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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조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78) (78/232)

78화

그 문장을 읽은 것은 벌써 꽤 오래전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제 딸은 절대 안 된다며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하는데 별수 있겠어?]

[공작을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없애는 게 낫기는 합니다만…….]

괜찮아. 공작은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작의 죽음은 저렇게 시작되니까.

설령 이 일에 휘말려도 생명에 지장이 가진 않을 것이다.

공작은 고위 신관도 부를 수 있는 권력가이니 다쳐도 금세 회복될 것이다.

그거면 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처럼, 나는 되뇌었다.

그러자 작은 되물음이 들려왔다.

정말 그걸로 되느냐고.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즐거웠고, 기뻤고, 때로는 어서 내일이 오기를 바라기도 했다.

소중한 기억들이 쌓이고, 잃고 싶지 않은 사람도 생겼다.

‘……그렇네.’

그래서 이제는, 공작에게 생긴 생채기도 아주 많이 신경 쓰일 것 같았다.

* * *

“황제 폐하를 호위하라!”

“전열을 갖춰 대응해!”

사방이 아수라장이었다.

불규칙적으로 이어지는 폭음과 비명, 울음소리가 합쳐져 불온한 분위기가 매캐한 연기처럼 맴돌았다.

‘사샤를 마차에 태우는 건 어렵겠군.’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칼릭스는 상황을 관조적으로 바라보았다.

특정 인물 혹은 단체가 개입한 것이 분명한 지금. 덜덜 떨면서도 이 위험에서 당장 도망치고자 마차로 달려가는 귀족들은 적었다.

전례가 있는 일이었다.

특히 귀족파 귀족들은 이 일을 빌미로 주모자로 몰려 숙청의 본보기가 되진 않을까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거기에는 사냥을 위해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얄팍한 안도감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주군!”

리반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말하기 편하도록 칼릭스가 그의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리반이 요점만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폭음은 세차지만 정작 사상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폭음의 목적은 귀족들을 한곳에 몰아 두기 위함일 가능성이 컸다.

“일격만 가능해서 한 번에 끝내고자 사람을 모아 두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 특정 인물……. 사, 사샤 님?”

사샤가 칼릭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샤가 떨어지는 줄 알고 기겁한 리반이 울부짖었다.

“어서 가세요. 저는 리반의 옆에 꼭 붙어 있을게요.”

칼릭스가 짧게 웃었다.

“내가 공녀에게 많이 혼이 나지 않도록 부탁할게, 사샤.”

리반의 왼쪽 다리를 두 팔로 옹골차게 잡느라 볼이 눌린 아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돌아서며 칼릭스는 매복한 검은밤의 기사들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다시 드러난 벽안은 더는 미소 따위로 감출 수 없을 만큼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 * *

오랜만에 꿈을 꿨다.

타티스라는 성을 이름 뒤에 붙이고 살 적에, 꿈에서도 만나는 것이 사무치게 싫어 견딜 수가 없던 그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악몽에 시달리다 겨우 정신을 차린 늦은 오전.

“로단테!”

엔젤이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던 것도 같았다.

“이상해. 이상한 꿈을 꿨어. 그 여자가 나타났단 말이야!”

멍하니 “나도…….” 하고 중얼거리던 로단테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엔젤. 오늘은 나가지 말…….”

나가지 말고 여기서 함께 꼭꼭 숨어 있자고 말하려던 로단테는 멈칫했다.

이 악몽이 언제는 그를 위해 위협을 예고해 준 적이 있었던가?

‘공녀님인지도 몰라.’

“공녀님께는 내가 가 볼게.”

같이 가고 싶다는 얼굴로, 영리한 동생은 조심히 다녀오라며 온기를 전해 줬다.

공녀가 만약 크게 다치거나 한다면, 리엔타의 피후견인도 아니고 공녀의 피후견인인 그는 다시 내쫓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에 불과할 텐데도.

이상하게도 로단테는 숨이 턱 끝까지 치달아도 달음박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연병장까지 내달린 소년이 익숙한 기사를 붙잡았다.

“고, 공녀님은 어디, 어디 있어요?”

“너 왜 이렇게 숨을…….”

의아한 기색으로 노아가 대답했다.

“오늘은 사냥 대회이니 수도의 서쪽 숲에 계실 테지.”

로단테는 딱딱하게 굳었다. 이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 알면서도 말했다.

“느낌이 이상해요. 공녀님께 가야 할 것 같아요. 아니, 가야 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리엔타 공작이었다.

