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흑마법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외따로 존재하는 것 같던 의문점들은 구심점을 기준으로 모여들었다.
이름에 집착하는 느낌이 물씬 풍겼던 미래의 조각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래 봤자 네 진짜 이름은 바뀌지 않을 거란다.]
나도 이름에 관해 위화감을 느낀 순간이 오늘 있었으니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알게 됐다.
‘내 이름을 내 입으로 말하기를 원했던 거야.’
원작이랑 지금 장면이 달라진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 명도 아니고 둘을 노려야 하니 필요 없는 인간들은 모아 두고 신경 끄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로단테는 내 손아귀에 있다고 생각해 회유하거나 제거하려고 했던 거겠지.’
전자라면 그놈과 연관되어 있겠다고 생각했고, 피오니는 전자의 함의가 듬뿍 담긴 말을 내뱉었다.
‘월척이다!’
나는 로단테를 안으며 바닥을 굴렀다.
얼마나 세게 휘둘렀는지 검날의 절반가량이 지면에 박혔다.
‘어, 어떡하지.’
내 몰골을 볼 수는 없지만 짐작은 갔다. 오들오들 떨고 있겠지.
[두 명이라는 걸 알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서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니 일단은 가만히 있어.]
‘노아한테 괜찮을 거라고 숨어 있으라고 했는데 여기서 왜 칼이 나옵니까.’
“눈동자가 떨리네. 겁나요? 괜찮아. 고통은 잠시거든.”
피오니가 고개를 숙이느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마침 잘됐어. 로단테. 정말로, 언제나 나를 도와줘서 고마워?”
‘회유는 내 심장에 검을 꽂아 넣으라는 쪽이었나 보군.’
내 품에 안긴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여전히 땅에 박힌 검에 손을 뻗은 순간, 나는 검신을 세차게 걷어찼다.
검이 부러지는 소리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소리가 있었다.
두 발의 총성이었다.
“윽.”
나는 품에 안긴 로단테를 더 꼭 껴안았다. 어린애가 보기에는 기억에 너무 오래 남을 상황이었다.
“다음은 머리야.”
늘 여유롭고 나른한 기색이 감돌던 목소리가 그저 서늘했다.
직전, 양 손등을 박살 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기도 했다.
“로단테. 눈 가려.”
나는 일단 피오니가 자진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악관절부터 오른손으로 잡아 고정했다.
그녀가 고통에 신음하는 틈을 타서 제대로 제압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노아가 빨랐다.
벼락같이 달려 나온 노아는 말 지지리도 안 듣는 동생 보듯 나를 바라봤다.
노아를 거꾸로 올려다보며 나는 쪼그라들었다.
“공녀, 손을 잡아.”
“아, 감사…….”
칼릭스는 말과 달리 내 손을 먼저 잡아 나를 일으켰다.
내 뺨과 손, 그리고 로단테를 차례로 스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타티스 후작 부인.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아야겠군.”
“오해입니다. 저는 사생아를 교육시키려던 것뿐인데, 공녀님께서…….”
“안타깝게도 말소리가 모두 들려서 말이지.”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아래에서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렇게 끝이라니.”
악에 받친 목소리는 숨이 넘어가듯 호흡이 불안정했다.
“지금 자만하고 있나? 그러나 형체 없는 손께서는 내 일을 계기로 너희를 노릴 테니 실컷 두려…….”
“시끄럽네.”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지척까지 시선을 맞대고 똑똑히 알려줬다.
“자아가 너무 비대해서 들어주기 힘들어. 네 일을 계기로 대체 뭘 한다는지 모르겠군. 내 수하가 이리도 형편없으니 전력을 보강해야겠다?”
으르렁거리듯 목을 울리고, 피오니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안녕, 실패자.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처박혀 버리렴.”
마지막으로 네가 보는 세상은 더러운 흙바닥일 거라고.
노아가 맥박을 확인했다.
“박동하지 않습니다.”
이번 일이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내가 원작을 읽었고, 미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흑마법을 연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목숨을 거뒀어. 그게 이번 일이 수상하다는 확신을 줄 게 분명한데도.’
칼릭스와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 * *
폭음이 멎었다.
피오니 타티스를 제외하면 사망자는커녕 사상자조차 나오지 않았기에 사안은 빠르게 마무리됐다.
귀족들은 재빨리 사라졌지만, 칼릭스는 황제에게 잡히고 말았다.
타티스 후작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전하자 황제가 대화를 요구한 것이다.
“샤를 님!”
내게 달려온 사샤가 안아 달라는 듯 손을 위로 뻗었다.
안고 다닌 적이 꽤 된다고, 몸에 익은 듯 무심결에 하는 동작이 애틋했다.
“샤를 님. 샤를 님…….”
나를 꼭 껴안고 내 얼굴을 확인하던 사샤가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 상처가 나셨어요.”
손바닥으로 슥 닦아 보니 피도 안 묻어났다.
“어디 긁혔어.”
“아픈데…….”
저가 더 아프다는 얼굴로 사샤가 속상하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안 아픔, 건강함, 배가 몹시 고플 뿐이라고 사샤를 안정시켜 준 후, 나는 저택에서 다시 만나자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어쩐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다리를 꼭 껴안고 걸어서 어기적어기적 이상하게 걸어야 하는데도 리반은 그저 행복해 보였다.
