칼릭스에게 눈짓하자, 그가 사샤를 안아 들었다.
“샤를 님…….”
작은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아이의 팔이 내 목을 단단히 감쌌다.
“괜찮아.”
“우으.”
그러나 상황은 괜찮지 않았다.
멀리서 비명이 연이어 터졌다.
저들끼리 무리를 지어 모여 있던 아이들이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의아한 점은 많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순간의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카스가 없어요.”
발검한 채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 쪽을 살피고 있던 바이에르 공작이 내 말에 즉각 시선을 돌렸다.
“……숲에라도 들어갔나. 시끄러운 소리는 들렸을 테니 곧 나올 테지. 그것도 못 할 정도로 아둔한 아이는 아니야.”
그러면서도 공작의 눈은 루카스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루카스는 제가 찾아볼 테니 각하께서는 가 보세요.”
바이에르 공작은 북부의 수호자이며 그 무위로 유명하다. 아들을 찾느라 현장을 외면한다면 사상자 수만큼이나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 수 있었다.
‘바이에르 공작의 남자 형제가 살아 있으니, 대의보다 혈육에 이끌리는 사람은 가주위에 적합하지 않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가신들이 분명 나오겠지.’
그런 말들이야 쳐 내면 그만이지만, 바이에르 공작은 그녀의 성정상 내부 결속이 와해되는 일 자체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잠시 침묵한 바이에르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걸로 두 번째군. 공녀에게 고마운 일.”
나는 웃었다.
“걱정 마세요. 다 받아 낼 테니까요.”
“기대하고 있도록 하지.”
바이에르 공작이 이동하고, 나는 숲을 돌아보았다.
오히려 내가 공작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숲에 들어가도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지 않을 이유를 얻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