공작이 연병장에 나타나는 광경은 샤를리즈가 예비 약혼자의 저택에서 생활한 이후로 전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샤를이 열심히 달렸던 땅…….]

구슬프게 중얼거리던 면모는 어디를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얼굴로 공작이 재차 말했다.

“물었다.”

“악몽을 꿨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이상해서…… 공녀님을 뵈어야만 할 것 같아서요.”

로단테를 가볍게 훑어본 공작이 돌연 입을 뗐다.

“집사. 사냥 대회가 언제 시작이었던가?”

“오전 열 시경입니다.”

“이런. 잠시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늦어 버렸군.”

“채비를 돕겠습니다.”

소년은 노아의 손에 이끌려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 있던 엔젤이 벌떡 일어났다.

“공녀님께서는 네가 한동안은 저택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내게 당부하셨다.”

“가야 해요.”

엔젤이 말했다.

아이의 똑바르게 닿아 오는 눈을 마주 바라보던 노아는 한숨을 쉬었다.

“……공작 각하께서도 함께 가셔서 다행이지. 얼른 채비해라. 각하께서는 아마도 벌써 준비를 마치셨을 테니까. 그리고 엔젤, 너는 별관에서 절대로 나오지 말고.”

“그럴 수 있다면요.”

맹랑한 대꾸에 헛웃음을 친 노아가 엔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한 시간 전의 일이다.

로단테는 도착하자마자 발길 닿는 대로 발을 마구 놀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러다 보면 기어코 마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건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얼굴이 많이 상했어.”

가녀린 손으로 제 뺨을 감싸며 피오니가 눈썹을 모았다.

소년에게 삼 년은 긴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전혀 아니라는 듯 피오니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수도에서 버러지처럼 사는 꼴이 재밌어서 내버려 두었더니 이상한 곳으로 갔더구나.”

피오니가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로단테를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며 웃는 얼굴이 맑았다.

“아직 너를 파문하지 않았어. 타티스 후작이 되고 싶지는 않니? 공녀의 언제 끝날지 모르는 후원에 기대 살아가는 삶보다 나을 텐데.”

“…….”

“네 생각은 어때?”

“원하지 않아요.”

로단테가 단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신을 마주 보고 사는 게 더 끔찍해.”

“아하하하.”

증오스럽다는 말에도 피오니는 웃었다. 태어나자마자 그녀가 정해 버려 본인의 의사가 전혀 들어갈 수 없던 일을 거론하는 건 여전했다.

“이름 따위, 바꿔 버리면 돼.”

이름을 유지했던 건 이 이름에 애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혹여 엔젤이 그를 찾고 있을까 봐 그랬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엔젤도 같았을 것이다.

동생도 이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보렴. 그래 봤자 네 진짜 이름은 바뀌지 않을 거란다. 네 동생과 네가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언제나 눈웃음을 지어 제대로 볼 수 없던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건 선연한 비웃음을 품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처럼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는 마님의 눈에 띄지 않을게요. 다시는 영지에 발도 붙이지 않을게요. 부모가 없는 천애 고아처럼 살게요. 그러니 제발 저희를…….]

[으응? 싫어.]

무릎까지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며 간절하게 빌었다.

‘왜, 왜 이렇게까지…….’

숨을 헐떡이던 소년의 눈이 문득 아주 미약하게 커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뻣뻣하게 서 있구나. 진정성이 더 없어졌잖아.”

그래서 침착해질 수 있었다. 로단테는 말려들지 않고 열없게 대꾸했다.

“……주인님이 그렇게 산 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요.”

“내 탓도 아니지?”

피오니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쩌겠니. 네가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인 것을.”

그때였다.

풀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감추려고 들지 않아 충분히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꽤 예의를 갖춰 부인을 상대했다고 생각했는데…….”

로단테를 바라보는 샤를리즈의 녹안은 사실 피오니를 바라볼 때의 그것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 아이가 내 피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말을 하고, 기어코 아이를 울리기까지.”

눈물을 닦아 주는 손은 차가웠고, 말하는 목소리는 싸늘했다.

하지만 소년은 공녀가 일부러 모습을 보여 준 순간을 기억했다.

완벽하게 기습하기 위해서는 같은 편에도 들키지 않도록 숨어 있어야 한다는 건 전술을 배운 적 없는 로단테도 아는 사실이었다.

두렵지 않도록, 여기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그런데도 공녀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이건 마님 때문에 우는 게 아니에요. 이건…….

“……!”

로단테가 샤를리즈를 제 몸으로 보호하고자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그러나 이어진 것은, 상상한 고통이나 서늘함을 품은 공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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