“로단테. 타자.”
마차 안은 고요했다.
나는 로단테의 눈치를 살폈고, 로단테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복잡하겠지…….’
나중에 성공하면 꼭 복수하고 싶었을 텐데 저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로단테. 후작 부인의 일은 유감이야. 그래도 후작은 아직 남아 있어.”
“네? 아.”
로단테가 고개를 저었다.
“마님이 그렇게 간 건, 아쉽지 않아요. 오히려 좋았어요. 마님에게는 그게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이었을 테니까요.”
로단테는 작은 창밖의 풍경을 명화처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 서로 팔짱을 낀 다정한 부부, 뛰어다니며 노는 꼬맹이들.
“마님은 언제나 기록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기억되고 싶다고. 그런데 이렇게 되었으니 다들 쉬쉬하겠지요. 그리고…….”
로단테가 살며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공녀님이 계셨으니까요.”
“맞아.”
누군가는 지루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소한 일상을 도난당한 소년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 로단테? 하루는 반드시 끝나.”
그러니까 힘들고 괴로운 순간도 모두 끝나기 마련이라고.
“정보 길드 드나들면서 대충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일 전문이거든. 오늘 일은 오히려 약소했다고 할 수 있지. 후작 부인의 등을 발로 밟지도 않았잖아?”
로단테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 다 나한테 맡겨. 난 여기서 더 고꾸라질 것도 없거든.”
“엔젤이 공녀님에 대해서 왜 자주 말했는지 알겠어요.”
로단테는 더는 창문 밖의 풍경에 관심 두지 않았다.
“공녀님은 자꾸 기억하고 싶어지는 사람이에요.”
* * *
무슨 뜻이지.
저런 말은 처음 들어 봐서 어리둥절했다.
로단테가 다시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겨서 속으로 궁금해하기만 하다가 마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고단하셨지요? 식사부터 하시지요. 아가씨께서 도착하셨다고 전달해 드렸으니 가주님께서도 도착하실 겁니다.”
걱정스레 나를 바라본 집사는 한결 안심한 얼굴을 했다.
로단테가 얼굴 긁힌 것을 다 치료해 줘서 다행이었다.
고맙다는 눈빛을 보내자 꾸벅 인사한 로단테가 사라졌다.
‘???’
……고맙다는 거였는데,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나 보다.
터벅터벅 다이닝 룸에 도착해 의자에 앉았다.
‘주방장이 많이 신경 써 줬나 봐.’
그것도 열 접시까지만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에, 식탁은 동그란 접시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드러나는 부분 말고는 육안으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주방 사용인들, 괜찮아……?’
이것을 모두 준비했을 그들을 염려하고 있을 무렵. 문이 열리고 공작이 비척비척 나타났다.
‘샤아아르으으을’ 하고 외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공작은 나를 힐끗 보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내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부터 하자꾸나.”
그래서 정말 드물게도, 공작과 하는 식사에서 정말로 밥만 먹었다.
오늘의 디저트로 코코아 밤이 나왔다. 공작은 노란빛이 도는 향긋한 차를 마셨다.
뜨겁게 데운 우유를 붓자 동그란 초콜릿이 갈라졌다.
초콜릿이 녹아 점차 짙게 물드는 우유를 바라보다가 나는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걱정 많이 하셨죠?”
“크, 크흠흠흠.”
아뿔싸.
맞은편 보고 눈치 보다가 말할걸 그랬다. 하필 차를 마시고 있던 공작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나는 다급히 내 물 잔을 내밀었다. 숨통을 위협하는 공격에서 겨우 풀려난 공작의 눈이 새빨갰다.
“이것도 죄송해요.”
이 작은 소동이 대화의 물꼬를 열었는지 공작이 드디어 말했다.
“폭음이 들리고 바이에르 공자가 보이지 않았을 때, 샤를 네가 공자를 찾았다고 들었다. 타티스 후작 부인이 사망했을 당시 네가 있었다고.”
공작이 손을 떨었다.
“특별히 너만 너를 생각하고 비겁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남들만큼만, 남들만큼만 그러면 안 되겠느냐?”
“사실 저도 월급 받고 일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일, 끼어들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공작이 화드득 고개를 들었다.
“샤를.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응? 무슨 일이 생긴 것 맞지?”
“사실, 무슨 일이 없습니다.”
“역시…… 어어?”
“없습니다.”
새롭게 생긴 일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한테 저 죽는대요. 저를 죽이려고 해요, 라고 말하기는 그렇고……. 누가 아버지 죽인답니다, 하기도 그렇고.’
공작의 얼굴이 알쏭달쏭해졌다.
“그런데, 왜……?”
“바이에르 공자도, 로단테도 둘 다 어린애니까요. 상황이 돼서 도운 것뿐입니다. 애들이잖습니까.”
공작은 ‘그런 거 신경 쓴 적 없었잖느냐?’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로 나를 흘깃흘깃 쳐다봤다.
“아버지. 한 모금 드십시오.”
“고, 고맙구나.”
공작이 내 컵에 손을 뻗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마셨습니다.”
“벌써?”
그러니 남은 아버지의 차를 마저 드시라고 권하자, 공작은 호록 차를 마셨다.
공작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것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나는 질문했다.
“어머니께서 저를 가지셨을 때 교황 성하에게 부름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교황이 뭐라고 했었습니까?”