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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77) (77/232)

77화

“샤를리즈. 잠시만.”

칼릭스가 사샤를 품에 단단히 안은 채 말했다.

“제이를 데려가. 사샤를 마차까지 데려다준 후 합류할게.”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제이가 말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수상한 폭음에 곧바로 주군을 찾아온 듯했다.

나로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루카스를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오랜만이야, 경. 가지.”

“예!”

장난스럽게 경례 표시를 한 제이가 말에 훌쩍 올라탔다.

나도 말에 오르려던 때, 칼릭스가 말했다.

“공녀, 손을 줘.”

나는 의아해하며 손을 내밀었다.

“사샤, 꼭 안겨 있어.”

유독 느릿느릿한 투였다.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사샤가 칼릭스의 목을 두 팔로 꼭 껴안아 안겼다.

“그래. 잘했어.”

칼릭스는 빠르고 정교한 손길로 각자의 장갑을 벗기고, 손바닥과 손바닥을 마찰시켰다.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던 벽안이 아래로 떨어졌다.

손목 끝까지 장갑을 밀어 올리는 손길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샤를리즈. 다치면 안 돼. 그대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

‘예?’

한 손으로 모두 셀 수 있는 빈약한 인간관계였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제이를 제물로 바치고 도망쳐.”

“예, 그러십시오. 저는 강합니다!”

“더 상세하고 많은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는 걸로 하지.”

‘여기서 더요?’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와 나는 등을 돌렸다.

숲은 초입인데도 우거진 녹음이 만발해 있었다.

“바이에르 공자가 이곳에 있습니까?”

“아마도. 들어가는 건 봤는데 나오는 건 못 봤거든.”

“오오, 어쩐지 무서운 말이로군요.”

제이가 과장되게 몸을 떨었다.

“나 안 무서우니까 그럴 것 없어.”

“제가 무섭습니다. 제가.”

애교 있게 툴툴거린 제이가 금세 안색을 굳혔다.

“아이의 걸음으로 여기서도 안 보였다면 꽤 깊은 곳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기사들을 수색에 동원할까요?”

다소 이른 말이기는 했으나 검은밤 소속 기사답게도 제이는 아집을 부리지 않았다.

“아니. 여기 근처에 있을 거야.”

나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루카스 너도 들었겠지만 일이 발생한 모양이야. 그래서 바이에르 공작 각하께서 나를 대신 보내셨거든.”

“내가 너 못 찾아서 가면 큰일이니까 나 좀 살려 줄래?”

“루카스. 울고 있다고 안 놀릴 테니까 어서 나와.”

“어이, 울보. 울보 꼬마.”

루카스가 나타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나 안 울었거든!”

“그래? 그렇군.”

나는 조금 빨개진 눈은 못 본 척 수긍했다.

“이리 와.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안전하게 대피했어. 너도 해야지.”

“나 공녀님이랑 같은 말 타기 싫어.”

한번 말 놓았다고 꼬맹이가 자꾸 맞먹으려 들었다.

나도 나보다 두 배는 나이 많은 사람한테 반말하고 다녔으므로 업보이겠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가 루카스를 한 품에 안아 들며 쫑알거렸다.

“아이구, 아이구. 많이 놀라셨지요? 아이구.”

“나 꼬마 아니야!”

“예에, 꼬마가 아니시지요. 일곱 살이 아니라 열일곱 살은 되어 보이십니다!”

루카스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무서워하고 있던 것도 다 까먹게 만드는 대단한 깐족거림!’

아이를 잘 얼러 가며 제이가 루카스를 앞에 태웠다.

“슬슬 숲을 나갈까요? 기운이 심상찮습니다.”

언제 우쭈쭈 하며 사람 놀렸냐는 듯 제이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비가 내린다면 폭탄은 터뜨리지 못할 테니 그건 다행이겠군요.”

“혼자 나가, 제이.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

“그럼 주군께서 오실 때까지 곁을 지키겠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오기 힘드실 것 같은데.”

아이가 있는 데서 육성으로 하기는 껄끄러운 내용이라서, 나는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가리켰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제이는 내가 “아야…….” 하는 발연기를 시연해 보이자 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입을 꾹 닫았다.

“그러니까 어서 가 봐. 경은 경이 할 일을 해. 나도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제가 할 일은 공녀님을 호위하는 것입니다.”

‘하이고.’

이럴 시간 없는데 자꾸 대치가 길어지니 답답했지만 제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얼굴 팍 구기며 주먹 들어 올리는 대신 입을 움직였다.

“안 돼. 아이가 있잖아.”

그때, 다른 목소리가 대화를 파고들었다.

“제가 아가씨의 곁을 지킬 테니 경께서는 아이를 보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노아였다.

“아가씨께서 숲에 가셨다는 말을 듣고 서둘렀는데, 만나서 다행입니다.”

노아가 내게 인사했다.

“리엔타의 기사야. 제이 경은 이만 가 보도록 해. 어차피 대공 전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혼자 있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었잖아?”

나는 턱으로 루카스를 가리켰다.

“아이는 늘 최우선으로 안전해야지.”

제이가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이에르 공자님을 안전이 확보된 장소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고삐를 세게 잡은 제이가 루카스를 단단하게 지탱했다.

“하지만 그 후 다시 숲으로 돌아올 테니 그건 질책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

그렇게 두 명과 헤어진 후.

노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로단테가 갑자기 아가씨께서 계신 장소로 가야만 한다고 연병장을 찾았습니다. 어른스러운 아이가 보채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함께 왔고요.”

이 사냥 대회는 황실이 주관하는 행사다.

정작 리엔타 공작은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 가문의 기사가 뒤늦게 합류하였으니 이 일은 황제와 황후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사냥 대회에 리엔타의 일원이 하나도 없던 것도 아니니 트집 잡히는 상황은 없겠지만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보려고 할 것이었다.

‘그때 로단테 얼굴이 얼마나 안 좋았길래 노아가 온 거지?’

그래도 그 정도로 끝날 일이었다. 수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응, 알겠어. 노아.”

조사에서 대답할 말을 맞추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는 의미였는데, 알아챘는지 노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애초에 어린아이가 길을 헤매다 우연히 다다른 장소이니 숲의 초입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는 속력을 늦추며 원작을 떠올렸다.

“아앗.”

휘청휘청 뛰던 사샤가 기어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도망쳐야 하는데, 아이의 시야에 문득 어느 부분이 들어왔다.

그곳은 풀 한 포기 없어 흙이 드러나 있었다.

[사샤를 그려 줄게.]

그 새까만 토양은 마치 며칠 전 이리안과 함께 색칠한 그의 머리카락 색깔 같아서, 사샤는 입술을 움찔움찔 떨고 말았다.

‘이리안 님.’

무서워요. 많이 무서워요.

얼른 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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